국내 유학자들은 사대주의를 미화하고 국사학자들은 사대주의를 합리화하는데 급급하다. 유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 숭상한 것이라며 미화하고, 국사학자들은 신라의 사대주의 외교가 아니었다면 우리 민족은 오래 전에 몽고족이나 만주족 같이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해 없어졌는데도 청을 멸시하고 송장의 시체를 부등켜 안으며 명을 그리워했다. 모두들 명의 위대한 유교 문화인 주자가 만들어 놓은 사상 체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자가례(주자가 유가의 예법의장에 관해 상술한 책)를 맹목적으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회 전반은 경색되고, 반상 차별은 물론 여성 차별도 야기했다. 한편 국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통일을 했더라면 하는 가설은 아예 설정조차 안하고 신라 통일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 점만으로도 이들은 경주 중심의 김부식 사관의 추종자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대주의는 본심을 숨기고 자신들의 의도를 미화하고 합리화함으로써 그 정체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김유신이 사대를 한 진짜 이유는?
▲ 경주 황성공원 내 김유신 동상. 김유신은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사대주의는 기득권층에게 자기 안전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승만과 주변 친일파들, 고종과 주변 중신들, 신라 경주 중심의 기득권층들, 현재 야당 안에 포진한 이승만 자유당 때부터 대물림한 기득권층 등이 바로 사대주의의 담지자들이다.
이들은 개인 출세욕이 국가나 민족의 이익보다 앞서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무엇이든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대주의이다.
그러나 사대주의자들의 이익은 민중의 이익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민중들은 언제나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오며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왔다. 동학 농민 전쟁의 주인공인 농민들이, 지금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의식 있는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그럼 지금부터 김유신의 사대주의 배경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 김유신과 같은 인간들이 있는지도 살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라 지도층이 걸사표를 당에 보낸 612년(진평왕 34년)은 사대주의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걸사표를 작성한 주체는 김유신과 김춘추다. 김유신의 출신 배경을 알면 그가 얼마나 출세를 갈망했는지, 왜 그렇게 망국적 굴욕 외교를 하면서까지 사대주의 행각을 벌렸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출세욕이 사대주의의 씨앗
보통 김유신을 경주 출신으로 알고 있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진천이다. 그는 진천읍에서도 오지인 계양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서현은 진평왕 16년(594년)에 만노군 태수로 진천에 부임한다. 진천이란 어떤 곳인가? 진천은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변경지대이다. 지금도 이 일대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나오고 있다. 진천은 신라의 북방 한계선이었으며 김서현은 이곳의 수비대 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수비대장의 자격으로 변방으로 보냈다는 점은 신라에 대한 그의 충성이 보통 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 안보의식이 남다르지 않으면 이런 위치에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에 대한 그의 확고한 정신은 출신배경에서도 분명히 증명된다.
김서현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仇衡)왕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신라에 패망한 나라로 김유신의 가문은 패잔국의 후예들인 것이다. 때문에 김유신과 그의 가문이 신라의 상층부에 올라가자면 경주 지도부에 웬만큼 충성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를 부흥시키기 위해 신라에 저항하든지 아니며 신라 지도층에 개같이 충성하든지 하는 양자 선택의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김유신 가문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결국 이러한 충견 같은 기질, 즉 사대주의 기질은 가문의 배경에서 이미 명확하였다. 후에 그가 당나라에 그렇게 비굴한 외교를 편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김서현은 한 건 잡아 신라 지도층에 눈도장을 찍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산골 계양마을에서 무술 연마로 한 건 잡는 일 외에 출세가 어렵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문인으로 출세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김서현의 아버지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고, 그의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아양공주였다. 백제 성왕은 백제를 가장 부흥시킨 왕이 아니던가. 이런 왕이 김유신 일가의 손에 전사하였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서현은 대원신동이란 신분이었다. 대원신동도 진골 정통에 버금가기는 하나 경주의 주류는 아니었다.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의 아버지는 숙흘종이며, 숙흘종은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의 아들이다.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가 진흥왕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만명부인이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은 길에서 우연히 만나 눈이 맞아 중매도 없이 야합하여 김유신을 낳았다. 이런 야합에 의한 결혼을 만명의 어머니 만호태후가 허락할 리 만무하였다. 그 이유는 서현이 진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명을 벌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현은 약탈혼 즉 문을 부수고 들어가 만명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에 진평대왕은 딸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서라벌로 돌아 올 수는 없는 몸이었다
출세에 눈 먼 김유신과 이승만
이런 가문의 배경을 김유신은 타고났다. 주변부 인물로 태어난 김유신이 경주 중앙 무대로 진출하려는 욕망은 너무나도 철저한 것이었다. 김유신은 한 건을 하지 않고서는 자기 신분으로 경주 지도층인 진골의 숲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계책을 세워 김춘추와 처남매부 간의 관계를 강고하게 맺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누구 보다 앞장서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려 혈안이 되었다. 이는 그의 조부 때부터 내려온 '가문의 부흥' 전략과 맥을 같이 한다. 드디어 김유신은 그의 할머니 만호 태후로부터 “너는 진실로 내 손자”라는 격찬을 받는다. 서현과 만명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만호 태후도 김유신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마음을 돌린 것이다. 김유신은 이런 칭찬을 들을수록 더욱 분발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공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것이 기록으로 남은 김유신의 행각 일부이다. 김유신 같은 인간의 유전자는 진평왕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역사 속에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사대주의는 이렇게 인간의 출세욕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그 혈맥은 굳건히 우리 역사의 역사관이 되고 역사 철학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대주의 하는 것은 당연하고 조공외교가 왜 잘못된 것이냐며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세욕과 개인의 기득권 쟁취를 위한 야망과 야심이 사대주의의 배경을 이룬다.
우리는 김유신과 같은 사대주의 피를 이승만에게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여운형의 좌우합작 나라를 한 치도 사랑하지 않으며 반쪽짜리라도 대통령이 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민족이 둘로 갈라지건 말건 정권을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친일 매국노들을 자기 기반으로 삼았다. 결국 그 때 형성된 매국노들은 남한 사회에서 기득권층이 되어 보수의 이름으로 행세를 하고 있다
이승만은 김유신과 같이 동족을 토벌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지연과 전명운 두 열사의 법정 영어 통역을 부탁받았으나 두 열사가 테러리스트라고 통역을 거부했다. 그 당시 교민들이 돈을 모아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비행기 값까지 주며 이승만을 초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하고 동부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당시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 유학가 있던 신흥우가 통역을 대신하였다.
이승만은 우리 땅에 친미 사대주의를 심은 장본인이다. 그는 안중근 그리고 백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자기와 차별화하였다. 그는 국군 작전권을 1950년 미국에 넘겨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어찌 김유신의 사대주의 유전인자가 이승만 한 개인에게만 흘러들어 갔겠는가? 사대주의는 21세기 백주 대낮에 백악관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기웃거리며 나라의 운명을 통째로 내맡기려는 모든 정치인들의 혈맥 속에 흐르고 있다.
2007년 내년 대통령선거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사대주의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그런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급변하는 동북아정세속에 민족정기로 무장한 지도자가 선출되어야 오랜 사대주의 고질병을 치유할 역사적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 대선은 청산하지 못한 사대주의의 썩은 얼을 도려내고 조선의 혼과 얼을 되찾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