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라늄농축에 대한 북한의 집요한 의지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의 역사는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에 놀란 클린턴 행정부가 휴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요소였던 ‘북R31;미직접대화 불가’ 입장을 바꿔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R31;미 직접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일때 북한은 이미 핵무기의 또 다른 원료인 ‘고농축우라늄’(Highly Enriched Uranium: HEU)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영변의 핵활동 차단을 목표로 하는 북R31;미 협상이 타결될 경우에 대비해서 새로운 핵무기 개발 루트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북한에 HEU 기술을 제공하고 협조한 국가는 파키스탄이다. 1993년
12월 당시 파키스탄 총리였던 베네지아 부토가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회담하면서부터 북한과 파키스탄 사이의 긴밀한 비밀 군사협력이 가속화되었다.
두 나라의 거래는 북한이 사거리 1,000km인 노동미사일 개발 기술과 장비를 제공하고 파키스탄은 HEU에 관련된 기술과 장비 및 현금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인도의 전략적 거점을 타격할 능력을 원했던 파키스탄은 1993년 5월시험발사에 성공한 북한의 노동미사일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지금 핵탄두를 탑재해서 배치되어 있는 ‘가우리’(Ghauri) 미사일이 바로 북한이 제공한 노동미사일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그 대가로 북한은 당시 파키스탄이 보유한 원심분리기 P1, P2 수 십대와 설계도면 및 관련 기술을 제공받았다.
북한 전문가 수십 명이 파키스탄의 핵개발 연구소인 ‘칸 연구소’를 방문했고, 1998년 5월 말 파키스탄의 핵실험 현장도 참관했다. 9/11 테러 이후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정부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하면서 파키스탄 핵무기의 아버지이자 국민적 영웅인 칸 (Abdul Qadeer Khan) 박사가 자행한 핵 밀거래 네트워크의 실체가 공개된 바 있다. 당시에 칸 박사는 자신이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열 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했으며, 한 번은 북한 당국이 평양 인근의 지하 시설에서 실제 핵탄두를 보여주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대한 의구심과 문제제기는 계속되어왔다. 특히 공화당이 주도하던 미 의회가 제네바 기본합의를 위반하면서 핵개발을 계속하는 북한의 행태를 문제 삼지 않는 클린턴 행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를 들어, 1999년 당시 하원의장은 9명의 하원의원들로 대북정책그룹을 구성하고, 제네바합의가 체결된 1994년 이후 5년간 북한의 위협이 줄어들었는가를 조사하도록 요청했다.
같은 해 11월에 발간된 보고서는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를 위반하면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등 플루토늄 생산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기조가 2001년에 취임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2002년 10월 켈리 동아태차관보가 부시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우라늄농축 문제를 제기하자 강석주가 “그 보다 더 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면서 사실상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제2차 북핵위기가 촉발되었다고 하지만, 북핵문제의 실상을 보자면, 북핵위기는 북한이 영변에 재처리공장을 짓던 1980년대부터 중단없이 계속되었으며, 그 위협의 강도는 점점 더 커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