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때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또한 1969년 7월25일, 닉슨 대통령은 예고없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아시아국가들은 미국의 의존을 버리고 스스로 안보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군은 병력을 휴전선 쪽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안보의 위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투쟁을 해야했던 것이다.
또한 1971년 3월,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마저 철수를 하게 되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전임 포드 대통령의 약속을 깨뜨리고 미군을 철수한 것이다. 당시 포드 대통령은 주한 미군의 철수를 동결하고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지원도 계속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취임한지 불과 2년여만에 카터 미국 대통령은 약속을 전면 백지화한 것이다. 또한 자유 월남의 패망의 교훈도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국방을 구상하기에 이르렀고, 방위산업의 기초가 되는 중화학 공업을 빠른 시일내에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는 핵무기 개발이 완전한 국방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핵개발에 대한 관심이 무척 컸다. 따라서 자주국방을 논함에 있어 핵무기의 개발은 빠질 수 없는 것이다.
71년 11월 11일, 국방과학연구소(ADD)에는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번개사업'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자주국방의 시작이었다. 번개사업에는 당시의 내노라하는 핵심 소장들로 구성이 되었고, 짧은 기간 내에 군장비를 국산화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지원금과 실험실, 실험기구들의 부족이 그들의 사기를 한때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우수한 인력을 바탕으로 한 오기와 집념으로 버텼다.
하지만 미국에 의존하던 그들에게 있어서 짧은 기간 내에 군장비의 국산화란 쉽지 않았다. 일선 지휘관 사이에서는 미국 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긴 안목으로 봐도 낫다는 자포자기적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그 당시의 연구자는 사면초가의 입장에 있는 듯한 심정을 겪기도 했다. 박정희는 또한 핵무기의 소유에도 관심을 갖고 과학자들을 격려하며 연구를 하도록 종용했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카터 미국 대통령의 미군 철수였다. 이에 안보의 위험을 느낀 박정희는 자주국방의 완벽한 모습을 핵무기 소유로 생각하고 미사일 발사의 성공에 힘입어 핵개발에 힘쓰게 되었다.
우선 핵개발에 필요한 한국인 과학자들은 대거 미국에서 연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데려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국측은 직접 핵물리학자들을 만나며 설득을 하고 고국으로 가기를 요청했다. 고국에 돌아온 그들은 핵개발에 지대한 노력을 하였고, 그 성과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핵개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번개사업으로 시작된 그들의 군장비의 국산화에 대한 그들의 노력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의지와 집념만이 있었을 뿐이다.
첫 걸음답게 그들의 시행착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노력의 결과가 하나하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류탄·방탄모 등의 국산화, 국산 방독면의 제작, 60mm 박격포의 성공, 군용 지프의 국산화 등 그들의 노력에 대한 결실물은 많았다. 1972년 4월의 시사회를 계기로 무기의 국산화 작업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자주국방에의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자신감을 갖게 된 그들은 1975년, 탱크의 국산화에 도전하게 된다. 겁없이 도전하기는 했지만 탱크란 장난감처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전수를 위해 미국의 기술자를 데려오는 등 그들은 초기의 어려움을 톡톡히 겪었다.
수류탄·소총에서 시작된 자주 국방 계획은 해를 거듭하면서 미사일·핵무기 개발 의욕으로까지 이어지고 그러던 1978년 9월 26일, 그들은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서해안의 한 바닷가의 종합시험기지. 그들은 결국 대통령의 눈앞에서 직접 국산 미사일의 발사 시범을 보여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7번째의 유도탄을 자제 개발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4개월만에 모든 군장비를 국산화하라는 그 시대에는 다소 무모하게 들렸던 '번개사업'은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드디어 해내고야 말았다. 초기의 수류탄·방탄모 등의 국산화는 물론 탱크의 성공은 그들의 의지를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탱크까지 국산화에 성공한 그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자주국방에의 의지가 커졌고, 그런 의지는 미사일·핵무기 개발 의욕으로 번져갔다. 1978년 9월 26일에 성공한 미사일의 성공이 그 자극제가 되었다. 이때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을 비롯하여 중거리 유도탄 다련장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국산장비들의 발사가 성공적이었다. 박정희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1년 12월 26일 박대통령이 '유도탄 개발지시'를 내린지 불과 7년만의 일이었다.
북한보다 우위의 국력을 갖고 싶었던 박정희에게 핵무기 개발의 계기가 된 것은 프랑스의 1960년 2월, 사하라 사막에서 행해진 핵무기 실험의 성공과, 또한 74년 인도의 핵실험의 성공이었다.
각국이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일 때 우리 나라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70년대 내내 박정희 대통령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한갓 소망에 지나지 않았다. 자주국방을 위해 애쓴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강대국 앞에서는 한낱 약소한 나라의 대통령일 뿐이었다. 미국의 견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것의 완성은 핵무기 개발로 표현된다고 생각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75년 8월, 포기각서를 썼고, 그를 뒤 이은 79년 5월 31일, 전두환이 국보위의 상임위원장에 취임되고 그후 신군부는 유도탄개발에 앞장서온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점점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유도탄 개발사업은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고, 노태우 대통령의 비핵화 사업포기로 핵과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에의 의지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70년대의 성공의 한 단면이다. 물론 약소국의 비애를 느껴야만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노력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처음 박정희의 번개사업으로 시작된 자주국방에의 의지는 놀라기에 충분한 것이 많았다. 총포·탄약 등 재래식 경무기와 주요 군수 장비를 4개월내에 국산화하라는 등 황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혈기왕성했던 그 당시의 과학기술자들은 갖은 노력 끝에 미사일의 소유라는 어마어마한 성공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의 속속 이어진 군장비들의 국산화로 한국의 방위산업은 한 단계 높아졌고, 그에 따른 자신감도 많이 갖게 되었다. 자주국방으로 시작되어 핵개발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까지, 그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미사일까지 보유한 한국은 더 나은 핵무기를 개발하고자 하였지만 그러한 의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나버렸고,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핵개발은 사실상 끝났다.
처음의 무모한 사업을 거쳐 시작된 자주국방에의 의지는 비록 핵무기 개발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로 인해 한 단계 높아졌고, 오늘의 국방산업에 많이 이바지한 기초가 되었다.
맞냐?
맞냐구..등ㅅㄴ아..
자기 주장은 없고 비꼬기만 하는군.....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ㅉ 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