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밀광복군’ 1980 년 육군본부의 ‘창군전사(創軍前史)’가 발행된 이 책은 지금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실과 군사연구소,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돼 군사(軍史) 연구 자료로 쓰이고 있다.
1980년 8월18일 육군본부가 펴낸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군으로 위장한 비밀광복군으로 등장한다. 1939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간 것도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이며, 1945년 초 광복군에 가입해 제3 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1979 년 10 월 26 일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화로 인하여 흉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료에 의해 1980 년 8 월 18 일 창군 전사에 기록 되었다.
한동안 박정희가 독립군을 수천명 학살하고, 수백회 토벌에 나섰다는 좌경주의자들의 글을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 다녔으나,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에 비추어 보면,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친일의 역사는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져야 하겠다.
김일성 시절부터 박정희가 죽어야만 적화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주사파들과 386 좌파 세력들은 북한 공산당이 날조 왜곡한 기록들을 가지고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지금도 그들은 박정희를 철천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며 활동하고 있다.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혁명이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벅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만주군관 학교를 나와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한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으나,
박정희는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고 순국 선열들의 미기록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만약 박정희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하였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이승만도 아닌 박정희가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 하였다.
김희선 열린 우리당 의원이 자신의 백부라고 환부역조 사기 행각을 벌였던
조선 독립군 영웅 김학규 장군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제 2 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고 날조되었던 것을 우리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그렇게 박정희를 씹고 또 씹으면서 부관참시를 하여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신기남,김희선.이미경 등 진짜 악질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말 그대로 3 대를 떵떵거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한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친할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친)인 박성빈씨가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던 1892년에 경북 성주 지역의 접주(지역 책임자)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viewer.php?mgz_part=weekly&n=200505200500063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에 따르면
당시 22세의 나이었던 박씨는 경북 성주에서 동학혁명의 접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작성된 선산군지에는
"고령 박씨로 자는 화익이고,
관직에 제수됐으나 세난으로 불취하여 동학난에 연좌되어
성주와 선산에 우거하여 교류를 끊고 독서 과농으로 종로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유족회 측은
"동학자료집이나 현지에서 전해지는 얘기들을 종합하면 박씨의 동학활동이 확인된다"며
"박씨 묘비에도 '동학농민운동의 접주'라는 내용이 적혀있다"고 밝혔다.
유족회는 지난해 초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
박씨의 당시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으며
박씨는 청년시절 무과에 급제해
황해도 영변지역 부사(또는 함남 지역부사)로 발령받았으나
혼탁한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포기하고,
성주에서 동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박씨는
동학운동 탄압이 거세지면서
관군에 체포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구미 등에서 세상을 등지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 전여옥 대변인은
"박 대표는 유족회 측으로 부터 이 같은 사실을 접하고
'그런 훌륭한 분이 계셨느냐'고 경의를 표했지만
일부러 부각시키지 말 것을 당부 했다"고 전했다.
[주간동아 칼럼]
새야 새야 파랑새야…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치 고갯마루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살을 에는 찬바람을 뚫고 몸을 날렸다. 그들의 손에는 죽창과 낫, 괭이 등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도구들이 들려 있었지만, 이들과 맞선 일본군은 총으로 무장했다. 이들의 싸움은 애초부터 무의미했다. 반봉건, 반외세를 주창했던 농민혁명군들은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일본군의 총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의 절규와 함성이 사라진 지 110년이 지난 2004년 2월9일, 16대 국회는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그러나 매우 의미 있는 법안 하나를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근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제7177호)’이라는 긴 이름의 이 법률은 고부(정읍), 무장(고창)을 비롯해 당시 전국에서 봉기했다 사라진 동학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첫 번째 진혼굿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법률이 통과됨으로써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동학농민혁명군이 햇볕 아래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동학농민 후손들 비참한 삶 … 참여자들 명예회복 시급
특별법 공포에 따라 2004년 9월 정부는 국무총리실 소속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유족 등록 및 결정,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 3개 분과로 구성, 운영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들은 동학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호남과 영남, 충청을 돌고 또 돌았다. 그 과정을 통해 짐작으로만, 그리고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동학 주역과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절손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도 아직 유족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경북 성주 및 구미 지역을 중심으로 구전돼오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할아버지 박성빈 옹의 동학 접주 활동을 간접 확인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순봉 전 의원을 비롯해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장관, 대학총장들도 동학농민군의 후손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족 신청 건수는 아직 미미하다. 2005년 5월 현재 신청 건수는 40여건에 불과하다. 정부는 올해 사업비로 3억6000만원을 배정, 위원들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동학농민의 후손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교도 진압작전을 펴면서 잔혹한 학살과 재산몰수라는 극단적 처분을 자행했다. 때론 참여 마을을 통째 소각하는 무자비함도 보였다. 목숨을 부지하자면 고향을 등지고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다. 만주 유랑에 나서고 의병에 참여하는 후손들도 부지기수. 이도저도 못한 후손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현대사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철저히 유린돼 숨어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금껏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은 보이지 않는 연좌제에 묶여 핍박과 수난의 세월을 살아왔다. 쌓이고 쌓인 한을 끝내 추스르지 못하면 그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1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부와 국민은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인색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대상황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적의 난, 동학 비도의 난, 동학변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등 이름과 모양이 각기 다르다. 같은 이념과 목적을 가진 하나의 농민혁명이 이리도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나, 때론 의문이 든다. 정치적 목적이 진실을 감추고 익명과 오명의 수모를 안긴 것은 지역과 세대의 장난이었을까.
근현대사의 기점은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동학농민의 정신과 실체를 파악, 희생자 한분 한분을 모두 역사적으로 복권시켜야 한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찬란한 미래가 열린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산 자들은 그들의 정신에 경건한 예를 표해야 한다.
중국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있고, 일본에는 자유민권운동 기념관이 있다. 독일은 유대학살 위령관을 운영하고, 멕시코는 농민혁명 기념관 등을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업을 통해 과거를 반추한다. 현실적 모순을 투영, 극복하고 자기 성찰을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거와의 대화에서 출발한다. (끝)
박기수 / 국무총리 소속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위원
발행일 : 2005 년 05 월 24 일 (486 호)
쪽수 : 92 ~ 92 쪽
http://www.donga.com/docs/magazine/viewer.php?mgz_part=weekly&n=200505200500063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1940 년 만주군관학교 입학
1942 년 만주군관학교 예과 수석 졸업
1942 년 일본육사 본과 특전 입학
1944 년 일본육사 본과 졸업
박정희는 194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곧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때부터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만주에 산재해 있던 공비토벌작전(共匪討伐作戰)에 참가했다.
그가 왜 군인의 길을 택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일본정부의 관료체제하에서는 자기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장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큰 삶에 도전해 보기 위해서는 군문을 두드리는 것이 지름길이었고, 군인이 자신의 적성에도 맞았던 것이다. 만주군 소위가 된 박정희는 지지하르에서 화북지방(華北地方)의 열하성(熱河省)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만주군 보병 제 8 단에서 근무했다.
이 제 8 단의 주요 임무는 모택동(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을 토벌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져왔다.
그 당시 만주군 제 8 단에서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高印慶)은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정희 소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 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平泉鎭)이란 곳에 있을 때 어느 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일본과 공비(共匪)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국광복을 맞이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된 지 1년 남짓하여 8. 15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그가 속해 있던 만주군 제 8 단이 주둔하고 있던 본부는 열하성(熱河省)의 반벽산(半壁山)이다.
이곳은 북경(北京)의 동북쪽에 있는 산악지대로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북쪽 변경이다.
제 8 단의 병력은 약 3천 명으로 연대규모의 편대를 유지하면서 공산 게릴라들과 싸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중국인 사병과 현지 중국농민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 8 단의 단장은 당제영(唐際榮) 상교(대령)가 맡아 있었던 것인데 사병은 전원 중국인이고, 장교도 대부분 중국인이며 일본인 20여 명, 조선인이 4명이었다.
그 4명의 조선인 장교가 신현준(申鉉俊), 이주일(李周一), 방원철(方圓哲), 박정희(朴正熙)로서 박정희는 당시 단장의 부관이었다.
그 무렵 중국 내부의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장개석(將介石)이 이끄는 국민당(國民黨)과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共産黨)이 천하의 명운을 걸고 사상전을 전개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처하는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거대한 중국대륙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일본군 제 8 단은 종전이 된 줄도 모르고 계속 산악지대를 헤매고 있었다.
1945년 8월 14일
방원철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구산즈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 중위로부터 유선전화가 걸려 왔다.
"형님 수고 많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소련군이 침공, 전면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제 8 단은 명령에 따라 외몽고의 다륜(多倫)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부로 돌아오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방원철은 박정희의 전화를 받고 반벽산으로 되돌아 갈 작정이었다.
행군로는 험하여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야 했다.
15일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비에 젖은 인마(人馬)는 무겁고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5년 동안에 걸친 제 2 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14년 동안에 걸친 일본의 중국침략 전쟁도 끝이 났다. 그리고 36년 동안에 걸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도 끝나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했다.
광복군 제 2 중대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만주와 북중국 및 조선반도에 이르기까지 힘의 진공상태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만주에는 소련군, 일본군, 만주군, 장개석군, 모택동군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만주군 제 8 단의 조선인 장교 4명도 무장해제 당한 채 부대 안에서 손님 대접을 받으며 며칠 동안 지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중위로 승진한 지 한달 만에 박정희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조선인 네 사람에게 부닥친 당장의 시급한 과제는 <고향으로의 무사 귀한>이었다.
철도가 마비되고 대중 교통수단이라고는 전무한 중국 벌판에서, 그리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공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힘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 이외에는 모두가 적으로 간주되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잡다한 무장집단들이
언제 어디에서 총질을 해댈지 모르기 때문에 귀환은 또 하나의 전투를 방불케 했다.
방원철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奉天)으로 가고
박정희, 이주일, 신현준은 북경(北京)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8월 29일 북경에 도착하여 맨 먼저 덕경루(德慶累)를 찾아갔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제지공장 자리로 옮겼다.
임시정부가 보낸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이곳을 숙영지로 마련한 것이다.
그는 중국 공군소장으로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던 사람이다.
그때 임시정부에서는 조선의 독립에 대비하여 군대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개석군, 팔로군을 포함하여 학병으로 끌려갔던 젊은 청년들, 일본군, 만주군에서 근무했던 젊은 장교나 하사관들 모두 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고국에 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약 400명의 청년들을 김학규(金學奎)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 3 지대에 편입시킨 것인데 이들은 제 1 대대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 1 대대장은 신현준(申鉉俊)이 맡고 그 아래 제 1 중대장은 이주일(李周一), 제 2 중대장은 박정희(朴正熙), 제 3 중대장은 학병출신의 윤영구(尹暎九)가 맡아 중대를 통솔했다.
그들은 소총, 기관총 등의 기본무장을 갖추고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최대의 현안은 먹는 문제였다.
간부들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고 심지어 광복군채(光復軍債)를 발행하여 그곳 동포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미처 식량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굶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박정희 중대장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박정희의 상관으로 광복군의 대대장을 했던 신현준에 의하면
「그 당시의 혼란상은 말로써는 다할 수 없다.
일본이 망해버리니 만주군 제 8 단도 장개석에 붙어야 할지 모택동에 붙어야 할지 갈팡질팡이고,
우리 광복군 안에도 부대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상문제로 밤새워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부대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갔다.
만주군관학교 1등 졸업, 일본육사 졸업이라고 하는 군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경력이나 나이도 그들보다는 월등히 많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호방한 성품인 데다가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다. 여운형(呂運亨)을 줏대 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어느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대장 동무>라고 하자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하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
박정희가 속해 있던 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도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중국정부와 미 군정당국에 대하여 교섭을 활발히 벌였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말뿐이고 특히 부대단위의 집단 입국이나 <광복군>의 명칭을 띠고는 입국할 수 없다고 했다.
전승국가도 패잔병도 아닌 묘한 입장에서 10개월 동안을 허송세월 하다가 1946년 5월 6일 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 천진(天眞)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박정희와 신현준은 다시 기차편으로 서울까지 올라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그의 고향집에서는 생사를 몰라 궁금해했다.
다만 어머니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북경에 있으면서도 우편, 전보, 교통 등의 통신수단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 박정희의 귀국에 대하여 어머니만은 "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 왔구나!"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와 하였으나 형제들로부터는 크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동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형 상희(相熙)까지도 "그냥 선생질이나 하고 있었으면 됐을 것인데 제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하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사실 박정희의 귀국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검정 물감을 들인 군복에다가 낡아빠진 군화를 신고 땡전 한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지휘봉으로 보이는 두어 뼘 남짓한 조그마한 막대기 하나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상 지휘봉을 휘휘 돌리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는 않았다. 형들이나 누님들의 집을 들락거리며 아무 데서나 먹고 자고 하다가 심심하면 대구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기 일쑤였다.
친구들을 만나면 술을 퍼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다. 박정희가 언제 술을 마다 했을까마는 그때처럼 술이 그를 위로해 준 적은 없다.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그는 하나의 습관처럼 학창시절에 배웠던
한시(漢詩)를 읊어보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었다.
원상한산 석경사 (遠上寒山 石徑斜)
멀리가을산 돌밭길 오르니
백운생처 유인가 (白雲生處 有人家)
흰구름 이는 곳에 사람의 집 있도다
정거좌애 풍림만 (停車坐愛 楓林晩)
수레 멈추고 마음껏 단풍을 사랑하니
상엽홍어 이월화 (霜葉紅於 二月花)
서리 맞은 잎새가 복사꽃보다 붉도다
하며 호기를 잃지 않으려고 짐짓 큰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술이 깨고 나면 다시 초라한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제일 가깝게 지낸 것은 작은 누님이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술만 마실건가! 취직할 생각을 해야지."
"구미에서 제가 무슨 취직을 하겠소.
아무래도 서울에 한번 올라가 봐야 하겠오."
"진실(귀희)언니한테 돈 얻으려 갔다면서?"
"에이, 돈 있으면 내가 보태주고 싶더라.
야! 마당에 닭도 많던데 그것 한 마리 잡아먹었으면 좋겠더라."
"서울 가는 여비는 너희 자형(한정봉)이 해 줄 테니 가 봐라."
그는 빈번히 작은 누님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 박정희가 서울로 가기 전날이다.
박재희는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의 오빠 상희가 신문지에 싼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이것 좀 잘 간수해라"하고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동생(정희)이 나타나 선반 위를 더듬더니 신문지에 싼 것을 내렸다. 카메라인 것이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 테니 형님한테는 나 기차 탄 뒤에 말해요."
"그거 비싼 거니?"
"갖고 가서 급하면 팔아 쓸꺼요."
하며 휑하니 나가 버렸다. 그 길로 서울에 올라온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 기생으로 입교했던 것이다.
미친 쉐히!!
이건 또 어디서.......
정말 한번씩 깜작깜짝 놀라게 하는군요
봉창이 어디있기는 한가보다!???
동수님.
깜짝쑈는 맞지요??????
ㅋㅋㅋ
들르는김에 사진 한장 박고 광복군???
ㅋㅋㅋㅋ
사람 약올려 말돌리는 니 짓 좀...
똥물 튀기는 니 짓 지겹지 않던???
이런거에 암말도 못 하고 욕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다는거... 겉으론 표현안해도 글 자체에 다 나타나 임마
파시스트 빨갱이 자뻑 사무라이 미재의 개새끼가 뭔지는 알지? !!!
미친쉐히!!
쩡석아.. 북한수구꼴통 자뻑사무라이 공산당의 개쉐끼가 뭔지는 알지??? 싸가지 없는 쉐히
뒤집어 진다.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 본토의 사과학교 까정 가서
일왕한태 충성을...이게 쑈랴???
ㅎㅎㅎ
너는 기회보수꼴통이기 때문에 두가지를 혼용하지..
북한 수구꼴통 자뻑 사무라이 공산당의 개쉐끼..
파시스트 빨갱이 자뻑 사무라이 미재의 개쉐끼..
네놈이 왜 미재의 개쉐끼고 공산당의 개쉐끼 인줄 아느냐??
미국이 만든 자본에서 밥벌어 처먹고 공산당의 개가 되어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알긋냐???
광복군을 쥐 잡듯이 잡았댜??
ㅎㅎㅎ
김구 선생이 남로당이 적이니 적을 알라고
남로당이 되럈다냐???
ㅎㅎㅎㅎ
남한을 발갱이 천국으로 만들라고
여순서 양민학살 하럈댜???
ㅋㅋㅋㅋ
사형에 처해지고
지 한 목숨 부지 할려고
김구선상이 지시해 남로당원 죄다 불어 뻔지고
(근까 빨갱이가 적이니 뭐)
근까 김구선상이 지시했다고??
ㅎㅎㅎㅎ
파시스트 빨갱이 자뻑사무라이 미재의 개새끼 노릇을
김구선상이 지시했댜????
ㅎㅎㅎㅎ
이 유딩 쉐히야!!!!!!!!!!!!!!!!!!!!!!!!!!!
김구선상이 지시해
쿠데타도 했다고 하지??????????
ㅎㅎㅎㅎㅎ
지시했냐??? ㅎㅎㅎㅎㅎㅎ
북한수구꼴통 자뻑사무라이 공산당의 개쉐끼가 열받으니까 논리고 뭐고 다 필요 없단 식이네...
1979년 까정
파시스트 빨갱이 자뻑 사무라이 미재의 개쌔끼가
할 일들을 다 지시했다고 우기지????
미친쉐히!!!!!!!!!
ㅋㅋㅋㅋ
ㅎㅎㅎㅎ
어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그랴도 더 타당하 것다.
캬~~아~~ ㅋㅋㅋ
파시스트 빨갱이 자뻑 사무라이 미재의 개쉐끼는 너야 너!!!
박정희는 일본을 사랑했고 한국을 또 하나의 일본으로 만들기를 노력했다.
The KCIA procured Japanese videos and music records for Park, who enjoyed all things Japanese and fancied himself as being a Japanese samurai.
KCIA는 일본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스스로 일본사무라이라 여기는 박을 위해 일본 비디오와 음악을 입수했다.
Park often conversed in Japanese with Seoul government officials.
박은 때때로 서울의 정부관료들과 일본어로 대화했다.
캬~~~아~~ ㅋㅋㅋ
꼴통 덜이 아는게 있다 우긴다!!!!
ㅋㅋㅋㅋ
70년대까지 광복군이 있었데.. .아이고 배야... 북한수구꼴통 자뻑사무라이 공산당의 개쉐끼가 이제 개그까지 하네그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도배해 쥬랴???
병신새히 ㅎㅎㅎ
@o@;;;;;;;
자료만 올리면 발광하면서 똥물 튀는 병신 쉐히가
자료 달란다. !!!!???
ㅎㅎㅎㅎㅎ
박정희는 일본을 사랑했고 한국을 또 하나의 일본으로 만들기를 노력했다.
The KCIA procured Japanese videos and music records for Park, who enjoyed all things Japanese and fancied himself as being a Japanese samurai.
KCIA는 일본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스스로 일본사무라이라 여기는 박을 위해 일본 비디오와 음악을 입수했다.
Park often conversed in Japanese with Seoul government officials.
박은 때때로 서울의 정부관료들과 일본어로 대화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해방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다. 몇몇 재중동포들이 기억하는 ‘마쯔모도’도 있지만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의 두 이름은 시기와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1941년에 바꾼 것이다. 언론인 조갑제는 저서 ‘박정희’에서 “군관학교에서 한국인 생도들에게 1주일씩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킨 것이다. 퇴교 등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고 밝혔다.
이 이름엔 원래 박정희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木)은 박(朴)에서, 정은 정희에서 따온 것이라서다. 이처럼 강압적 분위기에서 원래 이름의 흔적을 남기며 창씨개명하는 게 그 시대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르다. 우선 조선 이름 ‘박정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재일 언론인 문명자씨는 1999년 발간한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고 기술했다. 일본 백과 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김병태(79) 건국대 명예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며 일본군 고급장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했다.
쩡석아.. 니 큰 형님 도요다 다이쥬는 어떻게 생각하냐???크하하하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 직을 하던 중 만주 군관 학교에 자원하여 입학하였다. 그 뒤 수석으로 만주 군관 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시기에 창씨 개명으로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개명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1946년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좌익쪽의 장교였던 그는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 혐의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남로당 출신 장교에 대한 정보를 폭로한 댓가로 숙청은 면하지만 박정희가 쿠데타를 결심했던 데에는 그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1960년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역임 후 제2군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김종필을 비롯한 추종세력을 규합하였고, 이듬해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반공 친미, 부패 척결, 경제 재건 등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5월 18일‘군사 혁명 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칭하고 치안 확립과 경제 개선을 목표로 하였으며 6월 10일에는 비밀 첩보 기관인 한국 중앙 정보부를 발족시켰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에 올랐다. 이듬해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고 울산 공업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며 경제 발전을 모색한다. 1963년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한일협정 채결등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했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하여 제 6대 대통령이 된다. 1969년 3선 개헌을 통과시키면서 1971년 제 7대 대통령이 되어 3선에 성공한다. 이보다 앞선 1970년에는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여 농촌 개발에 앞장선다. 1972년 제 8대 대통령에 취임과 동시에 긴급조치 19호라는 것을 통하여 장기 독재의 기틀을 다졌다. 1978년 제 9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듬해인 1979년 궁정동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을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암살당하였다. 당시 나이 만 62세였다.
자료 달라던 쉐히가
도요다는 무슨 개소리???
니가 그렇지!!!!
똥수, 똥물만 튀는 병신 쉐히!!!
국민들을 위해서라면 장기독재가 왜 나빠??? 중요한건 헌법, 독재보다 민생안전, 민심인데
Park had served as a lieutenant in the Kantogun, part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in Manchuria, fighting Mao Zedong's Chinese Communist forces. Although the Kantogun also carried out actions against Korean guerrillas, it's improbable that Park participated in such action since there were no Korean guerrillas on the region at the time of his brief deployment...
자료 달라던 쉐히가
도요다는 무슨 개소리???
니가 그렇지!!!!
똥수, 똥물만 튀는 병신 쉐히!!!
===========================================================
봐라!
넌 사실에 관심 조차 없다.
니 대갈통은, 니 지식은, 니 능력은
오직 상대를 물고 늘어져
똥물에 뒹굴게 하는
병신 짓만 할 줄 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He became an ardent anti-Communist .../
이상하지!!!???
요건
"He was a Communist" 다음 문장이다.
/a coup in 1961.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요것도 김구선상이 지시했댜???
ㅋㅋㅋㅋㅋㅋㅋ
파시스트 빨갱이 자뻑사무라이 미재의 개 새끼가
왜 반공에 미쳤는지...
/He became an ardent anti-Communist .../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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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도 김구선상이 지시했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The military government introduced disruptive and authoritarian reforms which severely impacted the film industry.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is control came in the Motion Picture Law of 1962, which sought to introduce massive consolidation and a strong emphasis on commercial filmmaking. After passage of the law, film companies were required to own their own studios and equipment, have a minimum number of actors and directors under contract, and to produce a minimum of 15 films per year. That year, the number of film companies dwindled from 71 to 16, and soon after only 4 officially registered companies remained. Major revisions in the law would follow almost every subsequent year, making for chaos in the filmmaking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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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상에 있던 김구선상이 이 것 도??????
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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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 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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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로당, 근까 빨갱이 몽당 남한 당국에 불어
죽다 살아난 것 도 김국선상이 지시했댜???
ㅋㅋㅋㅋㅋㅋ
하긴 너도 재주가 그것 뿐이긴 하지!!!
니 꼴통으로 뭘 할수 있을가???
sentenced to death,
but released soon after
revealing the names of communist participants
to the South Korean authorities.
He was then released and left the army in dishonor. .../
어째 광복군이었단 개쉐히가
지 동료들을 불고 지만 사냐???
이 것도 김구선상이 지시???
ㅎㅎㅎㅎㅎ
박정희는 일본을 사랑했고 한국을 또 하나의 일본으로 만들기를 노력했다.
The KCIA procured Japanese videos and music records for Park, who enjoyed all things Japanese and fancied himself as being a Japanese samurai.
KCIA는 일본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스스로 일본사무라이라 여기는 박을 위해 일본 비디오와 음악을 입수했다.
Park often conversed in Japanese with Seoul government officials.
박은 때때로 서울의 정부관료들과 일본어로 대화했다.
이게
이 글의 원문이 뭔 줄 아냐???
ㅎㅎㅎㅎ
70년대 말 신문들의 글들이다.
이 꼴통 쉐히덜아!!!!!!!!!!!!!!!!!!!!!!
방추가 간만...^^
그 인공기가 걸려있는 싸이트에서 퍼온글 아직도 게시중인거야?
1997년 작성글이던데....
진짜 안습이다...
박정희는 비밀투사...
참 가지가지 한다.
역시 박통교에서는 뭐를 하나 만들어도
사람 기가 막히게 만들어...
글 잘 봤습니다. 빨갱이 박멸님.
Park often conversed in Japanese with Seoul government officials.
박은 때때로 서울의 정부관료들과 일본어로 대화했다.
"일본 최후의 사무라이의 죽음"
"일본 최후의 사무라이의 죽음"이라는 글이 실림. 결국은 목숨바쳐 사쿠라처럼 살다가 그렇게 사쿠라 .../
The KCIA procured Japanese videos and music records for Park, who enjoyed all things Japanese and fancied himself as being a Japanese samurai.
KCIA는 일본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스스로 일본사무라이라 여기는 박을 위해 일본 비디오와 음악을 입수했다.
//
70년대 말 만 해도
"일본 최후의 사무라이의 죽음"
이 표현에 토 다는 새끼덜이 없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