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만큼 국민의 시선을 의식한 통치자는 없었습니다.
부정부패 비리와 부조리가 많은 정권이기에 박정희가 직접 여론조사를 수시로 지시할 만큼 스스로 의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아니 감시했다가 맞는 말일 것입니다.
안기부와 보안사를 이용하여 폭압정치를 하면서 언론 검열과 방송 검열을 하여 보도지침을 하달하고 철저히 국민을 기만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기 위해서 감시를 철통같이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낮에는 농민과 막걸리를 마시는 척하고, 밤에는 금으로 도배를 한 궁정동 안가에서 국민 몰래 어린 여성들을 끼고, 수입금수 품목인 시바스리갈을 마시며 주지육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죽지육림에 빠진 박정희가 김재규 열사의 총에 맞아 죽은 시각이 몇시인지 아십니까?
오후 7시가 조금 넘는 시각이었습니다.
그 시각 당시 국민의 대다수였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쉬지도 못하고 저임금 중노동을 하고 있을 시각입니다.
역사를 봐도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고 가장 심도 있게 벌인 사업은 왕권을 탈취했다는 백성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한 이벤트 정치였습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자랑이나 장기자랑이 당시에도 관의 주도하에 전국으로 성행을 했고, 1등을 하면 반상의 구분없이 높은 품사를 하사했습니다.
박정희 역시 마찮가지였습니다.
안기부는 양지팀이란 축구팀을 육성하며 , 박스컵이란 정기적인 국제 이벤트를 벌였고 당시 우리나라 섹스산업이 토대를 마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권력은 권력의 시녀로 여성의 인신매매가 만연하였고, 힘있고 권력이 있는 자가 강제로 빼았아도 유전무죄, 유권무죄의 시대로 힘없는 국민은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를 보안사령관 출인인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철저히 악용한 게 현재의 우리나라 프로축구와 프로야구의 시발이 된 것입니다.
3s정책으로 국민의 시각을 정치에서 격리시키기위한 방책이었습니다.
친인척 비리가 없었다고요?
이렇게 사기를 쳐왔으니, 우민이 믿지요.
역대 통치자의 친인척 비리를 논하자면, 당시 정권의 검열을 받았던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 박정희 만큼 심한 통치자도 없습니다.
직접 강도질을 해 착복한 재산인 정수장학회와 육영재단, 친인척 및 측근의 축재로 동양철관 (장조카 박재홍), 설악산 케이블카(맏사위 한병기), 김종필(운정재단 명의의 서산농장 300만평, 제주도 감귤농장, 골동품)등 친인척과 이후락 등의 천문학적인 축재, 박정희 스승의 아들인 김우중 대우그룹 특혜, 더구나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수만평의 민가 땅(손석우의 '터' 참조)을 박정희는 강제 착복하였습니다.
박영복 부정 대출 사건은 박정희의 종친으로 알려진 박영복이 정보부 간부와 함께
은행장에게 압력을 넣어 약80억을 부정대출 사건인데, 단순 사기사건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삼성과 정경유착하여 벌인 사카린 밀수 사건,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는 밀수왕이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3년형을 받았습니다.)
박정희가 지시한 공화당이 강남 개발을 발표하기 전 땅 투기를 하여 벌어들인 막대한 차익과 박정희 재임기간에 벌어진 긱종 비리 사건을 보면 건설 리베이트, 차관 리베이트, 공화당 창당자금 마련을 위한 증권파동, 농협비료 부정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박정희의 친인척 비리는 세계 랭킹으로 따져도 1위는 따논 당상입니다.
박정희를 평가하는 세계적 시각은
친인척을 비롯한 개인비리가 없던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