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패러다임, 힘찬 시동 1962.01.05 “(1950년대에) 박정희 중령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가난과 전쟁으로 찌든 이 나라를 송두리째 뒤바꿔야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김용태, 월간조선 2002년 4월)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 박의장이 처음 발표하는 신년 시정방침에 온국민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1월5일 박의장은 “한국경제발전의 적극적인 목포를 공업화에 두고 금년은 이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할 것이며, 기간공업과 전력, 석탄. 농수산업 부문에 주력하고 화학비료, 시멘트, 종합제철, 정유 등 건설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톱다운으로 다운업을 끌어내는 ‘박정희 패러다임’ 5일 상오 송요찬 총리를 대동하고 경제기획원을 순시, 업무전반에 관하여 보고를 들었다. 5일 하오 재무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박의장은 “재무부 관하 금융기관이 구태의연하다는 일반의 비난을 듣고 있으니 정신을 차려야 하며 세무서원 가운데 옛날과 같은 비행이 있다면 이는 국가경제에 해로운 것이니 이를 철저히 감독하여 예방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박의장은 “관재업무를 철저히 하여 정부세입의 부실을 방지하고 특히 유휴 국유재산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 활용 방법을 찾으라”고 강조하고 “전매청 여공들의 건강을 위하여 방독면경을 만들어 주라”고 당부했다. 한국은행에서는 유창순 총재로부터 업무에 대한 보고를 들은 다음 “은행원은 은행의 이익이나 편리에 앞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강조했다. “그때 경제도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완전히 파탄에 이르러 밀수가 횡행했죠. 아버지가 5.16 일어나기 며칠 전에 백화점에 양말하고 내의를 사러 가셨더니 전부 일제, 미제, 홍콩제만 내놓더래요. 그래서 국산은 없느냐고 하니까 저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는 것을 상점주인이 꺼내오면서 '국산이 있긴 하지만 이걸 어떻게 쓰겠느냐'고 차라리 외제를 쓰라고 하더란 얘길하신 걸 기억하는데 경제가 그런 지경이었죠. (박근혜, MBC-TV 박경재의 시사토론 1989년 5월19일) 국가권력과 국민의 고난을 함께 움켜쥔 박정희.
열려라, 대한민국③
초등학교 교실 풍경. 담임 교사가 옥수수죽을 끓여 나눠주고 있다. 경북월성군 하강초등학교. (경북도청)
모진 가난이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미국의 원조물자를 얻어 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고 영양실조는 다반사였다. “밥 먹었냐?” “아침 드셨습니까?”하는 말은 오랜 가난의 부대낌 속에서 무사한지를 묻는 인사로 굳어졌다. 나날을 ‘먹는 걱정’으로 살고 지고 했다.
배고픈 국민에게 세끼 밥을 먹이기 위해 등장한 박정희 혁명정부.
“우리는 돼지가 아니다. 인간이 밥만 먹고 산단 말이냐?”
아직도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시공(時空)의 혼돈 속을 몽유(夢遊)하고 있다.
무엇이 구국인가. 누구를 위해 정치는 존재하는가.
“사람이 굶어 죽어갈 적에는 그 사람 앞에서 복지정책이 어떻고 저떻고 그런 얘기는 다 소용없죠. 우선 먹여서 살리는 길이 그 사람을 가장 위하는 길이고, 중병이 들어 수술을 해야 할 사람에겐 당장 수술을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최선의 길이죠. 또 출혈이 심하다 하면 아무리 좋은 옷이라 해도 찢어서라도 지혈을 시켜서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최선의 길인데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 하는 얘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해가 안됩니다. 나라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는 거니까” (박근혜, MBC-TV 박경재의 시사토론 1989년 5월19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하는 1962년 첫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가난의 편에 서서 나라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배고픈 국민에게 밥 먹여 주려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정치인들만의 정치, 대책없는 가난 속 무능하고 몽매한 후진 정치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제압하고, 오직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집념으로 구국의 길을 달려갔다.
신년 시정방침 발표. 1962-01-05. (박정희대통령전자도서관)
무자원, 무자본, 무기술의 3무. 싹이 보이지 않던 나라경제가 박의장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군정 기간에 외국방문 등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군복 차림을 했다.
경제기획원 순시. 1962-01-05. (정부기록사진집5)
경제기획원이 5개월여 작업 끝에 탄생시킨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청사진이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다.
기본목표는 원조 의존적인 소비경제를 청산하고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재무부 순시. 1962-01-05. (박정희대통령전자도서관)
한국은행 순시. 1962-01-05. (정부기록사진집5)
백화점 시찰. 1962-01-05. (정부기록사진집5)
혁명정부는 그의 책임하에 국가 주도형 개발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경제는 지시와 명령이 아니다. 경제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붙는 재화이며 가치다. 박정희가 주도하는 톱다운 경제개발은 국민을 일으켜세우는 경제, 다운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한국주식회사’로 불리는 국가주도의 성장모델은 오늘날 세계11위의 한국 경제를 이룬 모태가 되었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박정희 브랜드’로 불리게 된 연원 또한 1962년, 야심찬 경제개발을 본격 추진한 그때부터 비롯된다. (*)
운전기사가 회장님을 대신하는것이란...
저 시절 육군사관학교가 서울대법대 들어가는거보다 어려웠다 최고의 에리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한것이다 사관학교가 맨날 총들고 총쌈한게 아니다
우직한 리더? 정명석이를 말하는 겐가? ㅋㅋ
버스기사가 운전복 입어도 지럴할사람이네..ㅋㅋㅋ
당신은 지금도 사복입고 설쳐대잔아.. 옷벗고 설치슈..ㅋㅋ
골마님..
줄을 잘서는것은 슨상님 애들의 특기 아니던가요?
지금도 줄서고 난리인데....
아들도 줄서자마자 국개의원해먹자나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
사.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현)
=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
: 28살 포항제철 행정실장. 32살 동양철관 회장.민정당, 민자당 4선 국회의원
=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김종필 처남)/ 박준홍
: 31살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 32살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 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
= 박근혜 외삼촌 (박정희 부인 육영수의 오빠)/ 육인수
: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5선 국회의원
= 박근혜 외삼촌의 사위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
: 전직 청주 MBC 사장, 전직 충청일보 사장, 현재 일신산업 회장
= 박근혜 사촌언니남편 (박정희 형 박상희의 딸의 남편) / 김종필
: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
= 박근혜 여동생 (박정희의 또 다른 딸) / 박근영
: 육영재단 이사장, 육영재단 수천억원의 부동산 소유
= 박근혜 남동생 (박정희의 아들) / 박지만
: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
= 박근혜 사촌언니의 남편(박정희 형 박상희의 막내딸 발설자의 남편) / 김희용
: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 박근혜 박근혜 사촌언니의 동서(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 / 허영자
: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
: 허영자 오빠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
= 박근혜 이모의 아들 (육영수의 언너 육인순의 사위) 장덕진
: 박정희 정권하 장관
= 박근혜 이모의 아들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또다른 사위) 정영삼
: 한국민속촌 회장
=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 박재석
: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
= 박근혜 사촌오빠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 박재호
: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나
이렇게 청렴하신분들 봤냐?
하긴 내가 빼먹는 단물은 행복이고 상대방 8000억은 부정축재가 맞겄지여? ^^;;
슨상님 자제분이나 친척분들은 지금 모해요?
노무현도 어떤지 좀 갈켜주세요.
5년하고 어떤지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