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을 빨리 일본으로 만들려면 가장중요한건 뭐냐. 우수한 교사를 양성해야되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황국신민의 모든사상을 가르켜야 되기때문에.
대구 사범학교는 모든 지원을받으며 철저한 일본교육을받았다.
박정희의 구미보통학교 성적은 대단히 우수했으며 4기생으로 입학한다
그런만큼 철저한 일본교육을받는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 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4]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해서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했다. 1937년 4월 1일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5]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6] 박정희가 교사로 근무중인 1938년 9월 4일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출처 필요][7]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쳤다 한다. 음악 시간에는 <황성옛터>, <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쳤고 기타도 쳤다고 한다. 일본인 동료 교사들과의 마찰도 있었다 하며,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한번은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비하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박정희에게 계속 트집을 잡아 논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에 재학 중 군도를 차고 문경을 방문했을 때, 오가와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교장을 찾는 일본인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등 일본인 동료 교사들과 마찰을 빚곤 했다.[출처 필요][7] 1939년 10월 박정희는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주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에 응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는데, 1940년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가 발표되었다. 박정희 는 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240명 합격자 중 15등으로 합격하였다.[출처 필요][8] 보통학교 교사직을 하며 일본인 교사, 일본인 교직원과 계속 마찰을 빚게되자 1940년 2월 박정희는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둘리돌리님 보세요 =
1936년에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면서
국민총동원령을 내립니다
14세이상~~45세이하 남자라면 누구나 징용과징병으로 끌려가야하는시기였죠 1945년까지
결혼한사람은 군대에 징병을 면할수있어 박정희는 결혼까지하였고
지금의초등학교까지 민족문화말살과 군대식교육을 강요받아 일본인교사들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군대에 징용당하지않는 교사직과 결혼까지한 박정희가 일본에 매우 충성하고 일본인처럼 살았다면
왜!!!!!!
일본인교사들과 마찰이있었을까요
왜!!
교장과싸우고 교사직을 퇴직하여 징병될수있는
최악의길을 선택했을까요 ?
혹 근거없는 팩트 날리는 나꼼수 영향 받았나???
사실확인할수 있으면 얼마든지 확인 가능한데 저런 머저리 등신같은 색 히
저런 선동글에 끌려 다니는 니놈이 불쌍하다
그러고 다시 잠잠해 질때쯤 어디서 되도 않는 자료를 들고 기어나와
물을 흐리는...완전 빨갱이 입니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