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이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는가?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북괴
[
빨갱이들이 못 마땅할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고 투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입장에선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아니다. 저런 인물들한테 독립투사라고 훈장을 준
(진보좌익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첫번째 형태이며.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된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라 규정함.)
왜냐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라고 명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절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평화적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반공의 정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상해 임시 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산주의자 집단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이 목적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일의 목적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념화 되어 민족이란 이름으로 포용할 없다. 따라서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한가지 증거가 있다. 상해 임정에는 성재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고발
일제 패망과 함께
임꺽정의 작가
여운형은 일제 말(1943년) 수차에 걸쳐 일제의 학병지원을 독려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 명백한 친일파이자 남한 내 공산주의의 거두였다. 이런 여운형에게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청년
어린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열우당 의원 부친들의 일제시대 행적- 1.
먼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다.
1)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다. 진보좌익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2)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3)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이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
4)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이다.
이런 글에서는
그러나
[ 해방 전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이다. 북한
여러분 팔로군이 무엇인가?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이였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이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다, 더욱이 알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이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이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이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버리기도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전 세계 공산화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그들만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이다.
5)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다.
간도특설대(총79명) -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길 바란다. 현재
6) 변신의 달인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남은 것은
7)
-
*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