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요타 다이쥬로 창시개명을 했다.
- 학생 시절 일본으로 망명하여 친일 정신이 투철하였다.
- 일본인 학생 못지않게 일왕에게 충성하였으며 세계 2차 대전 시에
는'천황폐하를 위하여 대일본제국에 뼈를 묻겠다'라고 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동족들의 재물을 거둬서 착취하였다.
-한반도가 해방되자 재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정치활동을 했다.
-
아가 '몰래' 조문을 하였다는 것은 그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
는 사실이다.
내가
DJP연합이
나는
지했지만
8)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러면 그때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했는가?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옛날 일제시대 자기를 가르친 일본인 선생을 만나 듣기 좋은 소리 좀 했기로소니 그게 전부 친일인가?
못 먹고 사는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 가난한 나라로서 손을 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인데 지도자면 국민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서 노통처럼 나오는 데로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언행인가?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정작 미국가서는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9)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니다)
즉 8억달러 주겠다는데 박 대통령이 어떻게 안받았겠는가?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는가?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것이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협상의 출발부터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협상카드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사과를 하기를 싫어해 현재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이 죽길 기다리는 일본이 그때당시 사과를 다 받아 낼려고 하였다면 현재까지 일본과의 국교는 계속 단절 되어 있을것이 아닌가?
1993년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 민족문제연구소 :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일 뿐이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는다.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조선일보
경제사학자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 학생 시절 일본으로 망명하여 친일 정신이 투철하였다
그럼 일본군 장교를 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본의 충실한 신하냐???? 좀 근거좀 제대로 달고 말하지...
일본말로 떠들고 앤카를 불렀지...
일본을 이긴다.............
그가?
애비 죽이는 자식은 별루 못봤소...
심수봉씨 기사 다시 올려줘??
여기서 검색해도 나올껄...
박정희가 좌빨였다치고...
허나 반성하고 돌아 왔으니..
진정 빨갱이가 아니라면 환영할만한 일 아니던가?
그리고 김대중씨도...
빨갱이짓하다가 돌아왔다면..
그도 환영할 일이지..
근데 어찌 한쪽만>?
어디서 쪽발이 노래를 부르냐구.... 10 26사태후 심수봉이 진술한 내용입니다.
대화하기도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