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은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5살때 천자문을 다 외웠으며,
책 읽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김육의 조부가 강동 고을의 수령이 되자,
이 곳에서 그의 아비와 함께 살며 학문을 익혔다.
그의 스승은 퇴계 이황의 제자인 조호익이었다.
김육은 글쓰는 것에도 재능이 있었다.
12살에 나이에 직접 글을 쓰기도 하였으며,
소학에 적힌
' 낮은 벼슬아치라도 진심으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두어야지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 '
라는 글귀를 읽어내리며
언젠가 이 나라를 이롭게 할 인재가 되리라고 마음먹기도 하였다.
김육이 13살이 되었을때 였다.
왜구가 칼을 들고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조선은 전쟁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김육을 괴롭힌 것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친이 나이 30이 되고 얼마 되지않아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김육의 아비는 죽으며 김육에게 유언을 남겼다.
' 가문을 다시 일으켜라.
그리고 평생 술은 입에도 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김육은 이후 친척 집에 의탁하며 삶을 이어나갔으나,
다시 한 번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어머니 마저도 잃어야 했다.
그 당시 김육의 나이가 21세 였다.
김육은 부친과 묘친의 묘를 합장하였다.
전란으로 피폐한 조선과 가난한 양반이었던 김육에게
노비가 있을리 없고,
인부를 부를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김육은 직접 흙을 퍼담아 나르며 부친과 모친의 묘를 만들었다.
양반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한 인생이었다.
이 후 김육은 8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상을 치뤘다.
두 부모를 잃은 김육은 이 후 서울에 사는 고모에 집에 얹혀 살았다.
김육의 부모가 묻힌 곳은 남양주였다.
하지만 김육은 삼년상동안 매일같이 부모의 묘를 찾아가
곡을하고 고모의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험난한 삶 속에서도 김육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김육이 27세가 되던 해,
성균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그는 유생이 되었다.
김육이 유생이던 시절,
광해군이 즉위하며 '계축옥사' 가 일어났다.
대북파는 권력을 잡기위해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래서 역모를 꾸몄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내
영창대군, 서인과 남인을 몰아냈다.
대북파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김육은 광해군 정권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이런 정권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해 벼슬에 오르더라도
옳고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 할 수 없었다.
그의 나이 34세,
자고로 선비라면 관직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쳐야 할 때에
그는 과감히 벼슬 길에 오르는걸 포기하고
성균관을 떠났다.
(김육은 서인 계통의 사람임.
아마도 벼슬을 하더라도 큰 일을 할 관직을 하긴 어려웠을 것임)
김육은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에 도착했다.
가평에 당도하였을때, 머물 곳이 없어서 땅을 파 그 위에
서까래를 얽혀놓고 생활을 했다.
김육은 낮에는 농사와 나무를 하고
밤에는 송진에 불을 붙여 책을 읽었다.
김육은 생활고 때문에
양반이라는 신분임에도 숯을 만들어 팔곤했다.
숯을 팔기위해서 한양에 당도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잣거리에서 숯을 팔기위해
아침 일찍 한양에 도착해야 했다.
그는 해도뜨지 않는 새벽부터
숯을 가득 담은 지게를 메고 걷고 또 걸었다.
이런 부지런함 덕분일까,
아침에 동대문에서 저잣거리가 열릴때면
김육은 늘 제일 먼저 도착해 숯을 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생활은 15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날때까지 계속됐다.
김육은 초야에 묻혀 1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가며
직접 보고, 직접 경험하며 백성들의 삶을 목격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걸 빼앗기고,
모든게 불에 타 없어진 극한의 상황속에서
백성들은 희망이 없는 존재들처럼 느껴졌다.
조정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메꾸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세금을 거둬갔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더 궁핍해졌다.
김육 역시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언젠가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 때가 올 때까지 몸을 낮추고 기다려야 한다 '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라는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이다.
인조는 광해군 시절에 핍박받았던
인물 중에 학문이 깊고,
행실이 바르던 선비들을 찾아 등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제일 먼저 지목된 것이
바로 김육이었다.
김육은 인조 정권에 등용되어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그만두고
과거에 응시하여 다른 관료들과 똑같은 과정과 방식으로
다시 관직에 올랐다.
(명나라 화가가 그려준 김육)
이후 김육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4번이나 다녀왔으며,
조선에서 명나라로 보낸 마지막 사신이기도 하였다.
원래 사신은 높은 관직의 관료가 가는 것이였으나,
명나라로 가는 길이 험해서,
많은 관료들이 기피하였다.
김육이 사신으로 간 것 역시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 명나라 사신으로 떠났을 때가
1636년, 당시 김육의 나이 57세였다.
비록 전성기 시절의 명나라만큼은 아니었지만,
요동치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명나라를 오가며 눈으로 보고 만져보며 배웠던 경험과
문물들은 훗날 김육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김육은 명나라에 있었을때,
조선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명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를 동분서주하며 도움을 구했지만,
이미 역사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명나라에게
호란을 막을 힘은 없었다.
김육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명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보탬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훗날 김육이 자신의 정책을 펴나가는데
큰 동기를 부여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 남에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져야 할 것이다 '
그는 생각했다.
1638년, 그의 나이 59세때
병자호란 중에 돌아온 김육은 충청도 감찰사로 임명되었다.
일생동안 그토록 꿈꿔왔던 개혁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김육은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 지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은
대동법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
(인조16년 9월 27일)
이토록 김육이 주장했던 대동법은 무엇일까?
이를 알기위해 당시 세금 제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 백성에게 부과하던 세금은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은 ' 공납 ' 이었다.
' 공납 ' 이란, 왕에게 충성한다는 뜻을 담아
지역의 특산품을 거두어 왕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원래 공납은 각 마을에 할당된 특산품을
백성들이 모아 수령에게 주고,
이를 수령이 다시 조정에 바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16세기 이르러, 중간에 방납업자가 껴들었다.
특산품을 백성들이 일일이 구하기 어렵고,
심지어 그 지역 특산품이 아닌 물품까지 할당된 해괴한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상인이 공납할 특산품을 대신 구하여 수령에게 주고,
물품의 대금을 백성들에게 청구한 것이었다.
욕심으로 가득찬 방납업자들은 마을의 수령들과 담합하였다.
싼값에 특산품을 구입하여 공납으로 바쳤다.
그리고 자신들이 산 값에 두 배, 심지어 4배까지도 부풀려서
백성들에게 대금을 청구했다.
(참고로 면포 200필은 당시 백성 8~9 가구가 1년동안 먹고 살 수 있는만큼의 돈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공납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백성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갔다.
하지만 대동법이 시행된다면,
공납을 특산품으로 납부하지 않고
쌀로 납부 할 수 있었다.
또한 기준을 토지 1결당 쌀 12두로 정해놓음으로써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은 세금을 더 많이내고
땅이 없는 사람은 세금을 한 푼도 안내도 되었다.
부자나 거지나 똑같이 내야했던 불공평한 공납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동법 뿐이었다.
일생을 심마니, 장사꾼, 농사꾼, 소작농들과 함께 살을 부딪히며
살아왔던 김육이 이를 모를리 없었다.
백성을 편안케하고, 그들에게 쌀 한줌이라도
손에 쥐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동법 뿐이었다고 김육은 확신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한 년에
김육은 다시 한번 상소를 올렸다.
' 저를 쓰시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이를 아니된다 생각 하시면
저를 노망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 '
(효종 즉위년 11월 5일)
그는 대동법에 자신의 정치인생을 걸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곧은 선비의 모습이었다.
양반들과 사대부들은 거세게 반대했다.
그들은 ' 대동법이 국가 재정을 마르게 할 것 입니다,
백성들이 대동법을 싫어해 이를 원하지 않습니다 '
라고 말하며 김육을 비난했다.
김육은 생각했다.
' 걷는 세금이 적다 할지라도,
들어오는 것에 맞춰 돈을 쓴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
' 그리고 대동법이 재정을 투명케하고
그로 인해 수탈이 없어져 오히려 재정을 더 늘어날 것이다 '
이후 효종 2년에 김육은 영의정이 되었고,
결국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성공했다.
김육은 이로 만족하지 않고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기 위해 분주하였다.
그 사이 김육은 긴 세월의 영향인지
몸이 극도로 쇠해졌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었다.
죽음이 코앞에 온 순간에 김육은 붓을 들어
마지막 상소를 쓴다.
' 신의 병이 날로 깊어만가서
실낱같은 목숨이 얼마 못버티고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신이 만약 죽게된다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까, 그 것이 두렵사옵니다. '
(1658년 효종9년, 8월 26일)
김육은 죽는 그 순간마저도 자기 목숨보다
대동법이 없던 일처럼 될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상소를 쓰고 열흘 정도가 지난 후,
김육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김육 사망 직후,
그의 바램대로
대동법은 전라도까지 확대 실시 되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살길이 막막하여
양반임에도 낮에는 나무를 하여 숯을 팔고
밤에는 책을 읽던 시절부터
영의정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대동법을 주장하며,
끝내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한 꿈을 이룬 사람.
그는 71세, 우의정이 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번듯한 방 한 칸없이 초가집에서 살았던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 외의 이야기들
1. 김육하면 대동법이 워낙에 메인이라 다른 쪽의 업적이 묻혀져있는데,
실제로는 사신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봤던 상공업에 크게 감명받았음.
그래서 화폐가 있어야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만들어진게 상평통보임.
2. 이러한 화폐 유통 업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사대부 같은 사람들하고
의논을 하지 않았음. 같이 의논한 사람들은 대부분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나
백성들이었음.
이유는 딱 하나 ' 직접 돈을 만지고 유통시키는 것은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사고하는 백성들이지 사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사대부와 의논 할 일이 아니다 ' 라고 여겼음.
실제로도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으로 남아있음.
3. 이러한 현장과 경험, 실무를 중시하는 김육 덕분에 상공업 크게 발달함.
4. 김육은 사대부들 같이 실체없는 명분에 메달려서 똥오줌 못가리는 새끼들을
극혐이라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았음.
5. 이 후 100년에 걸쳐서 대동법이 전 국토에 실행되었는데,
백성들의 삶이 크게 나아졌음.
조세 경감 효과는 80%에 달했다함.
백성들은 더 이상 세금에 시달리지 않았으니
이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았음.
6. 심지어 반대파였던 송시열 마저도 나중에 인정했음.
7. 조세가 경감됐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거둬들이는
세금의 양은 오히려 더 증가했음.
왜냐면 쌀 말고는 세금을 착취할 명분이 없기 때문에
세금을 마구잡이로 착취할 수 없었기 때문임.
즉, 중간에 빼돌리는 새끼들이 없었기 때문에 세수가 증가한거임.
8. 김육이 쓴 문헌에 보면 김육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같이 지냈던 사람들은
장사꾼, 심마니, 농사꾼, 소작농 등등 하류 계층의 사람들이 많았다함.
농촌의 농민이나 상인들의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전혀 모르는것들이 의회의원이 되어서 정책을
결정짓는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목적은 국민들이 아닌
뒷돈챙기고 세력넓히는게 목적인세상
정치를 전혀 해보지도 않고 모르는 내가
이런생각을 할정도면 세상이 얼마나 썩었다는건가
대동법, 상평통보
근데 왜 김풍이 생각나죠?
대동법, 상평통보
농촌의 농민이나 상인들의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전혀 모르는것들이 의회의원이 되어서 정책을
결정짓는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목적은 국민들이 아닌
뒷돈챙기고 세력넓히는게 목적인세상
정치를 전혀 해보지도 않고 모르는 내가
이런생각을 할정도면 세상이 얼마나 썩었다는건가
이나라를 어찌할꼬...
우리 나라에 도둑이 많다던 어떤 양반이 생각나네요...
투표 똑바로 합시다
인조가 즉위하면서 평가절하 당한게 사실이지요. 뭐 일본속담에 이기면 관군, 지면 도적떼라고 하죠.
사실 인조는 광해에 비할 때 뿐 아니라, 전 조선 역사를 통털어 보아도
선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무능한 왕에 해당합니다.
김육이 광해시절 쫓겨난? 것은 결국 대북파에 배척당한 것이고 대북파에 배척당했다고 모두 노론인 것은 아니고,
인조가 정권을 잡은 이후 벼슬을 했다고 해서 모두 노론인 것도 아닙니다.
설사 백번 양보해서 노론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훌륭한 선비입니다.
이 점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양반은 나쁜 기득권자이고, 양반을 배척하고 백성을 위한는 게 옳은 정치 인 듯한 논조를 보이시는데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양반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붕당정치 역시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붕당정치의 단점이 가장 많이 드러난 예송논쟁과 그에 따른 사화에 관해서도
제가 공부해 본 게 있기 때문에 혀를 차긴 하면서도 이해할 만한 구석도 있더군요.
그리고 최악의 경우가 사화를 거치며 선비들이 숙청 당한 건데,
오히려 님의 논법이면 백성에게는 별무 피해 없는 조용한 난리입니다.
일본이었으면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전쟁이 났었겠죠.
저는 일본애들이 조선의 붕당정치를 조롱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득을 위해 배신을 밥먹듯하고 사람죽이길 무썰듯 하는 애들이
학문적 정확함과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조선의 선비들을 비웃다니요.
(그건 요새 사람들이 우리 스스로 조선의 선비를 우습게 여기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대동법은 실제 조선에 많은 기여를 했고,
그 대동법 실시에 가장 큰 공을 들인 것이 김육인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조선의 복은 김육같은 선비가 정말 초야에 까지 무수히 박혀 버티고 있어 줬다는 점인 것 같고
조선의 화는 별 쓰레기 같은 인물 역시도 무수히 많아 하필 요직에 앉아 나라를 쥐고 흔들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민족주의자에다 보수주의자(친일매국자 말고)라서
대한민국은 미국식 민주주의 보다는
입헌군주제였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양반도 지금까지 존재하며 서로 견제하는 게 좋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테네 민주주의란 게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공부해봐서 알 뿐더라 집단지성을 바라는 것은 백년하청을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군중의 무지에 대해 실망도 많이 했구요.
그런데 아마 우리 광복 후에 초대 '국부'라고 불리길 바라시는 분이
자기 왕노릇하는 데 지장있을까봐
조선왕족을 일본에 팽개쳐 두고 귀국 못하게 막으셨다고 하죠?
젊어서 놀면 늙어까지 고생한다는 교훈을 주신것 같네요
요즘 같은 시절 이런 분이 나와야 할텐데 말이죠....
한번도 본인돈으로 안사본 사람이 수장이니.. 국민이 왜 우는지 이해를 할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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