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휘는 좌파 청년이 아님니다. 백의사,서북청년단의 일원이였고 김구 암살후 승승장구 하죠. 뭔 좌파 청년
[암살자 안두희(1917~1996)]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 초기에 토지측량기사로 큰돈을 번 졸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안두희 집안은 모든 재산을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안두희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그들 가족은 신의주바닥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청천강 강마을로 피신했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다시 의주로 갔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안두희는 공산당에게 세 번이나 쫓겨난 뒤 월남했다.
1947년 안두희 가족은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온 뒤 한동안 처제네 집에서 묵었다. 안두희는 곧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이 무렵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 안두희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3개월 후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동향 홍종만의 주선으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추천을 받아 당원이 되었다. 이는 김구 살해사건의 원인을 한독당 당내 내분으로 조작하려는 치밀한 음모였다. 마침내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한낮 경교장에서 그가 소지한 미제45구경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네 번 당겼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43조(정치관여)와 제48조(살인)를 적용하여 총살형을 구형 받았다. 곧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종신형을 판결 받고 수감되었다.
안두희는 복역 3개월만인 1949년 11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종신형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틀 뒤인 6월 27일 대전 육군형무소에 육군정보국 김창룡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육군형무소장에게 국방부장관의 안두희 잔형집행정지처분 명령서를 전하자 즉시 안두희는 석방되었다.
안두희는 1950년 7월 10일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방부 특명 제4호에 의거하여 육군 소위로 복직했다. 1952년 12월 25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새로 이기붕이 발탁되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두희를 그대로 두면 민심이 더욱 흉흉하다고 건의하여 안두희를 국방부 특명 제229호로 예편과
김구는 백범일지 등에서 쓰치다가 을미사변에 참여한 군인이며 일본 육군 중위이자 일본군 밀정 군사간첩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 물증이 김구 본인의 주장을 제외하면 없다.
대한제국 당시 재판 기록이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쓰치다는 단순한 민간 상인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쓰치다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또한 배 교수는 백범도 쓰치다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살해한 일본인이 육군 중위라고 한데 대해 "의도된 기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으며 그 이유로 자기가 죽인 일본인이 명성황후 시해와 상관없는 민간인이라면 '복수'라는 명분이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하였다.또 그는 "치하포사건을 혼자 일으킨 영웅적인 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백범은 신문조서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치하포에 왔으며 쓰치다를 살해할 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3]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자 밀정 간첩이라고 기술하였으나[2],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3] 1997년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는 육군 중위가 아니라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었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쓰치다는 상거래의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이 주장은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 다시 그들에게 관직을 줌
지금까지 기득권 유지
국가 공공기관장이 천황(일왕) 폐하 만세 삼창 하지를 않나.. 나라가 개판이네 진짜..
부끄러운줄 알아라!!!
[암살자 안두희(1917~1996)]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 초기에 토지측량기사로 큰돈을 번 졸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안두희 집안은 모든 재산을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안두희 아버지는 공산당에게 반동분자로 몰려 그들 가족은 신의주바닥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청천강 강마을로 피신했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다시 의주로 갔으나 거기서도 쫓겨났다. 안두희는 공산당에게 세 번이나 쫓겨난 뒤 월남했다.
1947년 안두희 가족은 신의주에서 출발하여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온 뒤 한동안 처제네 집에서 묵었다. 안두희는 곧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이 무렵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의 자살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 안두희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한 뒤 3개월 후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동향 홍종만의 주선으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추천을 받아 당원이 되었다. 이는 김구 살해사건의 원인을 한독당 당내 내분으로 조작하려는 치밀한 음모였다. 마침내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한낮 경교장에서 그가 소지한 미제45구경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네 번 당겼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43조(정치관여)와 제48조(살인)를 적용하여 총살형을 구형 받았다. 곧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종신형을 판결 받고 수감되었다.
안두희는 복역 3개월만인 1949년 11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종신형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틀 뒤인 6월 27일 대전 육군형무소에 육군정보국 김창룡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육군형무소장에게 국방부장관의 안두희 잔형집행정지처분 명령서를 전하자 즉시 안두희는 석방되었다.
안두희는 1950년 7월 10일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방부 특명 제4호에 의거하여 육군 소위로 복직했다. 1952년 12월 25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새로 이기붕이 발탁되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두희를 그대로 두면 민심이 더욱 흉흉하다고 건의하여 안두희를 국방부 특명 제229호로 예편과
단 이상한.점은...
서울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이 왜 남쪽으로 안가고 북쪽인 황해도까지 올라갔을까요.
도주를.한다면 목적지나 안전상 남쪽이 더 나아보이는데요.
그리고 여러 정황이 팩트란 느낌은 잘 안드네요
이 기사 출전이 궁금합니다
지금은 전쟁중이거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의 시기도 아니라 애국을 어찌해야하는지 막연하다라고 많이들
이야기하신답니다....
그래서 명쾌히 한마디....지금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학생이라면 공부를 직장인이라면 회사생활을
연애인 즉 가수라면 노래로 국민을 즐겁게하고 그겄이 애국이다.....
맞습니다 이런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200년 후엔
한국이 사라진다 합니다,
물론 그 전에 국가의 체제는 모두 무너지겠지많요
늦더라도 총독부와 모든 세력들을 우리의 힘으로 없앴다면 지금의 결과는 어땠을지
외세에 의존한 결과가 무섭죠
현재도 진행형이잖습니까?
일왕에 혈서쓰고 충성하겠단사람 딸이 우리나라 수장이니 암담합니다
김구는 백범일지 등에서 쓰치다가 을미사변에 참여한 군인이며 일본 육군 중위이자 일본군 밀정 군사간첩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 물증이 김구 본인의 주장을 제외하면 없다.
대한제국 당시 재판 기록이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쓰치다는 단순한 민간 상인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는 한결같이 쓰치다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또한 배 교수는 백범도 쓰치다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살해한 일본인이 육군 중위라고 한데 대해 "의도된 기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으며 그 이유로 자기가 죽인 일본인이 명성황후 시해와 상관없는 민간인이라면 '복수'라는 명분이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하였다.또 그는 "치하포사건을 혼자 일으킨 영웅적인 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백범은 신문조서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치하포에 왔으며 쓰치다를 살해할 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3]
국민들이 무지하면 어리석은 지도자를 뽑을 것이며..국민들이 똑똑하고 현명하면 그에 걸 맞는 지도자를 뽑을 것이다..
라고 어느 역사 전문가가 말했지요...
지금의 현실은???? 말 안해도 다들 아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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