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특수부에 근무하던 1996년도 여름경 부산 친구로부터 긴하게 만나서
의논할 일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주말에 부산에 갔다.
그 친구는 아주 신중하게 “혹시 은행에 선을 댈 수 있는 길이 있나”라고 물었다.
당시 지방에 근무하면서 서울 광화문 일대에 사무실을 둔 전주 몇명을 수사한 적이 있고,
전주와 연결된 제1금융의 임원들에 대한 내사까지 한 경험이 있어서
한다리 건너면 웬만큼 유력한 힘을 가진 금융기관 임원들과도 접촉이 가능하였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지원해주겠다고 하였더니
그 친구는 은행이름, 계좌번호, 금액이 빼곡히 적혀 있는 노트를 찢은 종이 한장을 내민다.
8개 계좌 합계금 7천 8백억원 정도 되었다.
그리고는
눈이 번쩍 뜨일 이야기를 한다.
이 계좌는 박정희의 비자금이고,
박근혜의 피아노선생 정** 이름으로 차명관리되다가 금융실명제로
현재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 돈이다.
정** 씨가 사망한 이후 아들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통장이 나왔는데
찾을 수 있도록 해주면 찾는 금액의 50%를 인사하겠다고 한다.
라고 하였다.
금융실명제 시행 후 신고가 지연되면
신고가 늦은 만큼 일정율 페널티로 몰수가 되었는데
늦은 신고로 몰수금을 제하고도 몇천억원이 되는 가히 상상도 되지 않는 단위의 돈이었다.
그 친구에게 수사정보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였지 돈이 탐이 나는 것이 아니어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고자
그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 통장을 사본하여 달라고 하였다.
친구를 통하여 돌아온 답은 “계좌번호와 현재 잔고를 알려 주었으면
그 쪽의 능력으로 확인해보고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단 그 친구가 건네준 종이쪼가리를
은행(제일은행 계좌번호가 가장 많았슴), 계좌번호, 잔액 순으로
파일로 정리하여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담고
정리된 내용을 요약하여 금융실명제법 위반 사안으로 수사개시 의견으로 검사에게 첩보보고를 하였더니
검사는 별도의 범죄사실이 없어 그것만으로는 수사가 어렵다고 한다.
약 1년 후 대구로 전근을 왔고,
전근 후 이번에는 방법을 바꾸어 출입기자를 불러 자료를 주면서 한방 터뜨려 달라고 하였다.
몇주 후 출입기자는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정**를 아는냐. 피아노 선생 아니었나”
등을 물었는데 박근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금융실명제법으로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기사화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통장의 진위를 알고자 하면 검사가 압수수색영장으로 계좌를 들어다 보는 방법 밖에 없어
울산에서와 마찬가지로 검사에게 첩보보고를 하였더니
검사는 “만약 박정희 차명계좌가 맞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파장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부담스럽다”
라는 말로 자신은 이 사건을 맡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
이로서 정보는 있으나 확인은 하지 못하는 벽을 실감하면서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는
서랍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박정희의 비자금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라는 바램을 담아 보관하였던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찾아
특검에 제공하고자 하였으나 20여개의 디스크 중에 어디에 들어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를 확인하고자 3.5인치 디스크 리더기를 27,000원에 구입하고
디스크 전부를 돌려 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찾아 낼 수 없어
비자금 정보의 제공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은행과 계좌번호가 있다면 해당 계좌번호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계좌 속 현 잔고가 실제 맞는지 여부와, 해당 계좌가 박정희와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알 수 없다.
한편으로 박근혜조차 이름을 알지 못하는 박근혜의 피아노 선생
이부분도 박정희와 관련이 없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래서 디스크를 찾았더라면
특검을 통하여 사실여부라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 부분이 참 아쉽다.
다만 그 당시 시점에 재벌이나 정권 차원이 아니라면 그만한 돈을 통장에 넣어 두고 보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것이어서 '그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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