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23]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24]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을 가한 사례들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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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동 276번지 3층 건물에서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지사가 있고, 거기에는 정은철 총무와 배달학생들과 도망 온 시민 3명이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도망 온 시민 3명을 짓밝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뒤 데리고 갔다. 한참 뒤, 두 군인들은 다시 들어와 정은철 총무 뒷덜미를 낚아챈다. 정은철 총무는 업무를 보던 상태였다. 정 총무는 의자와 함께 넘어졌고 두 군인들은 정 총무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정 총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거렸고, 두 군인은 정 총무의 두 발을 양쪽에 하나씩 붙잡고 끌고 갔다. 머리는 땅바닥에 끌린채였다. 그 뒤, 두 군인들은 또 들어와서 담당구역 수금하고 들어왔던 배달학생 박준하 씨를 진압봉으로 수도없기 때리고 짓밟은 뒤에 정 총무처럼 끌고 나갔다. 박준하 씨는 계단에서 실신했고, 두 군인은 그대로 팽개쳐두고 내려갔다.
- 군인들은 부부들이 탄 택시를 붙잡았다. 부부들은 끌려나왔고 군인들은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먹인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갈기갈기 찢기고 신랑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은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25]
- 군용트럭이 11대가 줄을 지어서 행렬해 있다. 그 대열에서 마지막 차량에 젊은 여성은 옷이 갈기찢겨 젖가슴이 보일정도였고, 그 옷은 피투성이였다. 병원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얀 간호사 가운을 들고 나왔다. 병원 옷을 입은 남자는 옷을 여자에게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26]
-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쫓아왔다. 이민오씨는 교장관사까지 도망쳤지만 거기까지 쫓겨 구타당했다.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27]
-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를 당한다. 그 결과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셔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후두부 찰과상과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 대퇴부 타박상)[28][29][30][31]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32]
전개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32]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20]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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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공수여단은 광주의 그날 국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책임과 발포책임
11공수여단은 국민을 향하여 조준 실탄사격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 책임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군이 국민을 향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조준하여 실탄사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날의 책임을 물어 2 개 여단은 군의 편제에서 말살시키고
새로운 편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군이 국민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어 살상하는건 어떤 명목으로도 용서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하였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두 공수 여단이 건재한 것 같던데...
그런 더러운 과거가 있는 부대에서 복무하는 장병들의 사기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감히 국민을 위협하였거나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어 살상한 부대는
일벌백계로 해체하고 새로운 판을 짜야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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