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단역배우 집단 성폭행후 자매 자살 사건
현재 기획사 대표포함 악마새끼들 잡힐 때까지 포기하지 마시길
그리고 자지 그려오라고 시킨 경찰새끼는 직무유기로 처벌할 수 있길
2004년은 밀양과 단역배우............야만의 시기였구나
가해자가 계속 부인을 하니까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오라고 그랬다. 색깔, 둘레, 밀리미터(mm)까지 틀리지 않게. A4용지와 자를 주면서 그려오라고 그랬다. 크레파스는 엄마가 사라고 해서 내가 크레파스를 샀다. 그걸 그려서 내면 처벌을 받을 줄 알고 가영이는 또 그걸 그려서 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91113#09T0
..................
지난달 28일 어머니인 장연록 씨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장연록 씨는 인터뷰 내내 "아직도 딸들이 눈에 아른거린다"라며 먼저 보낸 두 딸을 그리워했다. 그는 "딸들이 간 지 9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길거리에서 누군가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우리 딸들 정말 예쁘고 똑똑했는데…"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가영 씨가 겪어야 했던 2차 피해를 묘사하며 몇 번이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는 와중에도 억울함과 분노에 못 이겨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내 딸은 경찰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 가해자와 칸막이도 없는 공간에서,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데 대질신문을 했다. 가해자가 계속 부인을 하니까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오라고 그랬다. 색깔, 둘레, 밀리미터(mm)까지 틀리지 않게. A4용지와 자를 주면서 그려오라고 그랬다. 크레파스는 엄마가 사라고 해서 내가 크레파스를 샀다. 그걸 그려서 내면 처벌을 받을 줄 알고 가영이는 또 그걸 그려서 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런 일 당하면 분해서 살 수 있겠냐? 나도 못 산다. 정말, 이게 딸을 키울 수 있는 대한민국이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는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아래는 장연록 씨와의 인터뷰 전문을 1문 1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프레시안 : 2009년 두 딸과 남편마저 보내신 그 마음을 감히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10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장연록 : 계속 울기만 했다. 너무 울어서 왼쪽 눈은 지금 실명 위기다. 해결책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했다. 살면 뭐하나 싶었다. 어디다 알리고 손 뻗칠 데도 없었다. 우리 애들이 남긴 강아지가 있었는데 강아지가 19년을 살고 죽었다. 그때 같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자살을 시도했다. 길이 안 보이잖아, 앞이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집으로 찾아와서 가까스로 살았다. 그 이후로 1인 시위도 하고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사람이 있는 곳 어디든 가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가능한 많은 이에게 억울한 내 딸들의 죽음을 알릴 생각이다.
▲지난 3월 28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장연록 씨는 "해결책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했다. 살면 뭐하나 싶었다. 어디다 알리고 손 뻗칠 데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200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학원 다니던 큰딸 가영 씨가 동생 추천으로 드라마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그 아르바이트 이후 가영 씨가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했다.
장연록 :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맨 처음에 집에 와서 옷을 벗고 왔다 갔다 하더니 쟁반에다가 칼질을 했다. "죽어라, 죽어라" 하면서 칼질을 했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무서웠다. 누군가 쳐다보는 것 같다며 무거운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고 온 집안을 난도질하기도 했다. 분노에 못 이겨 그런 행동을 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큰딸 가영 씨는 어떤 분이셨나.
장연록 : '똑똑' 그 자체였다. 상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딸이다. 집안에 상장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욕도 잘 못 하고 답답할 정도로 모범생인 딸이었다.
프레시안 : 모범생이었던 가영 씨가 이상행동을 보였던 이유는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것 같다. 후에 큰딸이 아르바이트 과정 중 단역배우를 관리하는 관리직들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장연록 : 어느 날, 이상행동을 보이던 큰딸이 작은딸을 죽이려고 했다. 이대로 딸을 두면 우리 모두 다칠 것 같아서 병원에 데려갔다.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안정을 찾은 큰딸이 '엄마. 나 성폭행당하고, 강간당했어'라고 얘기를 해서 알게 됐다. 단역배우를 관리하는 현장 보조 반장이 성추행을 시작하더니 성폭행을 했고, 그걸 다른 반장들한테 이야기해서 그 사람들까지 딸을 성폭행한 거다. 가해자들이 가영이에게 '엄마를 죽이겠다',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등의 협박을 했다더라.
프레시안 : 조사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의 2차 가해도 문제가 됐다. 가영 씨의 피해 사실을 알고 나서 어머니가 직접 경찰에 신고했나.
장연록 : 가영이의 피해 사실을 듣자마자 경찰서에 고소장을 냈다. 당시 성폭행 공소시효가 범인을 알게 된 날부터 1년이라고 하니 수사 기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급한 마음에 제출했다. 얼마 뒤 조 모 형사로부터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가져오라는 전화가 왔다. 트럭이 필요하면 세 대, 네 대라도 보내준다고 그랬다. 그래서 달력에 큰딸이 남겨놓은 메모, 일기, 카세트 녹음, 정신과 치료 경과 등 닥치는 대로 전부 들고 영등포 경찰서로 찾아갔다. 가져온 증거를 책상에 꺼냈더니 그 증거 내용물은 보지도 않고,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게 사건이 되냐고 생각하냐'고 소리쳤다. 책상을 얼마나 내리치던지 너무 깜짝 놀라 정신이 혼미해졌다. 조 모 형사가 얼마나 악을 써대는지 그 경찰서에 있던 모든 수사관이 수사를 하다가 중단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 난리가 있을 때 취하를 해야 했다. 그래야 내 딸들이 안 죽었다.
▲지난 3월 28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 중 잠시 생각에 잠긴 장연록 씨.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가영 씨의 피해 사실을 듣고도 '사건이 안 된다'며 책상을 내리쳤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장연록 : 그건 약과다. 어느 날은 조사과정에서 가영이가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울었는데, 재수 없다고 가라고 그랬다. 조사과정에서 그렇게 수모를 겪으니 안타까웠는지 경찰서 민원실 직원이 내게 진정서를 넣으면 형사를 바꿀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형사를 바꿔 달라고 진정서를 냈다. 그랬더니 다른 형사가 사건을 맡게 됐는데 그 형사도 날 보자마자 한 첫 마디가 '이게 사건이 되냐'고 서류뭉치를 내던졌다. 두말 안 하고 나와서 감사실인가에 진정서를 또 냈다. 그 이후 또 다른 형사로 배정을 받았다. 그 형사도 나를 보자마자 굉장히 멸시하는 눈초리로 똑같이 '어머니 이게 사건이 안 되는 건 아시죠. 전 지금부터 얘기하는 대로만 받아쳐서 진술서를 올리겠다'라고 기계적으로 얘기했다. 그래도 참았다. 사건이 될 줄 알았다. 검찰로 가면 달라지겠지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과정의 수모를 겪고 참아냈다. 아휴. 고소만 안 했으면 내 딸은 안 죽었다.
프레시안 : "고소만 안 했으면 내 딸은 안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장연록 : 내 딸은 경찰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 가해자와 칸막이도 없는 공간에서,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데 대질신문을 했다. 가해자가 계속 부인을 하니까 가해자의 성기를 똑같이 그려오라고 그랬다. 색깔, 둘레 밀리미터(mm)까지 틀리지 않게. A4용지와 자를 주면서 그려오라고 그랬다. 크레파스는 엄마가 사라고 해서 내가 크레파스를 샀다. 그걸 그려서 내면 처벌을 받을 줄 알고 가영이는 또 그걸 그려서 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런 일 당하면 분해서 살 수 있겠냐? 나도 못 산다. 사람들한테 물어봤다. 부부생활하면서 남편 성기의 사이즈, 둘레, 색깔, 아느냐고. 다 모른대. 근데 강간당한 내 딸이 그걸 어떻게 알겠나. 그러니까 안 미치고 살 수가 있겠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는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증언하기 위해서다.
프레시안 :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성기를 색깔, 둘레까지 기억해서 똑같이 그려오라고 한 것은 명백한 2차 가해다. 혹시 경찰이 가영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들이 더 있었나.
장연록 : 당시 성폭력 사건이 친고죄니까 조 모 형사는 우리 애 손에 인주를 묻혀서 억지로 고소취하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뿐 만이 아니다. 또 다른 가해자와 대질신문을 할 때, 형사가 가해자에게 피해자와의 성행위를 묘사를 해보라고 했다. 가해자가 소리를 내면서 그 행위를 묘사했다. 칸막이 하나 없던 그 공간에서 내 딸이 다 듣고 있었다. 가영이가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나서 대질을 중단하고 나왔다. 그 뒤로 한동안 가영이는 밥을 안 먹고 방문도 잠그고 지냈다. 최근 내 딸에게 2차 가해를 했던 담당 형사를 조 모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 : 담당 형사였던 조 모 형사가 아직 현직에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조 모 형사를 만나셨나, 혹시 그 형사가 과거의 2차 가해에 대해 사과했나.
장연록 : 사과? 웃기지 말아라. 다른 방송의 제작진들과 함께 그 형사를 찾아갔다. 혼자서는 겁이 나서 생각도 갈 생각도 못 했는데 제작진이 같이 가준다고 해서, 둘째 딸 유언을 지키러 갔다. 원한을 갚아주러. 우리 딸들 영정사진을 들고 경찰서에 가서 이 애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건 자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핸드폰 카메라로 제작진들과 나를 촬영하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그 형사의 눈빛에 주눅 들었을 가영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프레시안 : 가영 씨가 경찰 조사를 받기 너무 힘든 나머지 경찰 수사 기간 중 차도로 뛰어드는 행동도 했었다고.
장연록 : 가영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형사가 사람이 적은 당직 날 오라고 해서 그 날 갔다. 그런데 그 날이 체육대회였는지 형사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칸막이에 다가와서 '어이 아가씬지 아줌만지 12명 상대한 사람 얼굴 좀 보게 모자 벗어봐'라고 했다. 더 황당한 것은 형사가 그 와중에서도 계속해서 가영이에게 조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가영이가 또 소리를 질러서 바로 애를 데리고 나왔다. 경찰서 앞이 팔차선 도로였는데 그 도로로 순식간에 뛰어들어갔다. 난 우리 딸이 죽는 줄 알았다. 전쟁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전쟁을 방불케 했다. 클랙슨 소리가 도로에 가득했고 차들이 급정거해서 우리 애를 살리더라. 정말, 이게 딸을 키울 수 있는 대한민국이냐. 애를 낳으면 뭐하냐 딸을 키울 수가 없는데. 그런 딸을 어르고 달래서 경찰 조사를 마치고 결국 검찰에 올렸다.
프레시안 : 경찰들의 2차 가해를 참아가며 가까스로 사건을 검찰에 올렸다. 그런데 사건 발생 2년 뒤인 2006년, 형사소송을 취하하지 않았나.
장연록 : 우리 애가 심신미약, 항거불능 상태다. 매일매일 약을 먹어야 해서 약에 취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큰딸한테 가해자들이 '동생을 죽여버리겠다', '가족을 다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근데 검사는 그런 가영이가 고소를 취하했다고 했다. 아무리 딸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왔더라도 나한테 전화 한 통이라도 해줘야 했다. 사건을 진행한 내게는 전화 한 통도 없었다.
프레시안 : 검찰에서 심신미약 상태의 큰딸이 고소를 취하하는 동안 보호자에게 연락도 한 번 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고소를 취하하고는 어떻게 지냈는가.
장연록 : 믿기 어렵겠지만 아주 편안히, 진짜 재밌게 살았다. 가영이는 반지와 핀을 만들고 비즈공예 자격증을 땄다. 가은이는 네일아트자격증 따고 그랬다. 근데 어떻게 사냐. 12명에게 강간당했던 경험, 경찰서에서의 굴욕적인 시간을 견디고 어떻게 사냐. 나는 우리 큰딸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안다. 불쑥불쑥 생각이 난 것이다. 어떻게 살 수 있겠냐, 나라도 못 산다.
프레시안 : 2009년 8월 고소를 취하하고 3년이 지난 뒤, 가영 씨가 세상을 떠났다.
장연록 : 그날 볼일을 보러 다니느라 점심이 좀 늦었다. 배가 고플 텐데 가영이는 도통 먹지를 않고 숟가락에 반찬을 얹어주면서 '어머니는 잘 드시네요. 술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라고 그랬다. 가영이가 어머니라고 하는 소리는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 밥을 왜 안 먹냐고 했더니 집에 가서 강아지 사료 준다고 집으로 가더라. 평소에는 '엄마 이따 봬요' 하는데 그 소리도 안 하고 갔다. 근데 조금 이따가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큰딸이 죽었다고. 기가 막혀서 눈물이 안 났다.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아무 생각이 없이 멈춰버렸다. 그래서 작은딸과 둘이 말없이 경찰서로 갔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부슬 슬프게 왔는데 눈물이 안 났다.
프레시안 : 큰딸 가영 씨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작은딸 가은 씨의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장연록 : 가은이가 '언니 가던 날에 샤워했어요?'라고 물었다. 그날은 샤워실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다. '엄마 병원에 꼭 다니세요. 엄마 우리 20년 후에 만나요. 엄마니까 꼭 원수 갚아줘요'라고 했다. 그때 내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려야 했는데, 얘도 죽으려나 했으면 병원에 보냈을 거다. 작은딸도 죽을 수도 있겠구나, 살려야겠다라는 생각이 왜 안 들었을까. 그때 처음으로 불가항력을 느껴봤다. 뻔히 보고 놓쳐 버렸다. '엄마 미안해요. 언니 따라갈게요. 언니 너무 보고 싶어서요'라는 메모 남기고 그렇게 가버렸다. 두 딸이 세상을 떠나고 두 달 뒤, 애들 아빠도 뇌출혈 투병 중에 병세가 나빠져 세상을 떴다. 한 가족이 풍비박산이 났다. 내가 1인 시위를 한 이유다.
프레시안 : 1인 시위를 하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다. 지난해 2월 무죄판결을 받고 얼마 전부터 다시 1인 시위를 했는데.
장연록 : 미투가 각계각층으로 확대된 것이 큰 힘이 됐다. 나는 원한을 갚고 오라는 유언을 명령으로 받았다. 그런데 원한을 갚을 길이 없었다. 나라가 해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 경찰이 우리 딸을 죽이지 않았나. 강간당하거나 성폭행당한다고 죽지 않는다, 경찰이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을 더 미치게 하거나 죽게 만드는 게 우리나라 경찰이다.
프레시안 :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여성들이 미투와 위드유로 연대하고 있다. 이 사건도 미투로 인해 재조명을 받게 됐는데.
장연록 : 나는 미투를 외치며 폭로하는 여성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나라는 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경찰이 내 두 딸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딸 같은 여성들에게 꼭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미투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꼭 살아야 한다.
▲단역배우 자매 사망 사건에 관한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갈무리
프레시안 : 지난달 26일, 재수사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 2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그동안 청원을 알리기 위해 1인 시위를 해왔는데 고생이 많으셨다. 심정이 어떠셨나.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