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헷..이건 좀 어려워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떠오른거 있죠? 2번에 보면 아이는 불교신자인데
불공드리기 싫어 도망치고 어머니는 몸을 수련을 해야 독을 풀수 있다고 했어요. 이건 불교용어인
백팔번뇌(百八煩惱)인것 같네요. 불교에서는 '욕심,성냄,어리석음' 이 세가지의 괴로움을 일컬어
독이라고 표현해요. 불교 경전에서는 사람의 인식기관인 눈,귀,코,혀,몸 등을 통해 마음의 갈등을
느낀다고 말하고 그것을 일컬어 번뇌라고 하죠. 수련을 통해서 백팔번 번뇌를 해야만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뭐 그런뜻이에요. 그리고 9번은 아이가 먹는게 낙이라고 하자 선생님이 남자로
태어났으면 더 큰 포부를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이건 군자삼락(君子三樂) 같아요.
군자라면 지녀야할 세가지 낙이라는 뜻인데요 첫째는 부모가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 할것이 없는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것을 뜻해요.
어떤가요? 이거 맞겠죠?"
"맞겠죠가 아니라 정확한것 같은데?"
준호가 손목을 긁적거리며 말을 마치자 상훈이 그를 칭찬하며 다가와 11번 디스켓을 집어들었다.
"저는 이거 하나밖에 모르겠네요. 밤을 따러 올라간 아이가 험한 산에 올라갔다가 어머니한테
죽도록 맞았다잖아요? 하하.. 이건 양의 창자처럼 꼬불거리고 매우험한 길을 뜻하는 사자성어인
구절양장(九折羊腸)같아요. 험한 산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죠."
상훈이 말을 마치자 순화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8번 디스켓을 집어들었다.
"저는 먹는것에만 강한가봐요. 다른건 하나도 모르겠고 8번 하나만 알겠어요."
"어떤거든 강한게 중요한거죠. 말해봐요."
"네. 상훈씨. 8번에보면 자신의 짝 정미가 너무 가난해서 이틀에 한끼를 먹을때도 있다고 했잖아요?
어린아이가 끼니를 거르는게 너무 불쌍해요. 내가 데려다 키우고 싶네.."
"저기.. 순화씨.. 삼천포로 빠지지 말고 다시 말해봐요."
"아.. 난 너무 감상적이라 탈이라니까? 후후.. 이건 삼순구식(三旬九食)같아요. 한달에 아홉끼를
먹을 정도로 끼니를 거른다는.. 뭐 그런 뜻이죠."
다들 의견을 내놓고 나자 해결된 디스켓은 8개. 실로 굉장한 수확이였다.
이것저것 고민하던 그들은 심한 허기를 느끼고 식당으로 가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이제 남은것은 4,5,6,7번의 디스켓.
하지만 그들의 머리가 사전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이상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자 그들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방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느덧 날이 저무는 오후가 되었다.
"더 이상은 안되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4가지는 모르겠어요. 우선 순서 힌트를 보고 6개를 추려
내도록 하죠. 시간이 얼마 없네요."
"이번 문제는 왜 죄다 일기 형식인거야? 월드컵을 하는데 우승했으면 좋겠고 순위권 안에 들었으면
좋겠다구? 지가 후보선수면 열심히 공이나 찰것이지 왜 이런문제를 내고 난리야."
산 넘어 산이였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음것이 걸렸고 또 다시 해결하면 다음 문제가 나타났다.
준호는 가만히 답을 종이에 써넣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때였다.
이리저리 글자를 조합해보며 연관성을 찾으려고 애쓰던 도중 무언가가 하나로 좁혀지는 느낌이 들더니
머릿속에 불이 반짝이며 답이 떠올랐다.
"아! 알았어요. 이 사자성어들의 공통점을 알아냈어요!"
"정말?"
이리저리 흩어져 자신의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준호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모여들었다.
준호는 그들이 이해할수 있도록 종이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사자성어에 1부터 12를 뜻하는 숫자가 들어있네요. 1을 담고있는 일장춘몽 , 2를 담고있는 이율배반
3은 군자삼락 , 8은 백팔번뇌 , 9는 구절양장 , 10은 십벌지목..그리고"
"백팔번뇌는 8이 아니라 108 아니야?"
"에이.. 동팔형도.. 잘 나가다가 백 단위의 숫자가 나오는건 웃기잖아요. 그냥 백자는 버리고 8만
생각해야죠. 그래야 순서도 맞구요."
"근데 10까지는 그렇다 치고 11이나 12는 어떻게 해?"
"잘보세요. 문일지십을 보면 1과 10이 같이 들어있죠? 이걸 더하면 11이 되구요. 삼순구식에는
3과 9가 같이 들어있으니 이걸 더하면 12라는 숫자가 되요."
"그렇구나.. 꼬맹이가 대단한걸?"
"헤헷.."
동팔은 준호가 기특한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무언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듯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한자에는 통 무식해서 한문제도 맞추지 못한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또 축구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 아닙니까! 하하하."
"앗! 동팔씨. 그 축구 문제 푼거에요?"
"제가 축구하면 자다가도 벌떡 깨는 사람이거든요. 한자는 솔직히 잘 몰라 처음부터 관심없었지만
축구문제는 풀수 있겠다 싶어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와~ 대단해요. 답이 뭔가요?"
"처음에는 별별 생각을 다했어요. 4강진출,16강 진출 이딴거요.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제 안에
바로 정답이 있더라구요. 우선 우승했으면 좋겠다라는건 1등했으면 좋겠다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순위권안에 들려면 최소 3등안에 들어야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저 망할넘이 대표선수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축구는 11명이 하는 게임이죠. 즉 대표선수가 되려면 11명 안에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1과 3과 11.. 이 세숫자의 연관성은 한가지 뿐이에요. 홀수라는 말이죠.
즉 12개의 디스켓중 1, 3, 5, 7, 9, 11에 해당하는 것이 답인 것입니다."
늘 화만 내고 정작 답을 맞출때는 도움이 안되었던 동팔이었지만 오늘 그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버린것 같다. 모두들 동팔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는 기분이 좋은지 우쭐해져있었다.
디스켓을 한손 가득 집어든 료는 대충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론은 홀수의 해당하는 디스켓이 정답이고 우리가 풀지못한 디스켓은 4, 5, 6, 7 번이죠?
디스켓의 숫자와 사자성어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으니 만약 정답시간까지 문제를 풀지 못하면
두개는 찍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중 함정 디스켓이 있을 확률은 50%가 되구요."
"위험한데요.. 그러다 만약 바이러스 디스켓을 골라 컴퓨터를 못쓰게 된다면 우린 다 죽는다구요."
"준수씨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니 바이러스는 해결할수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바이러스에 걸린 컴퓨터는 백신이 필요한데 인터넷조차 쓸수없는 이곳에서 백신을
구할수 있을리 없으므로 제가 할수 있는건 없습니다. 남은시간안에 최선을 다하는수밖에요."
그들은 남은 4장의 디스켓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고 한개도 풀지 못한채
정답 시간이 다가왔다.
그들은 비장한 각오로 8번 방의 문을 열었다.
어둠속에서 빛나고 있는 푸른화면은 소름이 돋을만큼 오싹했다.
-four-
-168 시간의 공포- *라시안*
"천천히 정리해봅시다. 지금까지 밝혀진 디스켓은 8개. 숫자를 대입해보면 일장춘몽에 해당되는
3번 디스켓이 1번. 군자삼락에 해당되는 9번 디스켓이 2번. 모르는 3,4번은 건너뛰고 구절양장에
해당되는 11번 디스켓이 5번. 마지막 문일지십에 해당하는 1번 디스켓이 6번이 되는겁니다.
디스켓 번호를 순서대로 적어보면 3Disk - 9Disk - ? - ? - 11Disk - 1Disk 순입니다."
"우선 시간이 없으니 밝혀진 것만이라도 먼저 넣어봐요. 문장이 한글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4개
만으로 답을 유추 해낼수 있을지 몰라요."
료가 디스켓을 들고 서서 시간을 지체하자 순화는 답답하다는듯 가슴을 치며 그를 재촉했다.
그녀의 말에 료는 3번 디스켓을 집어 조심히 본체에 밀어넣었다.
그러자 눈이 아플정도로 밝은 형광 노랑색의 바탕이 화면을 가득 물들이며 붉은 글씨가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정답입니다*
- 모(M) -
첫번째 글짜가 모라는 것을 확인하자 준호는 재빨리 들고 있던 종이에 적기 시작했고 지독할만큼
자극적인 형광색 바탕에 눈을 찌푸리던 료는 9번 디스켓을 집어들고 3번과 교체하였다.
"뭐야? 이번엔 형광 분홍이네?"
"아..눈아파.. 이사람 취향이 왜 이따구야!"
이번에는 형광 분홍색의 화면이 눈을 자극하며 화면을 물들였다.
그러나 바탕색이 바뀌어도 글자의 크기와 탁한 빨간색의 글씨는 변함이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정답입니다*
- 두(U) -
료는 눈이 아픈지 빠르게 디스켓을 꺼내며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느끼는 의문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는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준호는 들고 있던 펜의 끝을 잘근잘근 물면서 말을 꺼냈다.
"한글만 한글자 적혀 있을줄 알았는데 옆에 알파벳이 붙어있네요?"
"그러게 말이야.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는건 이거죠?"
"네. 두 글자를 합치면 '모두' 가 되잖아요. 모 자만 봤을때는 옆에 있는 알파벳이 단순히 자음 ㅁ을
영어로 바꿔서 M 으로 표시한건줄 알았어요. 그런데 두 자 옆에 있는 알파벳이 D가 아니라 U인걸
보니 뭔가 다른 힌트가 아닐까 싶어요."
"준호가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료와 준호는 의견이 서로 일치하자 웃으며 마주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풀리지 않은 4개의 디스켓을 집어들고 만지작 거리던 동팔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화면색이 자꾸 바뀌는것도 힌트 아닐까요? 형광색이라 눈이 아프긴 하지만
자극적인건 그만큼 주목하라는 뜻인것 같은뎁쇼?"
"네. 마스터 H 는 이곳저곳에 함정을 숨겨둔만큼 힌트도 많이 숨겨놓은것 같아요. 마치 자신과의
두뇌 싸움을 유도하고 있는것처럼 말이에요. 화면 색도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될것 같아요.
준호아. 종이에 같이 적어줄래? 순서대로 화면색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야."
"걱정마세요~ 이미 적고 있어요. 적기전에 외우고 있었지만요."
"그래. 잘했다."
료는 자신이 정답자인만큼 적극적으로 나섰다. 준호는 그의 옆에 서서 펜을 끄적여가며 깊은생각에
빠졌고 준수는 그런 료와 준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사실 산장에 들어온 7명의 사람중 가장 지능을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료와 준호이였기 때문이다.
료는 그런 준수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않은채 5번째에 해당되는 11번 디스켓을 본체에 밀어넣었다.
이번에는 형광 주황의 화면이 나타났다.
*축하드립니다. 정답입니다*
- 된(E) -
이번 글자는 된 자였고 옆에 붙은 알파벳은 E 였다. 점점 더 관련없는 알파벳이 붙어나오자
사람들의 의문은 증폭되었고 료는 마지막 6번째인 1번 디스켓을 밀어넣었다.
마지막 화면은 형광 연두색 화면이였다.
*축하드립니다. 정답입니다*
- 다(R) -
디스켓을 집어넣고 글자를 확인한것 뿐인데 시간을 보니 5분이나 흘러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25분.
나머지 4개의 디스켓중 두개를 추려내야 하는데 정답을 맞추던 50%의 확률을 믿고 찍던..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에 달렸다.
상훈이 시계를 바라보며 1분 간격으로 시간을 말해주자 초초해진 사람들은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4개중 하나라도 생각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대충 내용을 파악하고 어떤뜻인지 짐작할 뿐 머릿속으로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사자성어로 표현할수 없으니 정말로 답답할 따름이였다.
계속 시간은 흐르고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던 상훈이 안되겠다 싶었던지 모두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4개의 글자만을 가지고 답을 맞출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범위가 너무 넓네요.
모두 ( ) ( ) 된다. 와 옆에붙은 MU ( ) ( ) ER 을 가지고는 도저히 맞출수가 없어요."
"모두 어떻게 된다는거지?"
"모두 친구 된다. 이런거 아닌가?"
"동팔씨~ 그건 너무 다정한 말이잖아요. 마스터H 가 낸 문제와는 안어울려요."
"그럼 이건 어때요? 모두 개털 된다."
"풉.. 장난치지마세요~"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동팔의 말에 순화는 웃음을 터트렸다.
동팔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낸 의견이였는데 순화가 깔깔대고 웃어버리니 조금은 민망했던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느낀 준수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어요. 20분 전이네요."
"어쩌죠? 찍을까요?"
"확률이 50% 일때가 제일 위험한것 같아요. 운좋으면 두개 다 맞는거고 운나쁘면 두개가 다
틀리게 될테니까요. 가장 최악의 상황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디스켓이 걸렸을 경우에요.
입력 기회를 잃는 디스켓을 고른다면야 저만 살해당하고 끝날일이지만 앞으로 계속 컴퓨터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 곤란하잖아요."
"형! 그런말 하지 말아요!"
그의 말에 준호가 발끈하고 나서자 말실수했다고 느낀 준수는 미안한듯 준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웃음으로 대신했고 그의 볼을 쓸어내리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 결정해야해요. 남은 시간동안 4글자만을 가지고 여러가지 답을 써넣어보느냐..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디스켓을 열어보느냐 하는거죠. 둘중 한가지를 정해서 밀고 나가지 않으면
시간이 모자라요. 12시가 되면 컴퓨터는 꺼지고 말테니까요."
"디스켓을 열어보는건 너무 위험한데.. 그냥 답을 생각해보는것이 어떻까요?"
"동팔형! 너무 비겁해요!"
"뭐라구?"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탄 사람들 아닌가요? 왜 최악의 상황만을 생각하세요? 운이 좋아서
정답 디스켓을 뽑을수도 있는거잖아요. 그 기회마저 포기하고 네글자만으로 정답을 맞춰보다가
답을 못맞추면 어떻게 해요? 그럼 정말 준수형이 위험해 진다구요!"
"이 꼬마가 왜 이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한번만 더 의견 말했다가는 날 죽이겠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전 단지.."
동팔의 제안은 그의 성격대로 즉흥적이였을뿐 악의는 없어보였지만 준호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나섰다.
머리가 좋아서인지 그냥 넘길수도 있는말을 그는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다.
준수는 준호를 바라보며 어깨를 툭툭치고는 입술을 귓바퀴에 바짝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진정해. 이준호.. 깊게 호흡하고 편안히 생각해."
준호가 유난히 까칠하게 나오자 동팔은 말문이 막혀 헛웃음을 쳤고 시간도 모자란 판에 두사람이
싸우기라도 할까봐 상훈은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오며 양쪽의 시선을 막았다.
"두사람다 진정하세요. 시간도 얼마없는데 서로 싸우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전 단지 의견을 낸 것이였단 말입니다! 그리고 네가 준수씨 마누라라도 되냐? 왜 그렇게 난리야?"
"형!"
"동팔씨 마음 잘 알아요. 하지만 준호가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이렇게 된거 한사람이라도 살리려면
최대한 주워진 상황을 활용해야해요. 우선 한가지만 열어보죠. 그리고 결정해요.
그대로 손놓고 있다가 죽나 부딪혀보고 죽나 결과는 마찬가지에요. 해봅시다."
"그런데 누가 디스켓을 고르죠?"
"전 준수씨가 고르는게 가장 좋을것 같아요. 저희가 골랐다가 잘못된다면 그야말로 준수씨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준수씨 스스로 선택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가요 준수씨? 제 의견에 동의 하시나요?"
"네. 상훈씨.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디스켓을 뽑는다면 정답 디스켓이 걸리지 않는 이상
모두 저에게 피해가 될테지만 제가 뽑는다면 바이러스 디스켓을 제외한 디스켓은 여러분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을 것입니다. 반전 디스켓이나 종료 디스켓은 오늘 하루에만 해당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너무 걱정 마세요. 어쩌면 짝수로 밝혀져서 정답에서 제외된 네개의 디스켓에 바이러스 디스켓
두장이 모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 절망적으로 나쁜 확률만은 아니에요."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요.. 준수씨"
"아닙니다. 그런 생각 하지 마십시오. 우선 한장 뽑아볼께요."
준수는 잠시 네장의 디스켓을 쭉 훑어보더니 자신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 6번 디스켓을
집어들었다. 조인성이 어렸을때 부모를 잃었는데 알고보니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다 라는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디스켓을 본체에 밀어넣었다.
*죄송합니다. 오답입니다*
-inversion-
디스켓을 넣자마자 검은색 화면이 뜨며 경고음이 울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섯번이나 크게 울린 경고음과 함께 화면에는 붉은 글씨로 inversion 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그러자 준호가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아! 반전..(inversion)"
"반전 디스켓을 뽑은거야? 그런데 어떤식으로 화면이 반전된다는거지?"
영어의 뜻을 몰랐던 순화는 준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반전 디스켓임을 알아버렸고 초조한듯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그러자 준수가 재빨리 디스켓을 꺼내고 화면을 종료시켰다.
그러자 푸른빛의 정답화면이 글씨조차 알아볼수 없게 깨져있었다. 마치 수십개의 조각으로 흩어진
퍼즐같이 제각각 다른 위치였고 더군다나 글자는 뒤집혀 있었다.
믿을수 없다는듯 한참을 들여다보던 료가 화면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반전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이런거였어? 난감하네.. 화면이 조각조각 깨져버렸는데 어쩌지?"
바이러스 디스켓에 너무 연연했던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반전 디스켓이 나오자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확한 답은 물론 띄어쓰기까지 바로 입력해야 답을 맞출까말까인데 이래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준수는 깨진 화면은 신경 조차 쓰지않고 디스켓 하나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상훈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으며 물었다.
"7번 디스켓이네요? 이것으로 결정하신 건가요?"
"아니요.. 저 이 문제.. 알것 같아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것 같습니다.."
"정말요?"
"네.. 알것같아요.. 그렇지만 정확한 사자성어가 생각이 안나요..아..뭐였지?"
그가 집어든 7번 디스켓의 문제는 '오늘부터 새로운 드라마를 보기로 결심했다. 머리에 갓을 쓴 선비들
이 종이에 글을 쓰고 서로 지가 잘났다며 우기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빨리 쓴 사람이 장땡인것 같은데..'
였다. 준수는 아무말 없이 무표정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굴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욱 답답하다는듯 사람들은 마음을 졸이며 준수가 입을 열때까지 기다렸다.
부디 하나만이라도 알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왜.. 옛날에는 선비들이 모여앉아서 시를 짓고 자신의 학식을 뽐내지 않았습니까? 그 기준이 시의 내용
도 훌륭해야했지만 무엇보다도 다른사람보다 빨리 지어야 이기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그 뜻인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이 안나네요.."
"한글자라도 생각나는것이 없나요?"
"그게.. 칠보... 칠보...아...뭐지?"
"그렇게 말하니 저도 대충 알것같긴 한데..."
"분명 알았던 한자성어인데 억지로 떠올리려니까 생각이 안나네요.. 칠보.."
"아! 준수씨! 칠보지재! (七步之才)"
"맞아요! 상훈씨! 칠보지재에요! 일곱걸음에 시를 짓는다..시를 빨리 잘 짓는다라는뜻!"
상훈이 준수의 힌트를 발판삼아 정답을 떠올려내자 모두들 환호성을 질러댔다.
더군다나 그 사자성어는 홀수인 숫자 7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였다. 정답 디스켓이였던 것이다.
료는 밝아진 얼굴로 디스켓을 받아들어 빠르게 본체에 밀어넣기 시작했다.
4글자와 5글자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르다. 어쩌면 5글자만으로 정답을 알수 있을지 몰랐다.
잠시 기다리자 이번에는 형광 보라색 화면이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정답입니다*
- 게(D) -
그들의 예상대로 정답 디스켓이였다. 남은시간은 10분남짓..남은 디스켓은 두장이였다.
순화는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급한듯 중얼거렸다.
"2장 남았는데 한장은 정답이고 한장은 오답이니.. 아직도 확률은 50%네.. 아.."
"누나. 그래도 한글자 더 알게되었잖아요."
"준호아. 지금 나온것을 순서대로 적어줘봐."
"네. 잘보세요. 한글은 모 두 ( ) 게 된다. 그 옆에 붙은 알파벳은 M U ( ) D E R. 우선은 이래요."
"모두 하게된다.. 모두 떨게된다.. 모두 떨게된다? 이거 뭔가 말이 되지 않나요? 우리가 지금 무섭게
떨고 있는줄 알테니까. 대충 이런 느낌의 말이 아닐까요?"
순화의 말도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는 말이였다.
뭔가 다른말이 있지 않을까.. 곰곰히 생각하던 상훈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남은 시간은 8분.. 점점 마음이 조급해져왔다.
"어쩌죠 준수씨? 디스켓이 두장 남았어요. 하나 더 열어보실래요?"
"저도 고민중입니다만 아무래도 열어봐야할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고르세요. 시간이 없어요."
준수는 한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집중했다. 잘 고른다면 그에게는 천국 잘못 고른다면 지옥..
그때 동팔이 디스켓을 들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팔을 뻗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궁금했던 순화는 그를 따라다니며 높게 올려진 디스켓을 들여다보았다.
"동팔씨? 지금 뭐하는 거에요?"
"정답화면에 색깔이 모조리 형광색이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혹시나 디스켓을 형광등에 비춰보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요..쩝.."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이긴했다. 불투명한 디스켓이 불빛에 비춘다고 무언가가 보일리 없질 않은가.
순화는 동팔의 엉뚱한 생각에 한숨을 쉬고는 다시 돌아왔고 동팔은 계속해서 형광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사이 준수는 남은 4번과 5번 디스켓중 5번을 집어들고 천천히 컴퓨터로 다가갔다.
모두들 긴장한듯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준호가 들고있던 펜이 떨어졌고 그는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형! 그 디스켓 넣지 말아요!"
"왜그래?"
"답을 알아냈어요!"
"정말?"
"한글은 한글자씩 대입하기에 너무 범위가 넓어서 대신 영어힌트에 알파벳을 한글자씩 대입해봤어요!
정답은 -모두 죽게 된다- 에요!"
준호가 내뱉은 정답에 모두 할말을 잃고 침묵했다. 온몸에 쏴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자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동팔은 신경질을 내며 디스켓을 던져버리고 준호에게 다가가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힘껏 흔들어댔다.
"모두 죽게 된다니! 너 이자식! 우리한테 감정있어?"
"동팔씨! 어깨 빠져요! 이손 놓지 못하겠습니까?"
"많고 많은 말중에 하필 왜 그거야! 왜 모두 죽게된다가 정답이야! 설명해!"
"동팔형은 왜 그렇게 화부터 내시는거에요! 아파요 이거 놓으세요!"
"정확히 설명해! 왜 그런 재수없는 답이 나왔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
가뜩이나 죽음이란 단어에 예민해있던 동팔은 앞뒤 안가리고 무식하게 준호를 윽박질렀다.
사람들이 그를 말려 겨우 떨어뜨려놓았고 준호는 어깨가 아픈지 손으로 문지르면서 종이에 급하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잘 보세요. A부터 Z중에서 중간에 끼워넣었을 경우 그럴듯한 말이 되는 알파벳이 몇가지 있어요.
D 나 L , 그리고 R.. 이렇게 세가지죠. 우선 D를 넣어보면 MUDDER 가 되죠? 이건 경마에서 쓰는
용어로 험한 진창길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말이나 선수등을 의미해요. 그리고 L을 넣어보면 MULDER
가 되는데 이건 다들 아실꺼에요. X파일에 스컬리와 호흡을 맞추던 남자주인공 멀더."
"멀더는 나도 누군지 알겠다. 하지만 별 관련은 없어 보이는데?"
"맞아요. 제가 말한 두가지는 지금 상황에선 힌트가 될수 없어요. 그래서 중간에 들어갈 알파벳은
R 이에요. MURDER 가 정답인거죠. 상황에도 딱 들어맞구요."
"아.. MURDER(살인)..."
"네. 뜻이 살인이에요. 이것이 힌트라면 모두 죽게 된다. 밖에 답이 없지 않을까요?"
준호의 설명은 너무나 정확했고 더이상 할말이 없어진 동팔은 목을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더이상 좋은 의견은 없어보였다. 료는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재빨리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나저나 어쩌죠? 화면이 깨진데다가 뒤집혀지기까지 해서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모르겠어요."
"화면이 뒤집어졌으니까 글도 거꾸로 써야하는거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글을 거꾸로 써야할뿐만 아니라 글자까지 뒤집어야하는데 어떻게
뒤집어요.. 반전 디스켓.. 생각보다 난감하네요.."
"그럼 퍼즐맞추기를 해가며 글자를 입력해야 하는거에요?"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할것 같아요."
료가 선뜻 손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순화가 끼어들어 이 방법 저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자 준수가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이건 함정일 뿐입니다."
"네?"
"깨진 화면은 우리로 하여금 혼란을 겪게 하려는 마스터 H의 함정이란 말이죠. 원래 컴퓨터란 각각의
기능이 달라요. 모니터는 답을 입력할때 오타는 없는지 띄어쓰기는 정확히 했는지..등의 여부를
확인할수 있는 일종의 눈이란 말입니다."
"저는.. 잘 이해가 안되요.."
"순화씨. 잘생각해보세요. 순화씨가 저를 보면서 이 사람이 김 준수이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김 준수인줄 어떻게 아는거죠?"
"그거야.. 눈으로 보고 준수씨인줄 아는거죠."
"그렇죠. 하지만 눈이 저라고 판단할까요?"
"아! 머리!"
"네 맞습니다. 눈은 저를 보기만 할뿐 직접적인 판단은 머리. 즉 뇌가 합니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지요.
모니터는 일종의 눈 역활을 하고 있지만 답을 입력하면 답을 인식하는 곳은 모니터가 아닌 본체 내의
CPU(중앙처리장치)가 하게 됩니다. 즉 정확한 답만 적을수 있다면 모니터쯤은 상관없다는 말이죠."
"와- 준수씨 멋져요. 역시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은 다르구나~"
"그러니 료씨. 이제부터 모니터는 보지 마세요. 키보드만 보면서 오타가 나지 않게 정확히 입력하세요.
띄어쓰기도 주의하시구요. 첫날처럼 손이 미끌어져서 다른 키를 누르지 않게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줄을 바꿀때는 꼭 텝(TAP) 키를 사용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료는 땀이 잔뜩 밴 손을 허벅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호흡을 가다듬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긴장한듯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니시키도 료 , 김 준수 , 모두 죽게 된다 라는 글을 한자 한자 되새기며 정확히 입력하였고
엔터를 눌렀다. 그러자 사람들은 눈이 사시가 될정도로 집중하며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맞았다면 - Clear- 라고 뜰테고 틀렸다면 -Not Clear- 라고 뜰테니 그들이 찾아야할 단어는
Not 이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들여다본지 30초도 안되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정전이 된듯 팍- 소리와 함께
전원이 꺼지고 컴퓨터가 종료됬다.
"찾아봤어요? Not 라는 글자?"
"이번엔 다행이 성공한것 같아요. N이라는 글지만 집중적으로 찾았는데 안보이더라구요."
"정말 다행이에요! 준수씨!"
"아! 그나저나 다음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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