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임시절
1985년 1월 27일부로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청주지방검찰청에 초임검사로 데뷔했다.
2. 초짜검사 딱지떼고.
1987년 대구지방검찰청 울산지청(현 울산지방검찰청)으로 전임됐다.
이 때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 골재 무허가 채취와 관련된 사기 사건을 수사하자
이것이 단순 사기건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의 누나 전명렬(1922)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임을 포착했다.
전명렬을 조사하기 위해 소환하려 했으나 안기부 경남 분실장이 만류한데 이어 자신의 사수마저 제지해 포기했다.
3. 검사짬을 좀 먹어가고 있을때. 검사 짬 1-1
1988년 노태우 정권 출범 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부임했다.
이 때 검거 실적도 꽤 높았던 것은 물론, 서슬 퍼렇던 군부 독재 시절에도 권력 비리까지 연이어
건드리는 등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당시 서정희 치안본부 정보분실장을
구속기소했던 게 눈에 띈다.서씨는 청와대 비서실 산하 대통령 친인척관리담당관을 겸임중이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돈 회사가 부도나자 회사 부동산을 자기 지위를 이용해 비싼 값으로 대신
처분해 주면서 대금 일부를 횡령한 사실이 적발됐다. 또 전두환의 외조카인 김영도가 구속사건
무마를 청탁받고 뇌물을 수뢰한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4. 검사 짬 1-2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이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절 이학봉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통해
서울시, 치안본부, 국세청, 감사원 등을 움직여 노량진수산시장 경영권을 강탈한 사실을 적발하고 구속 기소했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3당 합당에 성공하고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의
열매를 거두는 등 혜택을 봤지만, 상왕 노릇을 하려는 전 대통령의 권력형 비리를 터뜨려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시세 흐름을 타고 크게 활약했지만, 노량진 수사 건은
당시 노태우 정권의 실세와도 연루되는 등, 자칫 노 정권까지 위험하게 할 우려가 있어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는 사건을 덮으라 지시했다. 그렇지만 이런 권부의 요구를 무시하고 수사를 강행했다.
통제가 안되자 상부에서는 남부지청 특수부에 부임한지 4개월 만에 그를 형사부로 좌천시켰다.
수사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이첩돼 이학봉 전 민정수석과 전기환이 구속기소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많이 봐준 것이다. 공무원은 특별한 사유 없이 해직시킬 수 없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인사로 괴롭히는 것이다. 사표를 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도록 좌천시키는 게 가장 빠르다.
검사 동일체 원칙을 어긴 이른바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찍혀 출세길에서 멀어졌다. 원래 명문고 출신도,
서울 법대 출신도 아니라 특수부 발령은 무리였다지만 깨끗한 검사 이미지로 이름을 알려 엘리트 코스에의
희망이 보였던 그로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5. 검사 짬 1-3
남부지청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좌천된데 이어 1991년에는 아예 광주지검 강력부로 좌천됐다.
낙담하지 않고 곧바로 광주 조폭 국제 PJ파 수사에 착수한다. 전년도 1990년 10월 13일 부로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즈음이었다. 5월엔 광주 경찰이 시민을 구타한 사건을 강력 처리했고,
7월에는 건설 입찰 대가로 뇌물을 준 건설업체와 연고지역 업체끼리의 담합을 적발했다.
1991년 12월에는 국제 PJ파와 일본 야쿠자의 연대를 포착, 12월 4일 현장을 덮쳐 일망타진하고
32명을 구속시켰다.
6. 검사 짬 1-4
광주지검 강력부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발령됐다.
그는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 외 13명을 적발, 체포해 그해 9월 22일 임란
사자드 외 3명에게 사형, 나머지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최초의 외국인
사형구형 사례'로서 각 일간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이태원을 중심으로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파키스탄 폭력조직이 활동했는데 비키파 조직원이 위조지폐로 귀금속을
사려다 적발되자 주비파 이름을 팔았다. 일명 '주비' 임란은 문제가 커질까봐 귀금속 값을 대신 치르고
비키파를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비파 조직원 일명 고고가 린치를 당해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비키파 두목 비키(모크테르 아흐메드)와 나나(아흐산 주베르)를 납치해 성남 야산에서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비파 조직원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형을 최종 선고받고 각각 광주
교도소와 안동 교도소에 수감됐다. 조직원 중 셋은 5년형, 나머지 일곱 명은 방면됐다.
7. 검사 짬 1-5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당시는 사정 한파라 해서 공직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아래 군부 독재 시절의
거악들을 발본색원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지검 검사였던 그는 슬롯머신 사건을 맡았다.
빠찡코로 더 잘 알려진 슬롯머신의 업계매출은 당시 연 1조 2천억으로서 1조원 수준의 호텔 카지노는 물론
경마마저 능가하는 규모였다. 슬롯머신 업소 대부분은 정덕진 일파에게 장악돼 있었고, 이들은 김태촌의
서방파와 손잡은 정황 및 정관계 유력 인사들마다 로비를 하는 등 거대한 사회악으로 자라있었다.
이들은 코인 한 개에 10만 원을 넘기지 않도록 되어있는 당첨금을 600만 원까지 시상하게 하는가 하면
87%로 규정돼 있던 당첨률도 18% 이하로 조작하는 등 온갖 불법의 온상이었다. 게다가 정치와 유착해
전현직 고위 관료 출신을 주주로 앉혀 검찰의 내사를 중지시키는가 하면, 노태우 정권의 실세에게 접근해
정덕진의 친형을 구속한 검사를 좌천시키고 혐의자를 빼내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탈세 혐의를 씌워 일단 정덕진을 구속시키고 이후 정관계 관계자들을 내사하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던 엄삼탁, 이인섭, 천기호 경찰청 치안감, 그리고 대전고등검찰청 이건개
검사장 등의 비리, 뇌물수수혐의 등을 입증하고 모두 구속 기소했다. 당시에도 협박과 압력을 많이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처리하였다.
슬롯머신 수사의 절정은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을 구속 기소한 것이었다. 슬롯머신 업자에게서
5억 원의 돈을 받은 혐의를 포착한 것이다. 박철언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원은 박철언의 결백하다는
주장을 외면했다. 결국 박철언은 국회의원 뱃지를 반납하고 1년 4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8. 검사생활 마무리.
한편, 이후 그는 1994년 10월에는 안기부 1차장이었던 공안검사 출신인 정형근의 권유를 받아들여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었다. 당시 보직은 국제범죄수사지도관. 이 시기 안기부 러시아 지부에 주재하면서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대책을 세웠고 지금도 그 프로그램 그대로 가동되고 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안기부 파견근무를 끝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수사검사로 복귀를 노렸으나
1995년 9월 21일부로 진행된 검찰 인사에서 대한민국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좌천되었다.
신승남 법무실장의 만류에도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1995년 10월 7일부로 검찰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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