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음-
혁현이는 그렇게 말해놓고선, 수줍게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저는 그냥 그자리에 주저 앉아버렸고, 난간에 머리를 기대고는, 이어질 말을
힘없이 귀기울였습니다.
"그것좀 아쉬운데?"
채연이가 말했습니다. 채연이의 표정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듯, 씨익 미소를 지었고,
혁현이는 땅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었나봅니다.
"미안...해..."
"응 뭐가?"
아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져버린 채연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는 과연
혁현이에게 앞으로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제 머리속은 온통 흰색 물감으로 인해 하얗게만 물들어 갔습니다.
"괜히.. 이런말 해서 너 혼란..."
채연이는 갑자기 혁현이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런말 들었으니까.. 내가 노력해야겠어"
"응...?"
혁현이는 조금 당황스러웠나봅니다. 그때서야 혁현이는 시선을 땅에서부터
채연이의 얼굴로 옮겼고, 채연이는 아직도 여유가 있는 미소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니, 저건 가식적인 미소겠지요.. 환생한뒤 버릴것을 예고하는, 그림자에 가려진
밝은 불빛 같은 마음을 혁현이는 모르고 있겠지요.
"니 마음이 확실하게 자리 잡도록 노력을 해야지.."
채연이는 아직도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힘없이 주저 앉은 다리를 탓하며,
난간을 붙잡고 겨우 자리에 일어섰습니다. 저는 한심한 년이었습니다.
혁현이에게, 원한만 산.. 그런 년...
-또다른 속마음-
힘들게 옥상에 올라오니, 지현이가 앉아있었습니다.
"뭐야? 어디갔다왔어!!"
지현이는 투덜대며 자리에 일어나 저를 맞이했고, 저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순간 다리의 힘이 또 풀려서 주저 앉을뻔했지만, 지현이가 저를 붙잡아주는 바람에
다행이도 땅바닥에 엎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야야 왜그래 갑자기?"
"나.. 힘들어 죽겠어.."
"무슨일이야 또??"
전 누군가에게 저의 속마음을 털어 놓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현이에게 말했습니다.
"나.. 힘들어.. 혁현이때문에 힘들어.."
저는 어느덧 흐느꼈습니다. 늘 즐겁기만 하던 점심시간이, 어느덧 눈물의
행복함이 되어버렸습니다..
"너.. 어쩐지.. 혁현이 바라보는게 보통이 아니었어.."
"..."
"너 근데 왜 그런거야? 전에는 관심도 없던애를 갑자기 왜 좋아하냐구..?"
저는 아무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지현이한테 저의 상황을 말한다면
지현이마저 저를 또라이 취급 하겠지요. 더이상 친구가 안될것 같았습니다.
그냥 정신병 생긴 미친년 취급 하겠지요.. 그래서 전 아무말도 할수 없었습니다.
"몰라.."
전 그냥 그렇게 말해버렸습니다. 모르겠다고.. 지금 유일하게 저의 고민을 들어줄수
있는건, 저와 가까운 지현이 밖에 없는데, 지현이 마저 잃기 싫습니다.. 전...
그냥 이렇게 뼈를 깎아내릴듯한 아픔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인가 봅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방과후에 할일이 있어 보이는듯 했습니다.
어차피 조금있으면 시험기간이라, 모두들 시험공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지만,
그래도 몇몇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은, 피씨방이니 오락실이니 놀기 위한 수다 뿐이었지만,
저는 지금 어떠한 수다도 떨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생각에 젖고 싶을뿐..
"야 안가?"
아이들은 거의다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현이가 갑자기
제 뒤에서 그렇게 말했고, 저는 그냥 힘없이 웃어보이며 말했습니다.
"아냐.. 너 먼저 가"
"그..그래.."
지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집으로 갔습니다. 곁에 와서 그러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냥 가버리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없지않아 있었습니다.
"하아.."
텅빈 운동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벤치에 앉아 학교와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텅빈 제 마음과 같아서 불쌍해보였습니다. 시간은 빨리 흘러갔습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주었으면 했던 제 마음과는 달리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해는 저물어 어둠이 찾아왔고, 어둠이 찾아오자 가로등 빛은 찾아 왔습니다.
"오랜만에... 지하 세계로 가볼까.."
저는 지하 세계로 가기 위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학년 12반 교실로
올라 갔을때,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그냥 들어가려고 벽에 붙었지만, 들어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제는 인간과 귀신의 중간이 아닌 인간으로 되어버린걸까요?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벽을 통과하거나 그럴수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의
정신집중이 필요한가 봅니다.
"후.."
눈을 감고 조금의 정신을 집중을 해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조용히 손을 올려
벽에 가져다 대었을땐, 제 손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대로 저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 벽을 통과해서 교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마음대로
벽을 오갈수도 없는가 봅니다.
"털컹"
아무도 없는 교실에 울려퍼지는 문소리는, 조금의 긴장을 만듭니다. 청소도구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땐, 자주 찾아 오지 않았지만, 변한것 없이
늘 똑같았습니다. 기나긴 복도와도 같은 길이 펼쳐져있었고, 그 길을 따라
한없이 걸어가다보면 어느새 철로 된 큰 문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을때, 그 안쪽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들아.. 요즘들어 너가 인변환을 많이 먹는것 같더구나.."
연의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
인것 같아, 들어가서 방해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네.."
"너 그거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네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그래.. 무엇때문에 그걸 먹는지 말해보거라.."
"...."
연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연이 저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잠시동안 인간으로 변신시켜주는 그 알약은 부작용이 있는가 봅니다.
"아들아... 이제 그만 먹거라.. 너가 인간이 되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느냐?
많이 먹으면 넌 영영 지하세계로 돌아 올수가 없어!!"
연의 아버지는 다급하다는 말로 연에게 소리쳤습니다. 인변환이라는 알약..
많이먹으면 귀신으로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건가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은 그걸 먹었구요... 저는 뭔가 의심스러웠습니다.
"정아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뭐라구??"
"전.. 정아를 도와주고 싶어요.. 늘 멀찌감치 게임이 어떻게 진행이 되가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늘 혁현이라는 그 자식때문에 마음아파 하며 울고 상처받는
정아를 보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저는.. 정아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이런 못난놈!! 그깟 인간 계집애 때문에!! 너의 인생을 망치고 싶은거냐!!"
연의 아버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연에게 소리쳤습니다. 연은 오히려 아버지께
대꾸했습니다.
"인생을 망쳐도 좋아요!! 설상 지하 세계를 못온다고 해도 좋아요!! 그거 아세요?
늘 칙칙하고 어둠뿐인 지하세계에 살다가.. 밖의 세상에 나가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전 밖의 세상을 증오하고 버려야만 했어요.."
"흐음.."
연의 말을 숨을 죽이고 들었습니다.
"근데... 근데... 아버지가 만든 게임 때문에 정아라는 사람이 밖의 세상에 있는
즐거움과 밝은 빛을 일깨워 주었고, 저는... 저는 그런 정아를 포기할수 없습니다!!"
연은 아버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쳤습니다. 연의 아버지는 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뺨을 한대 치셨습니다.
"짝"
"그래! 니 맘대로 하거라!! 어디 밖의 세상에서 잘 되나 보자고!! 그리고 이 게임은
내가 만들었다!! 내가 정아라는 그 계집애 내일 당장 없앨수도 있어!! 그거 알아?"
"그래만 보세요.. 저도 가만있진 않을겁니다"
연은 무언가 담긴 흰색 종이봉투를 낚아채 들고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엿들으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방안에서 나오는 연과 마주쳤습니다.
"미..미안.. 그..그게.."
저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고, 연은 제 팔목을 잡고는 마구 뛰어갔습니다.
저는 잡힌 팔목이 조금 아팠지만, 그래도 끌려가는 수 밖에는 없는거겠지요..
"어..어디가?"
연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단지 어두운 얼굴만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