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
그렇게 숨을 헉헉거리면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한다고.. 혁현이의 눈빛은
조금은 흔들리는듯 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눈치를 살폈을땐, 다행이도 연은 없었습니다.
연이 있다면, 채연이가 무슨짓을 할지 몰랐거든요.
"정말 타이밍 않좋은거 알아.. 아는데.. 사랑해.. 사랑한다고.."
저는 마지막 희망인듯 했습니다. 예전에 괜히 현정이라고 했다가, 싸이코 취급도 받고,
같이 걸어가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받았던 사이입니다. 먼 사이는 아닙니다. 서로
얼굴이라도 보면 아는척 하는 그런 사이란 말입니다. 물론, 저번에 그 현정이 사건
이후로는, 왠지 더 멀어진것 같았습니다. 발목을 다쳐 부축해주면서 웃었던 그 모습..
지금은 볼수 없으니까 말이죠..
"왠 뚱딴지 같은 소리니? 얘 웃긴다..?"
채연이는 조금은 당황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혁현이의 마음에서
아주 큰 부분은 자신이 채워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당황스럽게 할줄은 몰랐겠죠.
"저기.."
혁현이는 입을 열었습니다. 물론 채연이의 눈치도 살피고 말입니다. 저는 턱까지
차오르던 숨이 어느덧 사라진것을 느꼈습니다. 눈이 팍 트이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뭔가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할수 있을것 같았습니다.
"혀..혁현아! 우리 어디 가야되는 상황이잖아! 어서 가자 늦기전에"
채연이가 당황해서 팔목을 잡아 끌고 가려고 했지만, 혁현이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혁현이는 조금 멈칫했습니다. 혁현이는 곧 살짝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채연이를 보고
저를 보더니 말했습니다.
"역시.. 난 현정이를 아직도 좋아해.."
혁현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채연이를 보고는 말했습니다.
"오늘 가기로 한거, 나중에 가자.. 미안"
혁현이는 뒤돌아 사라졌습니다. 채연이는 저를 죽일듯이 째려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너.. 무슨 수작이냐?"
"무슨 수작이라니..? 게임은 게임일뿐이라며? 잠쉬 쉬던 게임 다시 도전한거다.
이 게임.. 너 혼자 독주 하는거 아니야.. 알아? "
저는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채연이는 더욱더 황당하고 화가 났는지, 얼굴이 금새 더
붉어졌고, 급기야 손을 들어 저를 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만하지?"
연은 어느덧 제 앞으로 오더니 저를 때리려 하던 채연의 팔을 잡고는 옆으로 내동댕이
치듯 팔을 치웠습니다. 채연이는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저희 둘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습니다.
"둘이.. 뭐냐? 아주 잘해.. 잘한다고.. 연 당신같은 사람 처음이고, 정아 너는..
게임 그만하고 연이랑 잘 되지 그래? 그게 우리 둘한테도 좋지 않아?"
채연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저희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아까 오던 길을
돌아가서, 자신의 집으로 가는듯 했습니다. 연은 저를 돌아보더니 말했습니다.
"괜찮아?"
"나한테.. 더이상 잘해주지 마요.. 저.. 이제 혁현이만 바라보고 혁현이만 쫒아 갈래요.."
저는 연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뒤돌아 집으로 가려 했지만, 연은
제 팔을 잡았습니다. 그러고는 제게 말했습니다.
"나.. 나 있잖아.. 그냥 너 좋아하면 안되는거야..?"
"좋아하든.. 싫어하든 당신 맘대로해요..전.. 혁현이만 따라갈꺼에요.."
연은 조금은 낙담한듯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까지 모질게 대할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도와준건 연 쪽이었고, 혁현이가 준 상처, 모두 연이 잊게 해줬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쟤는.. 너가 싫다잖아.."
연은 힘없이 말했습니다. 저는 연을 보고 연의 손을 제 팔에서 때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혁현이는 현정이가 좋다고 했어요.. 저는 현정이고.. 얼마든지 기회는 있어요.."
전 그리고 뒤돌아 연을 보지도 않고, 집으로 왔습니다. 연은 저를 쫒아왔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쫒아 온걸 보면, 연의 마음은 진실이었나봅니다. 제가
지하세계에서 연이 연의 아버지한테 한말 모두.. 그건 진심이었지, 어느 하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저를 좋아하는건 연에게는
해가되면 해가 됬지, 전혀 득될건 없었습니다.
" 만약에.."
연은 갑자기 쫒아오기만 하더니, 말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저는 집에 오려 했지만,
연이 저에게 집주소를 가르쳐주던, 그 놀이터로 왔습니다. 저는 벤치에 앉았고,
연 역시 따라 앉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모질게 집에 들어가서 연을 안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뭐요?"
연은 조금은 망설였습니다. 아까 제가 한말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쓰는걸까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는다면,
왠지.. 저는 지금 제가 혁현이한테 받은 상처보다 더욱더 큰 상처를 연에게
줄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라도 모질게 해서 계속 저를 좋아해서
얻는 엄청난 상처보다 훨씬 적은 상처로 연에게 최대한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통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석이 널 싫어하고.. 너랑은 도저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런다면..
나한테 올수있어..?"
연은 정말로 진지했습니다. 예전에 사탕이나 먹으면서, 매일 실실 웃던 그런 연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진지해서, 제 마음이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연의 눈마저
못마주칠것 같습니다.. 너무나 진지하고, 너무 고독해보여서..
"그럴수.. 있는거야?"
저는 연에게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웃고는 있지만, 낮은 음성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혁현이가 날 싫어하고 찢어 죽이고 싶어하고, 심지어 혁현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한테는 안가요.."
-월요일-
연에게 너무 모질게 대한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연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겁니다.
제가 웃는 모습이 최후의 일격이라는것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연이 저때문에
힘들어 할것같고, 영영 지하세계에도 못돌아가는 일이 생길것만 같았습니다.
"일어나!! 딸~!"
어젯밤 그렇게 고민을 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기는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부름은, 너무나도 제 기분과는 다르게 들뜨셨습니다.. 저는 어제일 때문에
한숨도 못자고 고민하고, 마음이 무거워 학교도 가고싶은 마음이 없는데 말이죠..
"딸! 무슨 고민있어?"
밥먹고있는 저를 보고 어머니는 제게 묻습니다. 무슨 고민이 있느냐면서..
"아뇨.. "
"근데 표정이 왜그래? 어디 아픈것 같기도하고.."
"그냥 잠을좀 설쳤어요.."
"왜 또..?"
"그냥.. 시험때문에요 하하.."
어머니께, 남자 고민때문에 밤 설쳤다고 해서 좋을건 없었습니다. 밥을 다 먹고
자리에 일어나서, 가방을 챙기고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여김없이 오늘도
월요일입니다.. 왠지 시간이 멈춰서 늘 일요일이거나 늘 토요일이었음 좋겠습니다.
언제나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은 절 힘들게 합니다. 혁현이를 보아야 하는 날이기도 하고,
앞으로 연을 어떻게 만냐나는 약간의 고민도 있습니다.
"야 이정아"
한참을 걸었을까요? 뒤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다름아닌
채연이가 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채연이는 언제 봐도 정말 여유로운 웃음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저에게 다가왔고, 그리고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어제는.. 좀 당황했다? "
"응.."
"이제 게임이 재밌어지는듯 하고 있어.. 늘 내가 일방적이라서 이대로 게임이 끝나면
어떻하나 했는데, 다행이도 너가 어제 게임을 재밌게 만들어줬어.. 그건 고맙다고
말해주지"
그건 재밌는 게임을 위해서가 아니라, 혁현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런 여우같은 계집애한테 홀려서 게임이 끝난다면, 혁현이의 마음은 정말 멍투성이로
변해버릴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채연이는 혁현이를 게임도구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근데 말이야.."
채연이가 그렇게 저를 비웃는듯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열어 저에게 말합니다.
"혁현이라는애.. 보면 볼수록 귀엽고 멋진것 같아.."
"...응..?"
"왠지.. 게임 도구 이상으로 느껴지는것 같아.."
채연이는 혁현이가 게임도구가 아닌 남자로 느껴진다는것을 말하려는걸까요?
저는 숨을 죽이고 이어지는 채연의 말을 기다립니다.
"더이상.. 나도 못 물러날것 같아.. 나도 감정이라는건 있어.. 좋아하는 사람 생길수있고,
싫어하는 그런 감정.. 나도 있어.. 왜냐면.. 나도 인간이니까.."
"그래서..?"
"이건 더이상 게임이 아니라 이말이지.."
채연이가 하는 말은, 혁현이가 더이상 도구가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았음을 의미했고,
더이상 우리가 하고있는건 바보같은 게임이 아닌, 게임 그 이상.. 마음에 상처를
받을것을 각오했다는 뜻합니다.
"나도 아마.. 여기서 지면, 적지않은 상처와 함께 패닉에 빠질것 같거든..
내가 하고 싶은말은 여기까지야.."
채연이는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지나가고는 학교로 향했습니다. 저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서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를 가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채연이도 혁현이를 남자로 좋아하고 있다는 뜻을 생각해보면.. 혁현이도
채연이를 싫어하는건 아닙니다.. 어찌보면, 저는.. 그 두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훼방꾼일지도 모릅니다.. 전 그냥 그런 년일지도 모른다는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