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국가 미국·2강-①] 2차 대전과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https://www.bobaedream.co.kr/view?code=army&No=125086
[전쟁국가 미국·2강-②] 군산복합체와 안보 관료의 등장 https://www.bobaedream.co.kr/view?code=army&No=125125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정당화'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인은 2차 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군국주의 일본의 비열한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회복했으며 세계의 지도국가로 등극했다는 것이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의 공식 서사다. 군사력에 의한 세계 질서의 유지, 이것이 '좋은 전쟁'의 핵심 요지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되살아난 미국의 군사주의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참전 직전까지 대다수 미국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불신했었다. 1차 대전의 경험 때문이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한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던 1차 대전의 결과,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다. 이러한 미국인의 전쟁 불신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때까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진주만 기습이 없었다면 미국의 참전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는 미국은 2차 대전에 '참가한(enter)' 것이 아니라 '끌려 들어갔다(pulled-in)'고 말한다. 즉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나흘 뒤인 12월 11일에는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시아와 유럽의 전쟁 모두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년 11월 대선에서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3선에 성공했다. 또한 진주만 기습 다음 날, 12월 7일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지칭하며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을 강력히 비난했다. 미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를 기습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여론은 일거에 반전된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국민 모두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이라는 공식 서사의 핵심 요소다.
평화를 지향했던 미국은 선의의 피해자인 반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사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인식이 미국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이제 미국의 참전은 완벽하게 정당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됐다. 1차 대전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 과정에 대한 이러한 공식 서사는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미국은 강력한 경제 제재 등을 통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갔다는 의견에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고의로 방치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 반론의 핵심은 과연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속인 일본의 기만적 기습이었나?'라는 것이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진주만 수정주의(Pearl Harbor Revisionism)'로 불리는 이러한 반론은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다. 비어드는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저명한 역사학자였으나 이 저서에서 루스벨트를 맹비난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하게 매장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국민적 영웅 루스벨트에 대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한 대가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상당수 역사가, 논픽션 작가, 언론인들에 의해 수정주의적 반론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최고의 논픽션 작가로 인정받는 존 톨랜드의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1982년), 전쟁 당시 해군 병사였으며 이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17년간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발굴하고 암호해독 요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을 파헤친 로버트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 루스벨트와 진주만의 진실>(1999년), 그리고 역사학자 스티븐 스니고스키의 논문 <진주만 수정주의를 옹호함>(2001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1946년까지 5년간 9차례 조사가(해군과 육군의 자체 조사, 의회 청문회 등) 진행된 데 더해 전쟁 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도 국방부 재조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1995년, 진주만 군사책임자였던 허즈번드 키멀 해군 제독과 월터 쇼트 육군 중장의 유족들은 루스벨트 행정부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관한 정보를 유독 이들에게만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진주만 방어에 태만했다는) 직무유기의 죄를 뒤집어쓰고 2계급 강등 예편 당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재조사를 통해 이들의 계급과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국방부는 7개월 조사 끝에 50쪽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유족의 요청을 기각했다. 또한 1999년에는 미 상원이 키멀과 쇼트의 명예 회복에 관한 결의안을(찬성 52, 반대 47) 채택하고, 2000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들의 계급을 복원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후까지도 당사자 측의 이의 제기가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무엇인가? (4편에 계속됩니다.)
또한 항모를 동원한 기습전은 최초의 사례라 미해군 지휘부도 방심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주만 기습전 일본 대본영이 추산한 일본과 미국의 국력과 생산력을 1/20로 계산하고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만 괴멸시키면 다시 복원까지 수년이 걸릴것이라 판단하고 일본은 미국과 강화협상으로 시간을 끌면서 인도차이나와 서 태평양 지역을 점령한다는 전략이었지만.
실제 종전후 미국과 일본을 생산력을 계산해보니 1/100이었고 진주만 기습에서도 연료보급 기지를 파괴했으면 복구까지 상당히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항공 지휘관들의 반대로 연료기지는 공격에서 제외되었고 요크 타운함등 미 항모들도 단기에 수리를 마치고 전력으로 복귀할수 있었지요.
어쨌든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패권국의 지위를 영국에서 가져오면서 달러기반의 브랜튼 우즈체제로 70년 넘게 꿀빨고 있는 미국을 보면 미국으로서도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이나 ibrd세계개발은행등 국제기구도 달러패권을 유지하는 구실일뿐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는 여지없이 양털깍기의 대상이 되어 몰락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중국인데 의외로 미국이 쉽게 요리할수 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중국경제는 플라자합의로 조진 일본보다도 기초체력이 허약합니다.
진주만 폭격을 알고도 묵살하였다라곤하지만..
현실은 저당시 미국도 개전 또는 전쟁의 첩보가 하루에 수백건씩 보고가 되었다는거죠. 유럽전선도 급박하니 오히려 유럽의 첩보는 엄청난 양이였을겁니다.
그래서 저당시 미 당국도 진주만의 폭격이 첩보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크게 비중은 두지 않았을겁니다.
저것과 반대 되는 첩보도 수백건씩 올라왔었을테니 말이죠. 그리고 에너지등 일본의 목숨줄을 미국이 잡고 있었던 시대적 정황도 있었고.
비슷한 예가 우리 한국전 개전전에도 전쟁징후가 있었습니다. 첩보도 엄청났고 38선에서 저위력 무력충돌은 수시로 있었구요.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난다라는 말도 나왔었습니다.
간과하면 안돼는것은 그 반대인 전쟁 안난다란 말도 비슷하게 나왔었다는겁니다.
그래서 단편만 뽑아 놓고 해석해 보면 우리 국군이 6월25일날에 전면전으로 들어올거란 첩보에도 그렇게 당해버린거죠.
당시 시대를 좀 보자면 이 당시 벼농사의 모내기는 지금의 국책 사업으로 만큼 큰 일이였거든요.
역사적으로 이해가 안돼지만 그 당시 상황을 종합해서 잘 보면 보면 지금 비판하는 우리도 그때 그 당시엔 그 판단을 했을겁니다.
또한 항모를 동원한 기습전은 최초의 사례라 미해군 지휘부도 방심한 측면이 있습니다.
진주만 기습전 일본 대본영이 추산한 일본과 미국의 국력과 생산력을 1/20로 계산하고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만 괴멸시키면 다시 복원까지 수년이 걸릴것이라 판단하고 일본은 미국과 강화협상으로 시간을 끌면서 인도차이나와 서 태평양 지역을 점령한다는 전략이었지만.
실제 종전후 미국과 일본을 생산력을 계산해보니 1/100이었고 진주만 기습에서도 연료보급 기지를 파괴했으면 복구까지 상당히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항공 지휘관들의 반대로 연료기지는 공격에서 제외되었고 요크 타운함등 미 항모들도 단기에 수리를 마치고 전력으로 복귀할수 있었지요.
어쨌든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패권국의 지위를 영국에서 가져오면서 달러기반의 브랜튼 우즈체제로 70년 넘게 꿀빨고 있는 미국을 보면 미국으로서도 남는 장사를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이나 ibrd세계개발은행등 국제기구도 달러패권을 유지하는 구실일뿐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는 여지없이 양털깍기의 대상이 되어 몰락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중국인데 의외로 미국이 쉽게 요리할수 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중국경제는 플라자합의로 조진 일본보다도 기초체력이 허약합니다.
미국이 진주만 침공을 알고 있었다해도 선전포고 없이 기습을 할거라는건 예측 할수 없었고요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를 시작하며 일본의 굴복이냐 전쟁이냐. 두가지 외엔 다른길이 없는거죠 누구나 전쟁을 예측할수 있는거죠
베트남 전 예를 봐도 기습공격 가능성을 일부러 모르쇠로 일관한 것도 가능성이 높은듯요
진주만 폭격을 알고도 묵살하였다라곤하지만..
현실은 저당시 미국도 개전 또는 전쟁의 첩보가 하루에 수백건씩 보고가 되었다는거죠. 유럽전선도 급박하니 오히려 유럽의 첩보는 엄청난 양이였을겁니다.
그래서 저당시 미 당국도 진주만의 폭격이 첩보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크게 비중은 두지 않았을겁니다.
저것과 반대 되는 첩보도 수백건씩 올라왔었을테니 말이죠. 그리고 에너지등 일본의 목숨줄을 미국이 잡고 있었던 시대적 정황도 있었고.
비슷한 예가 우리 한국전 개전전에도 전쟁징후가 있었습니다. 첩보도 엄청났고 38선에서 저위력 무력충돌은 수시로 있었구요.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난다라는 말도 나왔었습니다.
간과하면 안돼는것은 그 반대인 전쟁 안난다란 말도 비슷하게 나왔었다는겁니다.
그래서 단편만 뽑아 놓고 해석해 보면 우리 국군이 6월25일날에 전면전으로 들어올거란 첩보에도 그렇게 당해버린거죠.
당시 시대를 좀 보자면 이 당시 벼농사의 모내기는 지금의 국책 사업으로 만큼 큰 일이였거든요.
역사적으로 이해가 안돼지만 그 당시 상황을 종합해서 잘 보면 보면 지금 비판하는 우리도 그때 그 당시엔 그 판단을 했을겁니다.
고구려가 중국먹을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명확한 첩보가 수없이 경고를 했는데 왜 못막고 대비를 안했냐? 하는거죠.
지금 결과에 껴맞추니까 그렇게 되는거지.
상반된 보고들이 수없이 수백건이 동시에 올라옵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IMF맞기 전에도 경고 보고서 많았고요. 루나 코인도 박살나기 전에 경고 존나게 많았구요. 부동산도 주식도 매주 마다 서러 상반죈 예측들이 수백개씩 나오죠. 그래도 꼴아박는 인간들 천지임.
결과를 알고서 그런 보고서만 추려서 사건을 재조명 하면 이렇게 징조가 명확했는데!! 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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