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왕조는 스스로 송나라에게 조공과 책봉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들에게 오해를 받을까(고려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셨던 관계) 난감해 했다.
2.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선이라는 국호(國呼)도 명나라가 정해준것이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 이라는 두개의 국호를 들고 명황제에게 정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명황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나라라고 하여 조선으로 국호를 정해주었다.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칭하였다(명나라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 국호를 타국에서 만들어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였다.(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증거중에 한가지^)
3.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 을 통해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자처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유명조선국 = 명나라의 조선국이라는 의미)
4. 조선은 스스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5. 조선은 독자적 칭호가 아닌 '왕' 을 사용했다. 여기서 "왕" 은 황제국인 명나라의 속국중에 왕을 의미했다.
6. 조선 궁궐은 명나라의 문양인 용문양을 새겨넣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였다.
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즉, "명나라의 식민지국으로서 예절을 다한 나라" 라는 뜻이다.
8. 명나라는 조선을 순이(順夷) 라고 불렀다. 명나라에 순종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여러 속국(북적, 서융, 남만)들중 중원의 한족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조선이였다.
9.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인은 명나라 천자(天子=황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광해군은 이런 말을 하는 사대부들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10. 조선의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외적으로 선포한 건축물이다.
11.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 천자(황제)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자 선정도 명나라가 정해주었다. (조선왕의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12. 명/청나라는 조선의 왕비나 왕태자 폐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정권이 있었다. 조선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지휘 감독하고 있던 것은 명/청나라 대신(大臣)들이었다.
13. 명/청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고관들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까지 영접을 나가 무릎을 꿇고 사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연회를 개최하여 극진히 접대해야 했다. 조선 세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명/청나라 사신들에게 예를 올리고 읍소를 했다.
14. 임진왜란시 명군이 파병되자 전작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간다. 명나라는 조선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전후 조선에 대해 강화협상을 했다. 조선에겐 주권이 없었고 전작권도 없었고 아무런 권한 조차 없었다. 왜냐면 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라서 종주국인 명나라가 강화 협상에 참여하는것을 뒤에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었다.
15. 금나라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 식민지임에 시비를 걸고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16.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청나라는 임금 / 조선은 신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조는 명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하며 울부짓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청나라(오랑캐)의 식민지가 되는것에 대해 자괴했다고 한다.
17. 조선은 동남아, 서양, 인도 등 외국과 직접적인 물자 교역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명나라를 통해서만 대리 교역을 하였다. 왜냐면 명나라가 종주국(명나라)을 통해서만 교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 조선은 해마다 종주국인 명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고대시대는 독립적인 국가들끼리는 절대로 조공거래는 하지 않았다. 고로 조선은 100% 중국의 조공국이자 속국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19. 조선시대 최고 문인 '송강 정철' 도 자신이 죽자 묘비에 "명나라를 섬기자" 라고 새겨놓았고 속리산 화양동 계속에 명황제 제사를 지내주는 '만동묘' 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명천지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달도 명나라 것이다" 라는 뜻이다.
20.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글이 천한것들이나 쓰는 저급한 언어라고 하였고 사대부들끼리는 명나라 언어로만 대화 하였다. 명나라 유학을 최고의 입신양명의 길로 여겼으며 땀흘려 일하는 노동을 가장 천한것들이 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1. 명나라가 관우한테 제사를 지낼 사당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조선은 즉시 2년만에 동묘/남묘/북묘/서묘를 지어 명나라에 충성을 보였다 (지금도 동묘는 보물 142호)
22. 명나라 군이 8년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닥치는대로 성폭행과 약탈, 살인을 했으나 조선의 조정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명군이 오면 조선농민들은 귀중품을 땅에 묻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조선농민들은 왜군을 더 반겼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3.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이라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지내주는 제단을 만들고 사대부들은 종주국인 명나라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망한지 200년이나 넘게 타국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였음이 행복했다는 증거다.
24.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에는 '청나라 와의 사대관계 폐지와 독립' 을 촉구했다.
25.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문에서 "독립" 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26.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선언은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27.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였다. 즉, 주변국들(일본, 러시아)도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기록이다. 고종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매우 반겼으며 청나라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조선은 곧바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연예인은 작은것하나도 타격일텐데
큰결단 내리셨네유
연예인은 작은것하나도 타격일텐데
큰결단 내리셨네유
불법영상 제작하는 놈들이 손때는게 뭐라고 오히려 땡큐다 짱깨들아
이 처럼 언론에 자유가 넘쳐나는 나라에 살면서 자체 검열이라니
자체 검열은 기레기들이 필요한거 아닌가 싶군요
이 처럼 언론에 자유가 넘쳐나는 나라에 살면서 자체 검열이라니
자체 검열은 기레기들이 필요한거 아닌가 싶군요
내가 내 의견을 낸다고 해서 그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논리시네...
보아하니 조선족이거나 국내에 체류중인 중국인 인듯 한데
걍 본국 일에나 집중하세요.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고.
1. 고려왕조는 스스로 송나라에게 조공과 책봉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들에게 오해를 받을까(고려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셨던 관계) 난감해 했다.
2.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선이라는 국호(國呼)도 명나라가 정해준것이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 이라는 두개의 국호를 들고 명황제에게 정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명황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나라라고 하여 조선으로 국호를 정해주었다.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칭하였다(명나라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 국호를 타국에서 만들어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였다.(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증거중에 한가지^)
3.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 을 통해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자처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유명조선국 = 명나라의 조선국이라는 의미)
4. 조선은 스스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5. 조선은 독자적 칭호가 아닌 '왕' 을 사용했다. 여기서 "왕" 은 황제국인 명나라의 속국중에 왕을 의미했다.
6. 조선 궁궐은 명나라의 문양인 용문양을 새겨넣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였다.
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즉, "명나라의 식민지국으로서 예절을 다한 나라" 라는 뜻이다.
8. 명나라는 조선을 순이(順夷) 라고 불렀다. 명나라에 순종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여러 속국(북적, 서융, 남만)들중 중원의 한족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조선이였다.
9.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인은 명나라 천자(天子=황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광해군은 이런 말을 하는 사대부들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10. 조선의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외적으로 선포한 건축물이다.
11.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 천자(황제)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자 선정도 명나라가 정해주었다. (조선왕의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13. 명/청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고관들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까지 영접을 나가 무릎을 꿇고 사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연회를 개최하여 극진히 접대해야 했다. 조선 세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명/청나라 사신들에게 예를 올리고 읍소를 했다.
14. 임진왜란시 명군이 파병되자 전작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간다. 명나라는 조선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전후 조선에 대해 강화협상을 했다. 조선에겐 주권이 없었고 전작권도 없었고 아무런 권한 조차 없었다. 왜냐면 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라서 종주국인 명나라가 강화 협상에 참여하는것을 뒤에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었다.
15. 금나라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 식민지임에 시비를 걸고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16.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청나라는 임금 / 조선은 신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조는 명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하며 울부짓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청나라(오랑캐)의 식민지가 되는것에 대해 자괴했다고 한다.
17. 조선은 동남아, 서양, 인도 등 외국과 직접적인 물자 교역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명나라를 통해서만 대리 교역을 하였다. 왜냐면 명나라가 종주국(명나라)을 통해서만 교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 조선은 해마다 종주국인 명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고대시대는 독립적인 국가들끼리는 절대로 조공거래는 하지 않았다. 고로 조선은 100% 중국의 조공국이자 속국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19. 조선시대 최고 문인 '송강 정철' 도 자신이 죽자 묘비에 "명나라를 섬기자" 라고 새겨놓았고 속리산 화양동 계속에 명황제 제사를 지내주는 '만동묘' 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명천지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달도 명나라 것이다" 라는 뜻이다.
21. 명나라가 관우한테 제사를 지낼 사당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조선은 즉시 2년만에 동묘/남묘/북묘/서묘를 지어 명나라에 충성을 보였다 (지금도 동묘는 보물 142호)
22. 명나라 군이 8년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닥치는대로 성폭행과 약탈, 살인을 했으나 조선의 조정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명군이 오면 조선농민들은 귀중품을 땅에 묻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조선농민들은 왜군을 더 반겼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3.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이라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지내주는 제단을 만들고 사대부들은 종주국인 명나라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망한지 200년이나 넘게 타국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였음이 행복했다는 증거다.
24.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에는 '청나라 와의 사대관계 폐지와 독립' 을 촉구했다.
25.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문에서 "독립" 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26.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선언은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27.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였다. 즉, 주변국들(일본, 러시아)도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기록이다. 고종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매우 반겼으며 청나라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조선은 곧바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굉주를 보고 배우세요..
균상아 힘내라 괘안타~~~~~~
홍콩 시민 자기들 권리를 위한 시위를 지지 한다는건데. 언제 홍콩 독립하라고 했냐?
그리고 중국자체가 홍콩 정치적 자주성을 인정해주고 있어. 니네 중국 정부한테 따려자.
축구팀도 제대로 팀웍이 안맞는데 ㅋㅋㅋㅋ
비난하고 사는데. 쟤들 욕할꺼없음.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