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서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엄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가장이며 가장은 집안의 기둥이라는 의식이 팽배할 때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었습니다..
누구도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거나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88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천천히 말을 꺼내셨습니다.
"여보 나.......공부할래"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곧 불같은 아버지의 호령이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아버지는 고개를 들면서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공부하고 싶어? 알았어 공부해"
당시 형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만 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초등학교만 나온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잘 운영하던 미용실도 그만두고
낮에는 파출부로 저녁에는 야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셨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집안일 다 해놓고 출근하시며 일 끝나고 집에와서 점심 저녁 차려 놓고 학교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부와 씨름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년이 흘렀고 어머니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셨습니다.
목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안수받을 돈이 없어서 전도사로 교회를 열었습니다.
없는 살림에 걸인들을 데리고와 먹이고 재웠습니다.
교단에서 어머니를 인정하여 수백만원이 드는 목사 안수를 안수목사님들 식사로 대신하고 목사안수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원목(병원에 있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연고자 ...
가족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이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도를 해주는 것이 어머니의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새벽에 운명을 하십니다.
어머니가 새벽에 전화가 오면 옷을 차려 입고 나가십니다.
어떠한 사례비도 없습니다.
오직 어머니가 스스로의 사명감으로 하셨습니다.
저도 몇번을 어머니를 따라 병원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도를 받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어머니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어머님이 동두천에 자리를 잡고 교회를 열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동두천에 있는 교회에 대부분은 외국인들 입니다.
대부분의 흑인들 저는 처음 들어보는 라이베리아 , 탄자니아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
일하러 온 흑인들 그리고 가족들....
대부분은 어렵고 힘든 가정들이고 교회 재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 것이 본인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국가 유공자가 되셨습니다.(월남전 참전용사)
그리고 유공자 수당이 지금 어머니에게 몇십만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뜻있는 교회에서 몇십만원이 후원금으로 나옵니다.
모두 합치면 한달에 들어 오는 돈 200만원 남짓....
그 중에 교회세 80만원 / 차량운행비 40-50만원 / 어머니월급 30-40만원 / 기타 전기세 수도세 노회비..등등
그나마 식비는 외숙모가 매주 직접 밥을 차려 주시고
저도 매주 교회를 방문하여 간식을 사다 놓고 있습니다.
올해 어머니는 만 70세가 되셨습니다.
보청기가 없으면 어려운 나이가 되셨습니다.
어머니가 고령에도 스스로 하고 싶어하시는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엄하신 아버지의 한마디
"공부하고 싶어? 알았어 공부해"
저는 여기서 어머니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저는 꼭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 아버지의 한마디가 아버지 인생에 가장 큰 아버지 역할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길을 제가 걸어가려고 합니다.
걸어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보여 주셨던 아버지의 역할......
이제 남은 저의 몫입니다.....
존경합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멋진분입니다
하고자 하시는일
축복받는 가운데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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