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에서 대지주였던 육종관과 이경령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은 대지주이자 지역 유지로서 본처 이외에도 3명의 첩을 더 거느리고 있었다. 육영수는 본처인 이경령의 차녀로서 여러 친남매 및 이복 남매들을 포함하여 총 22명(12남 10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 육용필의 동생은 육용정으로 육용정은 조선 말기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개화파 사상가였다.
1938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배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5년 21세 때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에 부임, 가사 과목 교사로 1년 3개월간 재직했다.[1]
결혼 생활[편집]
1950년 소개로 당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으며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박정희와 결혼했다.[1] 당시 박정희는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아버지 육종관은 이 결혼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는 가출하여 박정희의 임지였던대구에서 하숙하였다. 당시 육영수의 어머니 이경령 역시 남편 육종관의 축첩에 반발하던 중 딸 육영수의 결혼을 계기로 충북 옥천집을 나와 딸과 함께 살았다. 남편 박정희와의 사이에 근혜, 근령, 지만 등 1남 2녀를 두었다.
육영수 탄신제라고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반인반신 박정희 탄신제 말고 육영수 탄신제가 또 있더란 말씀.
생일잔치도 아니고 탄신숭모제례면 신이 탄생한 날을 기념한다는 뜻인거임? ㅡ,.ㅡ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x?CNTN_CD=A0001931967
무슨 수호신 처럼 전화기에다가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도 하고. 하.. 놔...
암튼 무슨 고결이고 자시고.
육영수가 조강지처, 본처인 줄로 아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구요.
근데 사실은.
박정희가 본처 김호남 두고서 이현란이랑 3년 동거한거는 아시죠? 1948년엔 심지어 약혼도 함. 유부남이. ㅋ 이현란이랑 약혼한 이때 이미 본처 김호남이 낳은 딸이 11살. 이현란 사이에서 아들도 낳았었고. 근데 생후 6개월만에 죽음. 아. 근데 저 사진 가운데 시누이 좀 봐. 구미에서 올케가 시부모 모시고 애키우고 사는데 동생 첩이랑 사이좋게 사진 찍고 있네. 저 집안이 원래 콩가루 개판이구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x?CNTN_CD=A0001566819 |
(이명박과 발가락 여사 결혼 사진인 줄로 착각할 뻔 했다. 너무 닮았네 혐)
1950년 이라 함은 6.25가 터진 해라서
남들은 빨갱이랑 죽도록 싸우다 죽는데 박정희는 남로당 전력 때문에 혼자 뒤로 빠져서 인생 혼자 즐겁게 삶. 당시 34세
1950년 2월에 동거녀 이현란이 박정희의 폭력에 못이겨 가출
1950년 8월에 본처가 있는데도 육영수랑 맞선보고
1950년 11월에 김호남이랑 강제 이혼하고서
1950년 12월에 육영수랑 결혼. 주례는 대구시장.
12월이면 중공군이 몰려와서 대한민국이 아비규환이였던 때. 박정희, 육영수는 대구에서 신나는 신혼생활을 즐김.
본처를 억지로 이혼시키고 애딸린 유부남 박정희랑 결혼하니 좋았을까?
하기야 친정 아버지 난봉꾼 육종관이 부인이 다섯명에 자식도 스무명이나 낳은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이혼 도장도 찍지 않은 남자 만나 선보고. 그래서 집안 내력이 중요하단 걸까.
아무튼 그렇다고 아버지가 반대하는데 가출까지 해서 유부남 사는 곳으로 가서 해서 살림을 차렸네. 대단하다.
대처 부인이 몇명이여
-_-)
대우전자인가?? 암튼 국산 메이커 회장 사모였죠
그 딸래미도 얼마전에 돌아갔고...
포천 호수 근처에 무슨 호텔같은 글램핑장도 갖고 있어요...
지만이도 종종 놀러왔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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