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은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이 신민당 대표 이철승과의 경합에서 총재로 당선됩니다. 유신정부에 다소 협조적인 전대표 이철승보다 김영삼은 선명야당이라는 기치아래 유신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며 단호한 투쟁을 전개해 나갑니다.김영삼은 미국에게 한국에대해 <석유포함> 원조제공을 중단하고 정부에 대해 민주화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하고 사대주의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여론에 미국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수있는 위치에 있는나라라고 까지 말하였습니다.지금와서 생각하면 실로 너무나 터무니 없는 사대주의적 발언이였는데 당시에는 그런느낌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발언에 박정희는 격노했습니다.박정희는 한국사람으로써 이런발언을 할수있느냐고 생각한것 입니다.이렇게 박정희정부와 김영삼은 틈이 벌어질대로 벌어지게 됩니다.
이럴즈음 1979년 8월 11일 YH사건이 벌어집니다. 의류수출업체인 YH사가 여공들과 그 당시는 흔치 않던 노사 대립 상황에서 회사가 일방적으로 밀린 임금도 안 주고 폐업을 하자 생존권을 위협 받던 여공들이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며칠째 점거 철야 농성을 하던 중 경찰이 투입 되어 강제 해산, 체포 중 여공 수 명이 추락사 한 사건 입니다.
이 사건이 게기가 되어 배후에 김영삼총재가 있다고 확신한 박정희정부는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리고,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을 감행했습니다.그러자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어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비록 시위는 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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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파동이있던 1979년은 전세계가 경제가 힘들고 어렵고 고물가에 회사나 공장이
운영난으로 무더기 도산하던시기였다
이때 야당이 해야할일이 정부에대한 긴밀한 협조나 파업 시위가 발생하지않게
국민들을 다독여야하는데
야당 총재라는 작자가 미국의원조중단 과 민주화 압력을 요청하였다니
국가적 위기를 제놈의 기회로 삼으려는 더러운 작태가 아닌가
그 총재란놈을 누군들 손보지 아니할까
부마항쟁이 민주화의 열망이나 갈증으로 발생한것이 아닌
석유파동으로 민생고에 시다리는 국민들을 민주화인사들이 석유파동으로
촉발한 민심이반을 민주화로 이용하는
민주진영에 더러운 작태였습니다
악알에 민주화 달린 늠치고
대한민국에 해를 입히지 않은 늠이
없당께요 ㅋ
박근혜 의원이 넓은 아량을 보여주었는데도 말입니다
하여간 사내답지못한 쪽제비 시키같은 김영삼이는
남자도 대인배도 아닙니다
뭐이런 종자가 대통령을 헤처묵었는지
참나 ~~
현철이먼저 콩밥을 먹이고
노태우 군사정부에게 받은 3000억 정치자금으로
김영삼이도 처넣야 합니다
평생 무상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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