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서울양반이란 사람은 전라도인이란 말만 듣고도 몸을 움짓하며 서울사람들이 전라도사람이라면 아주 질색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며 이 전라도 학생은 서울사람에 대해 한편으로는 분개하고, 한편으로는 차별적 시선에 매우 고통스러워 한다. 저 서울양반은 전라도에 대한 어떤 인색때문에 서울사람들이 전라도라면 질색을 한다고 말할까.
서울 사람들은 전라도인들이 주머니가 둘이라거나 능글맛다거나 하는 험담을 하고 있었다.
이중인격에 인격이 능글능글한 사람들이란 악평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ikdominia/69)
50년대에 전라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도로 좋지 못했다. 전라도 출신 시인 유엽은 전라도 사람들이 이미 호적을 세탁해서 고향을 다른 지역으로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타지에서 뼈가 굵었던 유엽이 직접 경험했듯이 세간에서 전라도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며 전라도인과는 동석을 하고 놀다가도 전라도인이 나가면 그에 대한 중상이 꽃을 피울 정도였다.
기타 사례에서도 전라도에 대한 타지역민의 극도로 나쁜 인식은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었다.
4. 조선 후기 전라도에 대한 평가
그러나 전라도에 대한 이런 악평은 해방후에 시작된 문제도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명확한 기록에 등장하는 전라도에 대한 평가도 심각한 악평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1.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인심편
이중환은 택리지 복거총론 편에서 옳은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필연적으로 나쁜 물이 들어 훌륭하게 되기 어려우니 반드시 지방의 풍속을 가려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평안도의 인심이 가장 후하고 경상도의 풍속은 가장 진실하나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하고 교활하여 나쁜 일에 쉽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전라도는 자식을 키우기에도 극히 좋지 못한 지역임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팔도총론> 전라도편
구체적으로 들어가 이중환은 팔도총론 전라도편에서 전라도는 풍속이 노래와 계집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며, 사람이 경박하고 간사하여 문학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지역이라고 한다. 대단한 악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라도에 대한 극심한 악평은 이중환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순암 안정복 등 조선시대 대부분의 제왕들과 학자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또한 전라도는 과거에 올라 훌륭하게 된 사람의 수가 경상도에 미치지 못한 이유도 대개 문학에 힘써 자신을 이름나게 하는 사람이 적은 까닭이라고 덧붙인다. 그저 먹고 놀기만을 좋아하고 계집이나 밝히는 풍속 더러운 동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중환의 경상도에 대한 평은 완전히 판이하다.
팔도총론 <경상도편>
이중환은 팔도총론 경상도편에서 옛부터 수천년 동안 장상, 공경과 문장과 덕행이 있는 선비와 공을 세웠거나 절의를 세운 사람 및 선도, 불도, 도교에 통한 사람이 쏟아져 나와서 경상도는 한 마디로 인재의 광이라는 말이 속담처럼 전해 내려 오고 있음을 전한다. 게다가 특히 예안, 안동, 순흥, 영천, 예천 등의 다섯 고을에 대해서는 한반도 최고의 지역으로서 한마디로 <신이 알려 준 복된 지역>이라는 극찬까지 덧붙인다.
이상 자료; 택리지 (이중환 저, 이익성 옮김; 2007년 을유문화사)
2. 성호 이익의 전라도평
성호 이익의 전라도 평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양남수세(兩南水勢)
전라도로 논한다면, 1도의 물이 무등산(無等山) 동쪽의 물은 모두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서쪽의 물은 모두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전주(全州) 서쪽의 물은 모두 서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덕유산 이북의 물은 모두 북으로 흘러 금강(錦江)과 합류가 되니, 비유컨대, 머리를 풀어 사방에 흩어진 것과 같아 국면(局面)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재주와 덕망 있는 자가 드물게 나오니 사대부로서는 거지(居地)로 삼을 곳이 못된다.
성호사설 제8권 인사문(人事門) 생재(生財)
전라도(全羅道)는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이고, 동쪽은 대령(大嶺)이 경계(境界)이다. 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方士)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 전주(全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다. 장사꾼이 더욱 많아 온갖 물화가 모여든다. 생강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전역에서 쓰는 생강은 모두 전주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고,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
성호사설 제12권 인사문(人事門) 추악지언(醜惡之言)
판서 이기(李?)는, “내가 일찍이 선정(先正)에게 들으니, 이같은 추악한 말이 조종조(祖宗朝)에는 절대 없었는데, 연산(燕山) 말년부터 정국(靖國) 초년에 이르러 처음 호남(湖南)의 영광(靈光)ㆍ만경(萬頃)등지에서 시작되어 드디어 사방에 전습(傳習)된 것이라 하시더라.”고 하였다. 연산 말년에 음란하고 추악한 짓을 자행했으니, 풍속이 나빠진 것은 그렇다 하겠지만, 거의할 즈음에 추매(椎埋)의 무리들이 많이 득세하여 이들이 지위를 차지해 백성들에 임하였으니 풀 위의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쓸리는 것이기 때문에 허물어지듯 악을 따라 차츰 오늘날에까지 이르러서 다시 개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성호사설; http://db.itkc.or.kr/index.sj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sjp?bizName=MK&seojiId=kc_mk_g008&gunchaId=&NodeId=&setid=224029)
전라도는 방사와 술법을 좋아하고 큰소리 치고 남 속이는 것을 잘하며, 게다가 풍속이 사나와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 인심 야박한 동네라는 둥 최악의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호 이익의 경상도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성호사설 제13권 인사문(人事門) 영남 오륜(嶺南五倫)
토풍(土風)으로 말하면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으며,
부녀는 반드시 밤에 길쌈하고 선비는 모두 짚신을 신으며, 혼인 상사에 집 형세의 있고 없는 것에 따르고, 붕우와 친척이 도와주어 전복하고 유리하는 환을 면하며, 백성은 모두 토착하여 농사를 짓고 교활한 도적이 일어나지 않으며, 국가에 일이 있으면 솔선으로 난에 임하여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으며, 만일 글을 읽고 도리를 말하여 그 행검과 재능이 밖으로 나타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옷깃을 여미고 스승으로 높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후한 풍속, 즐거운 땅, 인의(仁義)의 시골이다.
기타 성호사설에 드러난 경상도에 대한 극찬들은 여기를 참조
http://blog.daum.net/ikdominia/60
3. 다산 정약용의 전라도 평
전라도에서 살았던 다산 정약용 역시 경상도는 극찬했으나 전라도에 대해서는 매우 좋지 못한 평가를 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조선 팔도 중 경상도가 가장 장원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존귀함과 부유함이 줄지를 않은 곳이라 극찬했다. 이는 다른 역사적 평가들과도 동일한 것이다. 조선시대 어떤 사료에서든 영남은 가장 찬양받는 곳이었다. 정약용은 그 다음으로는 호서, 즉 충청이 좋다고 했다.
(자료; 택리지, 이중환 저, 이익성 옮김; 2007년 을유문화사)
그러나 전라도에 대해서는 완전히 판이한 평가를 하고 있다. 전북 남원 출신의 김환태는 <해소냐 호남독립이냐> 128페이지에서 정약용마저 호남은 풍속의 질박함이 없어 뛰어난 가문이 서넛밖에 없다고 악평했다며 분개하고 있다.
어찌 분개할 일이겠는가. 실제로 전라도에서 살아 가장 전라도를 잘 아는 정약용이 전라도의 풍속에 대해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그냥 그저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인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그저 진실의 기록일 뿐이다.
4. 순암 안정복의 전라도 평
안정복은 그의 저서 임관정요 풍속장에서 팔도인의 인성 특징에 따른 교화방법을 이렇게 서술한다.
자료; 김환태, <해소냐 호남독립이냐> 127페이지
역시 전라도는 거짓 성실한 척한다는 등 기교를 부리고 진실되지 못하다는 평가가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라도가 거짓되고 사람을 속이는 일에 능하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5. 외국인 선교사들의 전라도 평
그럼 외국인 선교사들이 본 전라도는 어떤 지역이었을까. 다음은 샤를르 달레가 저술한 <조선교회사 서론> 1966년판 240페이지의 내용이다. 이 책은 천주교에 대한 조선의 박해가 시작되었던 1593년부터 마지막 박해가 끝나던 1871년까지 약 280년간의 선교 과정을 모아 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판된 저서이다. 이전에는 우리나라를 전혀 알지 못했던 여러 프랑스 성직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경험을 모아 편찬한 귀중한 자료이다.
북쪽의 두 도, 특히 평안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은 매우 적고 따라서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들을 왕정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정부는 그들을 소중히 다루면서도 엄중히 감시하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노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반란이 일어나는 날에는 진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황해도 사람들은 옹졸하고 융통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매우 인색하고 신의가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경기도, 즉 수도가 있는 도의 주민들은 경박하고 지조없고 사치와 쾌락에 빠진다. 전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들이다. 조선사람들의 야심, 탐욕, 낭비, 사치 등에 관한 우리가 앞서 말한 것이 특히 들어 맞는 것은 그들이다. 거기에는 높은 벼슬차치와 양반과 학자들이 매우 많다.
충청도 사람들은 모든 점에서 경기도 사람들와 비슷하고, 그 정도만이 보다 적을 뿐 그들의 장단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전라도에는 양반이 적다 그 주민들은 다른 조선사람들로부터, 버릇없고 위선적이며 자기들의 이익만 구하고 덕만 볼 수 있다면 언제고 가장 타기할 만한 배반행위도 서슴지 않고 할 사람들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경상도는 성격이 딴판이다. 그 주민들은 훨씬 수수하고 풍속의 부패가 덜하고 구습은 보다 충실히 지켜지고 있다. 사치도 적고 엄청난 낭비도 적다. 그러므로 조그만 유산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같은 집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상속되어 간다. 문학연구는 다른 도보다도 왕성하며, 흔히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들에서 일한 뒤에 밤에는 늦도록 글을 읽는다. 신분 높은 여자들도 다른 도에서처럼 엄중하게 갇혀 있지는 않다. 그 여자들은 낮에 계집종과 함께 외출하지만 아무런 모욕도 아무런 실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불교, 즉 석가모니의 종교가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경상도이다.그들은 그들의 미신에 매우 집착하여 개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번 기독교도가 되는 날엔 그들의 신앙은 끝내 단단하여 변함이 없다. 이 도에 매우 많은 양반들은 거의 다 남인에 속하고, 이 역사책에 자세히 적어 놓은 마지막 혁명 이래로 현관과 공직에 참여치 못하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전라도 역시 대단한 악평으로 일관되어 있다. 다른 역사 기록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고 침뱉고 버릴 배반행위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라고까지 한다. 도대체 더 이상의 나쁜 평가를 생각할 수는 없을 만큼 전라도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배신하고 믿을 수 없는 인성에 대해서 그러했다. 그러나 경상도에 대한 평가는 조선 팔도 그 어느 지역과 달리 극찬의 연속이었다. 경상도에 대한 극단적인 호평과 전라도에 대한 극도의 악평은 역사서 그 어디를 보더라도 동일한 기록들이었다.
5. 조선 전기 전라도에 대한 평판
1. 세종대왕의 전라도 평가
이런 전라도에 대한 평가는 조선 전기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조선조 최고의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은 전라도에 대해 산수가 배치하여 쏠리고 인심이 지극히 험하지만 인심이 험악하다고 억지로 편복을 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89권, 22년(1440 경신 / 명 정통(正統) 5년) 4월 4일(을해) 2번째기사이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sjp
편복을 가한다는 것은 곤장으로 두들겨 팬다는 말이니, 인심이 험악하다고 억지로 두들겨 팬다고 될 일도 아니라는 의미는, 이미 세종대왕도 전라도에 대해 극히 좋지 못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2. 성종대왕의 전라도 평가
아래 자료는 송정현, <호남지방의 역사적 낙후 원인>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의 일부이다.
성종대왕이 전라도의 인심에 관하여 하문하며 맹현과 이극기의 답변하고 성종이 대답하는 말들이다.
전라도는 인심이 박악하여 떼도적이 일어 나고 하극상의 풍조가 있으며, 풍습의 교화를 위해서는 백년이 아니면 고칠 수가 없는 정도라고 했다.
또한 전라감사로서 전라도를 직접 다스리고 겪었으며 예조판서를 지낸 이극돈은 성종 13년 임금에게 전라도의 풍속을 이렇게 전했다.
도내의 인심이 강한하며 토호들은 무뢰지도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어서 범죄자들의 종적을 수사관이 쫒아 가도 무뢰지도들이 숨겨 주어 잡을 수가 없는 곳이 전라도라고 한다. 전라도의 인심과 인성, 기풍이 매우 좋지 못함은 대단히 일관된 평가였다.
또한 당령 전미는 성종대왕에게 전라도의 풍습에 대해 이렇게 상소했다.
도적은 악질이며 세간에서 호남에는 절도는 없고 강도만 있다고 하며, 귀신을 숭상하고 정조관념이 박약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일이 허다하고, 저축의 관념이 희박하여 풍년에는 서리를 다하나 흉년에는 유리걸식하며, 하극상의 풍조가 심하다고 한다. 게다가 이러한 일은 타도에는 없고 오로지 전라도에만 있는 풍속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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