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놈과 함께 달린 324km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비로소 성인이 된 아들놈, 현근이. 2월 23일(일)에 그 애와 함께 드라이브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건 제가 제안한 것이 아니고 아들놈이 먼저 제안했습니다. 전 일요일을 맞아 스키장에 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아들놈이 먼저 "오랜만에 드라이브나 가 보자."는 소릴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라이브라? 스키장에 안 가고???'
올 겨울엔 Serious skier라고 자처하는 제가 스키장에 가 본 것이 채 스무 번이 안 됩니다. 처음있는 일입니다. 작정을 하고 안 간 것도 아닌데, 이상스레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시즌 말에도 남들(serious skiers)보다 일찍 스키를 접었었는데, 올해도 그런 것 같습니다. 스키에 대한 열정이 식었는가? 아닙니다. 전 좀 살벌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스키를 하나의 전투(戰鬪)로 생각하고, 공략할 대상을 찾아 목표를 세운 후에 시즌을 보내는데...
지난 시즌엔 목표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이번 시즌에도 목표를 정했었습니다. "카빙 숏턴(carving short turn)을 잘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카빙 숏턴에는 1단계와 2단계가 있는데, 전자는 기존 숏턴 기술의 완성이고, 2단계는 새로운 형태의 숏턴입니다. 제가 목표로 했던 것은 1단계였습니다.(참고: [기술] 3개의 동영상으로 비교하는 카빙 숏턴의 변천)
입춘(立春)이 지난 지 오래이나, 아직 이번 시즌은 다 가지 않았습니다. 길게 보면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게서는 이 시즌이 빨리 지나갈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유는 목표를 이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즌엔 "목표를 초과 달성했기에 홀가분하게 시즌을 접노라!"고 선언하고 남들보다 먼저 접었습니다. 근데 올해는 다른 시즌의 반도 못 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목표하던 숏턴, 그게 제가 정한 수준의 것이기에 남들이 보면 '겨우, 그 정도?'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으나 제가 정한 정도의 수준은 능가하게 그걸 해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생각한 것이 카빙 숏턴의 1단계였는데, 어쩌다 보니 좋은 스키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2단계까지 끝을 내 버렸습니다.(참고: [리뷰 및 시승기] 02-03 로시뇰의 9S 월드컵(WC) 회전 경기용 스키)
아직 봄이 오기 전인데 스키에 대한 생각은 그다지 강렬하지 않습니다. 아직 몇 번 정도 더 스키를 탈 일이 있겠지요. 특히 다음 시즌용의 대회전 스키를 이미 선 본 바 있는데, 그걸 더 타 보기 위해서라도 스키장에 몇 번 더 가야지요.(참고: [리뷰 및 시승기] 로시뇰의 03-04용 대회전 계열 삼총사 - 9X, 바이퍼 X, 9DOX)
어쨌건 아들놈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고교 시절에 바빠서 함께 드라이브를 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드라이브를 떠났습니다.(집사람은 지난 금요일부터 휘닉스 파크로 스키 훈련(준강사 시험 대비)을 떠났고, 월요일 저녁에나 돌아오기로...)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결정을 했습니다. 다시 갔던 길, 눈에 익은 길을 가기로 한 것입니다. 철원행. 제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입니다. 아주 많이 가 본 길. 지난 가을 아버지와 함께 했던 드라이브 코스입니다.(참고: "태풍전망대"로의 드라이브) 아버지와 함께 갔던 길을 이번엔 아들과 함께 가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올림픽 대로에 들어서서 생각하니 강북강변로를 택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유는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 가려면 그게 더 낫거든요. 아들놈과 호젓하게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럴 때 생각나는 호텔이 스위스 그랜드호텔입니다. 양화대교를 건너 연신내 쪽으로 가다가 보이는 산속에 있는 작은(?) 호텔. 전 그곳에 많이 가 봤는데, 전에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가 그 호텔의 노조원들이 데모를 하고 있어서 그냥 나온 적이 있고, 그 후에는 딸내미 지연이와 함께 드라이브를 할 때 한 번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의도 부근에서 양화대교 쪽으로 가는 길을 탔습니다. 가면서 그 호텔이 힐튼으로 개명을 했다는 게 생각났습니다.((현재의 힐튼호텔 사진)
아들놈과 함께 조식 뷔페를 했습니다. 요즘 애들 이런 뷔페 음식을 좋아하지요. 현근이도 남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작년인가 182cm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좀 더 큰 것 같습니다. 전엔 저처럼 말랐었는데 지금은 체구도 건장합니다. 그러니 잘도 먹지요. 그 놈이 먹는 걸 보면 정말 하품할 정도로 많이도 먹습니다. 그날도 꽤 먹더군요. 조식이라 주방장이 잘라주는 스테이크가 없는 게 유감이라면서 이거저거 어찌나 잘 챙겨 먹던지... 맨 마지막엔 커피도 마셨습니다. 어릴 때야 커피를 마실 일도 없었고, 주지도 않았지만 그 놈이 자라서 커피를 마실 나이가 되니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대견스럽습니다. 호텔에서 나오며 물어 보니 스위스 그랜드 호텔이 힐튼호텔에 넘어간 것이 1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랜드 힐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고, 그곳에 커다란 컨벤션 센터가 생긴 것이 가장 큰 변화이더군요.
그곳에서 나와 강북강변로로 가지 않고, 북가좌동 쪽으로 핸들을 틀었습니다. 아들놈이 상암동의 월드컵 축구경기장을 못 봤다고 하여, 지나는 길에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길 거쳐서 강북강변로로 접어들었고, 계속 달려 일산 방변으로 향했습니다. 일산 즈음에 이르렀을 때 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일산 정발산 위의 아름다운 주택단지를 구경시켜 드리던 생각이 나기에 아들놈에게 거길 가 보자고 하니 "오늘은 시간도 많은데, 다 들려 보는 거지 뭐...^^"하기에 그러자고 했습니다.
아들놈 눈에도 그 집들이 예뻐 보인다고 합니다. 그 집값이 얼마나 하느냐는 얘기도 하고, 집은 좋아 보이는데 집앞에 서 있는 차들 중에 외제차는 안 보인다는 얘기도 하더군요. 이 놈이 생각할 때 그런 예쁜 집이면 부자들이 사는 동네고, '부자라면 외제차를 탈 것이다.'라는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거길 돌아보는 중에 3대의 외제차를 보긴 했습니다만...) 그 주택 단지의 집들은 예쁘기는 한데, 단점이 집에 주차장이 딸려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차들이 길 양편에 서 있습니다.
- 정발산 주택단지 구경을 하고, 거길 떠나기에 앞서서 어느 집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정발산에서 나와 일산 자유로로 접어들기 전에 아들놈이 호수공원에 가 본 일이 없다고 하여 거길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 호수공원 주제광장에서...
호수가 멋지고, 운동하기 좋겠다는 얘길하더군요. 하긴 일산 시민들은 복 받은 분들입니다. 그처럼 멋진 호수를 시민의 재산으로 가지고 있으니...(그날 저녁 아들놈과 함께 TV 뉴스를 보다가 호수공원이 배경으로 나오는 걸 보며 즐겁게 함께 웃은 일도 있습니다.)
자유로로 접어들어 임진각까지 계속 달렸습니다. 바로 임진각을 향하지 않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민간인이 갈 수 있는 도로의 마지막 지점까지 갔다가 거기서 임진각 앞을 거쳐서 문산 방면으로 향했고, 중간에 적성으로 향한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들놈은 아직도 어린가 봅니다. 어릴 땐 차만 타면 잠을 잤고, 크면서 잠이 줄어들긴 했는데, 임진각을 지나면서 졸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원래는 태풍전망대에 이르면 깨우겠다고 했으나, 전 방앗간에 들르는 참새처럼 율곡의 유적지인 화석정을 향했습니다.
- 다시 화석정에...
화석정. 제가 너무나도 많이 들른 곳입니다. 항상 가던 길 중간에 들르는 곳이라 그곳에 와서 장시간 머무른 적은 없으나 가족 넷이 온 일도 있고, 딸내미 지연이와 둘이서 온 적도 있고, 아버지를 모시고 온 적도 있고, 혼자 온 적도 았고, 아는 사람들과 함께 온 적도 많은 그런 곳입니다. 이제 아들과 둘이 이곳에 온 것입니다.
- 제가 몇 개의 사진을 더 찍는 동안 현근이는 먼저 밑에 내려갔는데, 그곳을 걷고 있는 걸 보니 지금은 세상에 없는 딸내미 생각이 나더군요. 현근이가 있는 바로 그 자리 부근에서 지연이가 녹차를 마시고 있던 생각이 났습니다.(위의 사진을 클릭하면 2000년 11월 13일에 쓴 글에 나오는 화석정의 지연이 모습.)
잠시 아름답게 채색된 옛일들이 몰려왔지만 그게 슬픔으로 바뀌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화석정 아래의 도로를 달려 적성 방면으로 달렸습니다.
- 가다 보면 이 부근에서 가장 큰 유원지라는 폭포어장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진의 오른쪽이 폭포어장 정문.
철원은 잘 알려진 철새 도래지입니다. 그 길을 달리다 보면 많은 철새들이 그 부근을 지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 보면 입시철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 보입니다. 재미있는 플래카드들입니다.
그 부근의 주민들이 내 건 자랑스런 플래카드들입니다. "원유성 씨 장남 원윤재 군 고려대학교 합격," "유홍열 씨 장남 유재우 군 서울대학교 합격." 요즘 대학가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 마을에서 대학에 가는 사람이 나오면 이렇게 온 주민이 나서서 축하해 주는 것입니다. 넉넉한 시골 인심을 잘 알 수 있는 훈훈한 광경입니다.(연변 동포들의 경우는 천재들만 들어간다는 북경대에 동포의 자제가 합격하면 자치주에서 그걸 축하해 주는 행사도 한다는 얘길 몇 년전 연변에 갔을 때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디서나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듯 합니다.)
가다가 삼팔선을 만났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탱크가 내려온 것이 철원평야인데, 아들놈과 전 그곳을 향해 가는 중이었습니다. 종전(終戰)이 가까웠을 때 아군(我軍)이 북진(北進)에 성공하는 바람에 삼팔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가고 그렇게 휴전선이 그어졌기에 철원이 아직 먼 그곳에 이같은 35도 선 표석이 서게 된 것입니다.
전엔 그곳을 지나면서도 거기가 38선인 것을 몰랐기에 이상하다 싶어서 그 표석 아래 글을 보니 그것이 월드컵 4강을 기념해서 세운 것이더군요. 그 표석은 부근의 부대(한 연대)에서 세운 것인데, 이곳의 정류장 이름이 연대앞이더군요.(연세대 앞이 아니고, "聯隊앞"이었습니다.^^)
달리다 보면 워낙 많이 가 본 곳들이라서 눈에 익은 곳이 많습니다. 하지만 항상 가는 길이 큰길만 따라 가는 일정한 것이라 이정표에 나오는 눈에 익은 지명의 동네나 유적지가 궁금하기 마련입니다.
다행히(?) 아래 이정표의 장남과 전동리는 전에 길을 잘못 들어서 가 본 일이 있는데, 항상 궁금한 곳이 경순왕릉입니다.
이제는 같은 길을 드라이빙하면서 자주 지류를 택해 새로운 곳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하곤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결국 그 궁금해하던 경순왕릉에도 가 볼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제게 왜 가보지 못 한 많은 곳을 두고 똑같은 길을 여러 번 가느냐고 묻곤 합니다. 글쎄, 저도 안 가 본 곳을 많이 가보고 싶긴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차로 하루에 갈 수 있는 많은 곳들을 제가 이미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그건 스포츠 카를 가지기 전에 이미 많이 해 본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 봤던 코스를 다시 달리는 일이 생겼고, 그런 일의 반복에서 새로운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 즐거움이란 여행의 즐거움을 동반한 "순수한 드라이빙 그 자체로부터 얻는 즐거움"입니다. 달려 본 길을 또 가는 것이므로 새로운 것을 보는 즐거움은 적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처음 가는 길이 아니니 여행 그 자체보다는 운전에 더 집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긴 저의 철원을 돌아오는 코스는 대략 운전 시간만 8-9시간 정도가 걸리는 길이므로 운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중노동에 속하는 일이 됩니다. 그 장점은 갔던 길을 되가는 것이라 눈에 익어 안전한 길이 되고, 그 중에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것을 문득 다시 보게 되거나 위와 같은 새로운 변화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 등이라 하겠습니다.
가다 보니 위와 같은 플래카드도 보입니다. "인삼 절도범 검거자 200만 원 포상금 지급"이라니??? 인삼 절도가 행해지고 있는가 보죠? 거기가 금산이나 풍기나 강화도가 아닌데 무슨 인삼이 있고, 또 다른 절도 행위도 아니고 인삼 절도라니???
위의 플래카드를 본 이후에 전에 없이 많은 인삼밭들이 눈에 띄더군요. 눈에 보여서 알게 되는 것도 있지만, 아는 순간부터 더 많은 게 보인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유한전이 갈파하였듯이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곳 일대가 최고로 유명한 인삼, 개성인삼의 유명한 재배지이더군요. 개성이라면 북한 땅인데... 그곳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있는 곳입니다. 플래카드 밑에 적힌 걸 봐도 개성인삼조합니다. 그 조합이 북한에 있는 게 아니고, 이 부근 인삼조합의 이름이겠지요? 개성이라... 먼 곳 같은데, 머지 않은 곳입니다.
- 길옆 밭에 검정색 햇빛 가리개를 씌운 게 다 인삼밭이었습니다. 멀리 산에 그런 인삼밭이 있기도 했고...
그리로 가다 보면 곡창 철원에 가깝게 가는 것이라서인지 아니면 요즘은 농촌에서는 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트랙터 등 농사용 중장비가 많이 보입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 부근에는 기껏 경운기인데, 이곳에서는 큰 농기계들이 보이는 걸 보면 그 농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됩니다. 철원의 경우는 민통선 이북에 수 만 평의 논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거든요. 하여간 이처럼 북쪽으로 많이 올라오면 영농의 규모가 큰가 봅니다.
전엔 큰길을 벗어나 한 번 가 본 곳이 왕징리의 곁가지 길이었습니다. 괜히 '저긴 뭐가 있을까?'해서 달려가 봤는데, 길을 따라 계속 달려간 곳의 끝이 민통선이고, 큰 부대가 그걸 막고 있더군요. 그 후에는 태풍전망대란 팻말을 보고 또 곁으로 벗어나 멋진 안보관광(?)을 했고요.
이번엔 전부터 이정표에서 보아 오던 "석장리 조각공원"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이 깊고 깊은 북쪽의 산골짝에 웬 조각공원인가?'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큰 길에서 많이 들어간 곳에 조각공원이 있더군요. 알고 보니 그 공원은 99년에 처음 열린 "민통선 예술제"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더군요.
석장리 조각공원에서 많은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예술가를 말할 때 위대한 예술가, 평범한 예술가 등의 표현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예술가는 다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예술작품을 보면서 그걸 만든 사람의 위대성을 반추해 보곤 합니다.
- 조각공원 내의 까페.
- 입장료를 내는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금함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무료입장은 사절합니다."라는 있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문구도 보이긴 합니다만...^^
- 마치 지구를 끌어안고 있는 나약한 존재의 표상 같습니다. 작가가 무슨 의도로 저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작품으로부터 받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작가들은 관람자의 그 다양한 느낌을 사랑할 것이니까요.
- 왠지 뛰어야만할 이유를 가진 사람의 모습 같습니다.
아래는 석장리의 어느 목장의 모습입니다. 소를 키우는 목장이라면 영화 Big Country에 나오는 것처럼 광활한 목장을 상상하지만 실제로 우리 나라에는 그런 목장들이 적지요. 대관령의 삼양목장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런 콘세트 건물에 많은 젖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요.
거기서 계속 달리니 백학리 저수지가 나옵니다. 낚시로 유명한 곳이지요. 겨울철 낚시 등에서 있을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는 플래카드가 보입니다.
거기서 더 달리다 보면 유명세를 지니고 있음직한 순대국집이 나옵니다.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집이지만 여길 지날 때마다 개성이 멀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간판에 나오는 대로 "여기서 개성까지 39km"이니까요.) 그리고 '개성이 순대로 유명한 고장인가 보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간판에서 얘기하는 대로 "순대 자시러 개성"까지 갈 이유가 없을 만큼 여기서는 순대국을 잘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간판입니다. 그리고 간판을 만든 품새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런 시골구석에 서 있음직한 간판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세련된 간판입니다. 언제 한 번 거기서 순대국을 먹어봐야겠습니다.
가을날의 드라이브에서 찍은 동영상이 있었지요.(참고: 가을날의 드라이브 동영상 - 1) 그와 같은 장소에서 찍은 또 하나의 동영상입니다. 그 늦가을에서 바로 접어든 겨울의 끝자락에서 찍은 것이라 세월의 흔적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풍경은 변해 있습니다.
"태풍전망대"로의 드라이브란 글의 일부로...)
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군남리를 향하기 위해 중간에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바로 화이트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지난번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건넌 것이 차로 이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기회였더군요. 다리가 안전등급 E급으로 판정이 나서 이제는 콘크리트 블록으로 완전히 폐쇄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이렇게 변화가 있더군요. 이제는 전과 같은 드라이브 코스를 택해도 일부러 오지 않는 한 이 장면을 보게 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화이트 다방이 있는 삼거리에 이르기 전에 우측으로 새로 난 길을 통해 가게 될 것이므로... 짧은 시간의 흐름이라도 이처럼 영원한(?)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이 왠지 섭섭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 폐쇄된 화이트교.
그런 아쉬움을 안고 다시 길을 갔습니다. 그곳에 처음 와 보는 아들놈에게는 6.25때의 그 다리에 관한 얘기를 하고, 지난번에 그 다리를 건넜다는 얘길했지만, 별 무감동이더군요.^^; 경험의 차이가 감동, 혹은 관심과 무감동이나 무관심을 가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가을날의 드라이브 동영상 - 2에서와 같은 장소에서 역시 동영상을 찍어 보았습니다. 그게 아래의 동영상입니다. 군남면의 어느 도로를 달리면서 찍은 것이지요.
- 신탄리역 역사 건너편의 가정집 앞에 세운 "일일 안보관광 안내도"입니다. 클릭하면 아주 큰 사진이라 거기 적힌 글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부근에 가볼만한 곳이 참 많습니다.
전에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면서 필리핀처럼 군도(群島), 즉 아어커펠러고우(archipelago)로 이루어진 나라의 매스컴의 역할에 대해 배운 일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섬들이고, 방언(dialect)이 많아서 골치라는 나라. 그래서 그런 곳은 민족의 통합(integration)을 위해서 라디오 방송에 의지하는 바가 크지만, TV 시대에는 문제가 있다는 얘길 들었지요. TV 전파처럼 멀리 닿지 못 하는 경우에는 위성방송밖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비교적 작은 데도 대표 문명으로서의 TV 전파가 잘 안 닿는 곳들이 아직도 있고, 휴전선에 가까운 이곳이 그런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역시 위성방송이 답이더군요. 드라이브를 하는 내내 아주 많은 스카이라이프 광고를 보았습니다.
- 매스 미디어의 시대. 위성 방송이 비로소 그 혜택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시대.
신탄리를 떠나면 곧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의 경계가 나오게 됩니다.
- 경계. 이곳을 지나가다 보면 '경기도가 과연 얼마나 큰 지방인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먼 곳까지가 경기도라니...
- 역시 철원평야는 철새도래지.
가면서 많은 철새들을 봅니다. 진짜 철새 도래지는 민통선 너머 월정리역 근처에 있지만 노동당사 삼거리로 향하는 길목에서도 많은 철새들이 보입니다.
거기서 좀 달리면 항상 으스스한 느낌의 골조 잔해가 나타납니다. 바로 노동당사. 거길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 나라를 제외한 전 세계에 별 의미가 없는 이데올로기. 아직 우리만 그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바보짓을 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멍청함의 기념비"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런 Foolish and Reckless March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구 철원(鐵原)의 동송리를 향하다 보면 아름다운 지명(地名)을 가진 월하리가 나옵니다. 달빛 아래 그 동네만 있는 것도 아닌데...^^ 철원이 평야지대이고, 그곳 구 철원 동송리가 그 곡창의 중심임을 증명하려는 것인지 거기엔 방앗간도 많고, 미곡처리장도 많습니다. 그 유명한 철원 오대쌀을 만드는 곳입니다.
거기서 제가 군대 말년에 근무한 곳 동송리를 향하면 지금은 이름조차 잊은 저 앞의 설산이 보입니다. 그 산 아래에서 군대 말년의 기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된 채로 전 미래학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지요. 저의 미래에 대한 공부가 아니고, 진짜 학문으로서의 미래학(Futurology)에 심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에 아들놈과 함께 가고 싶었는데, 이 놈은 별 관심 없어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냥 그렇게 철원을 지나 왔습니다. 이젠 제가 별관심이 없는 길들입니다. 포천을 지나 의정부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 만세교 삼거리.
- 포천.
포천을 지날 즈음, 이미 7시간이 넘는 징한 드라이브를 한 아들놈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깨울 필요도 없겠기에 그냥 재웠습니다. 그러다가 의정부를 지나오면서 잠에서 깨었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하나의 금기(禁忌)를 깼습니다. 왠지 그러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금기는 지연이가 우리 곁을 떠난 후 그 애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러자고 말한 바 없고, 누구도 그런 약속을 한 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 강한 묵계(默契)로 마피아의 침묵의 약속처럼 지연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슬픔과 형태는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누나를 잃은 이 아이가 가진 슬픔 역시 크고, 깊을 것이 분명합니다. 언젠가 그걸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그게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들춰내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지 못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현근이와의 특별한 여행에서 왠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누나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들만 가지기로 하자. 아빠가 너나 누나에게 너무 엄했었던 걸 난 후회한다. 다시 연이를 만날 수 있다면 그랬었던 걸 그 애에게 속죄하고 싶다. 하나님이 야속하다. 연이는 그처럼 열심히 교회에 나갔었는데 왜 데려 가셨는지... 다시 한 번 그 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나의 굳은 믿음으로 가져야 한다는 말을 주위에서 하지만 난 그런 깊은 신앙이 없어서 그게 믿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누나와의 갑작스런 헤어짐으로 괴롭겠지만 슬픔은 시간이 가면 잊혀진다. 경감된다. 내가 형을 잃었을 때도 그랬다. 한동안 슬펐다가 아주 오랜 시절이 지나니 어쩌다 한 번 생각이 나면 '아, 형이 살아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하는 아쉬움이 일다가 이내 그것도 잊혀지더라. 이제 넌 머지않아 네 뇌리에 살아있는 누나나 나, 그리고 엄마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이 될 수 있는 네 여자친구를 가지게 될 것이고, 또 결혼을 해서 네 가족을 이루게 될 거다. 지금이야 그럴 리 있겠나 싶지만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고 그건 당연한 거다. 하여간 지나간 일은 아름다운 것들만 남기고 그걸 슬픔으로 기억하지는 말자. 그리고 지연이가 없더라도 연이에 대해 얘기하는 걸 겁내지 말자."
그런 얘기들이었습니다. 언젠가 하고 싶었던 얘기... 현근인 그에 대해 열심히 들었지만 그에 대한 답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동의(同意)했던 것입니다.
먼길, 324km를 함께 달려 준 차가 먼지에 덮여 있었습니다. 전날 왔던 비의 흔적들 때문에 진창길을 달리기도 했었기에 여기저기 진흙이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 세차를 하는 세차장에 들러 둘이 열심히 차를 닦아주었습니다.
전 이 담에 이 아들놈이 자기애를 데리고 저와 함께 한 것과 같은 여행을 하게 되길 빕니다. 부자가 함께 하는 여행, 평소에 하지 못 하고 살던 얘기를 많이 하는 그런 여행을... 그 놈에게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비극(悲劇)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