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90년대 후반...
가족끼리 뽑은지 얼마 안된 애마 소나타3을 가지고 바닷가로 놀러갔는데 주차장은 제대로 된 곳이 당연히 없고
이미 다 차있었고 많은 차들이 해변가에 내려와서 주차할 수 있게 된 곳 이었습니다.
저희 가족도 차를 세워놓고 갯뻘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저희 가족은 서해안 조수간만 차의 무서움을
미처 몰랐고, 멀리 나갔다가 이제 돌아가야겠다 싶었을때는 이미 왔던 길이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쪽의
산등성이로 기어 올라가 우회해서 겨우 원래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되돌아와서야 우리 차 생각이 났는데 이미 주차해놨던 곳은 물에 잠겨있었고 차는 온데간데 없더군요.
차를 절반쯤 침수시킬 정도 수위였는데 이 정도에 차가 벌써 떠내려가버렸나 싶었는데, 허망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술 거하게 하신듯 어떤 얼굴 빠알간 아저씨 한분이 오셔서 거기 진녹색 소나타3 너네 차 맞지? 저기 가면 위에 있다...
하시는 거였음
가보니 정말로 우리 소나타3을 누가 저만치 멀쩡하게 옮겨놨습니다.
차 문, 창문 제대로 다 잠궜고 사이드 브레이크 다 채우고 키는 아부지가 갖고 계셨는데 차는 누가 건드린 흔적 하나
없었고 그렇다고 해변의 상인들이 공짜 견인차같은걸 사서 운행하는것 같지도 않고 차 안에 있던 소지품, 어무니 지갑,
현금 등 사라진거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누군가가, 침수차가 될 뻔한 우리 소나타3을 감쪽같이 옮겨주기만 하고는
사라진겁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그 아저씨한테 혹시 아저씨가 옮겼냐고, 어떻게 옮기셨냐고 물어봤는데 그 아저씨는 술냄새 풍기며
본인이 한건 아니지만 차 옮기는거 그거 뭐 어려운거 아녀 하면서 껄껄 웃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이후에 우리 소나타3은 약 이십여년간 잔고장 한번 없이 잘 타다가 재작년즈음 폐차했습니다.
작년, 서른이 넘은 늘그막에 뒤늦게 면허를 땄고 보배에서 그렇게 대차게 까이던 슴육을 디자인만 보고 인생 첫차로
질렀는데 예쁜 차를 샀더니 진짜로 예쁜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
지난주말 여자친구랑 가까운 바닷가에 놀러갔다왔는데 잠깐 해변가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갯뻘에 홀로 내버려져있었던
선착장이 밀물에 순식간에 잠겨버리더군요.
바닷가를 볼 때마다 문득, 이십여년전 순간이동한 우리 소나타3과 빠알간 얼굴의 아저씨가 생각납니다.
아저씨 헐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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