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에 이미 올려준 자료다
이면박의 요청에 의해 이무길님의 녹취글을 분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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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주를 연행하여 보안대에 이첩하고
증언자 : 이무길
생년월일 :
출생지 :
성장지 :
학력 : 대졸(전남대 농대)
당시 직업 : 광주시 시청 사회과 주사
현재 직업 : 시청에서 퇴직 후 해양도시가스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다 퇴직
채록일자 : 1998년 6월
주요 활동 : 이무길씨는 80년 당시 시청 직원으로 1. 전옥주를 연행하여 계엄군에 이첩했던 당사자이고 2. 정시채 당시 부지사가 구속되고 문창수 시장, 구례군수등 고위 공무원이 연행될 상황을 방어한 활동 3. 5월 27일 이후 시체등 수습활동을 하였으나 의문점은 전옥주씨 연행부분에서 전옥주, 차명숙씨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음.
이 : 내가 벌써 18년전이니까 날짜가 아련하구만. 녹음은 하지말고 내가 이야기를 하는 걸 적었다가 이 문제는 좀더 소상히 알아야겠다고 하면 그때 가서 녹음을 해야지, 뭔가 체계적으로 이야기를 해줘야지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런 거 저런 거 다하면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여러분들은 몰라도 그 당시에는 나처럼 광주시청 공무원들 중에서도 시체 많이 만져보고 군인들도 많이 접촉하고, 이래불면(방아쇠 당기는 흉내) 가던 세상인데 나도 여러모로 과거에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것만 믿고 살았지만, 세상 인심이란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 당시에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드릴께요. 날짜는 어리벙벙하니까 녹음은 하지말고 내가 설명할 때 대충만 기록을 하쇼. 날짜를 잘 모른께.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고, 내가 무슨 기록을 남겨놓은 것도 아니어서.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제가 날짜를 정확히 기억을 못하니까 5.18 상황에 대해서 개략적으로만 말하겠습니다. 5월 들어서 전대생들이 굉장히 시청주위나 시내를 곳곳에 다니면서 최규하 대통령은 물러가라(당시에는 최돼지라고도 했고 낙자대가리라고도 했제) 그러면 나도 그당시 시청의 계장이었는데(전 : 당시 무슨과? 이 : 그때 사회과, 사회과 계장이었는데) 구용상?씨가 시장으로 있었고, 도청에는 도지사가 장형태씨고 부지사는 정시채고, 기획관리실장은 문창수씨였고 그분들이 도청에 가 계셨고, 그러니까 광주시청에는 시장이 구용상씨가 부시장은 돌아가신 정채준씨, 내가 보기에는 처음에는 학생들이 위주로 해서 데모를 한 것이다,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프랑카드 메고 시내 돌아다니고, 최규하 대통령이 외국순방을 하고 돌아와서 성과도 없이 외화를 낭비했다고 해서 굉장히 학생들 인식이 안좋았어요. 그래서 낙자를 삶아먹자고 그러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처음에 벽보가,...
처음에는 순수한 학생들이었다. 구용상씨나 장형태씨가, 문제는 처음에 순수한 학생들이 시작했는데 나중에 가서, 춘심인데? (전 : 예, 거기가 전춘심이죠.) 예, 내가 잡아가지고 그 여자 때문에 무지무지한 고통을 겪은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그 여자는 내가 수사관인줄 알아. 근께 그런 말을 잘못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고,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 여자가 5월 19일인가 될 것인디, MBC방송국이 불탄 날, 5월 18일인가 19일인가 저녁으로 기억이 나. (전 : 19일 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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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20일밤임. 여기서 부터 내리 서술 날짜가 계속 하루씩 틀리게 됨.
20일
21:40 MBC 방송국 방송국 전소
- 궁동 쪽에서 갑자기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불기둥이 솟구쳐올랐다. 대낮같이 밝은 불기둥, 아니 포항제철의 용광로 불길처럼 새빨간 불기둥이 문화방송국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시위군중들이 불을 지른 것이다.
이날 문화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은 오후 7시 뉴스에 계엄당국이 발표한 거짓투성이의 보도문이 나온데 대해 분개한 군중들이었다. 이날 전남북 계엄분소는 '친애하는 광주시민 여러분'으로 시작된 담화문을 작성해 도청 기자실과 지방 신문사, 지방 방송국에 보내 이를 보도토록 했던 것이다. 광주사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있었던 공식반응인 이 담화문의 내용이 문제였다.
"지난 18일과 19일 양일간의 소요진압 과정에서 연행된 학생과 일반인은 군에서 잘 보호하고 있으며 그중 가벼운 범법자와 잘못을 반성하는 일부 학생을 석방조치했으며, 나머지 학생에 대해서도 조사가 끝나는 대로 선별하여 추가 석방할 것이며, 소요 주모자나 범법행위가 지나친 학생은 엄히 처리할 것입니다."
계엄분소는 이 발표문과 함께 광주시 신안동 135의 14번지 한승철 씨 등 1백 67명을 석방했다고 그 명단을 공개하였다.
그런데 군중들은 시위를 했건 안했건 눈에 띄는 사람이면 무조건 두들겨패고 강제로 연행해 버린 상태에서 누구더러 소요 주모자요 범법자라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소요진압 과정에서 일부 부상 학생은 정성껏 치료를 받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중상자는 없읍니다'라는 내용이 시민의 분노를 샀다. 곳곳에서 두들겨맞아 중상자가 수두룩한 것은 물론 개중에 상당한 수의 사람이 희생당한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시민들이 사망자는 커녕 중상자도 없다는데 분개한 것이다. 그래서 계엄당국의 발표문을 그대로 방송한 MBC나 KBS가 거짓 방송을 했다는 것이 방화이유였다. 이날밤 역시 불에 탄 KBS도 같은 이유로 방화된 것이다. 5층짜리 방송국 건물이 활활 타고 있어도 속수무책이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 "시민들이 저녁 7시경 MBC 방송국 옆 금성센터에 화염병을 던져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 그런데 9시가 지나서 펑 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보니 MBC건물에 1층부터 4층까지 동시에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때는 시민들이 물러가고 난 뒤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MBC는 시민들이 방화한 것이 아니었다." (정현애,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증언)
* "공정보도를 하지 않는 MBC를 불지르기로 합의한 시위대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시민들이 MBC를 불지르려고 화염병을 던졌으나 불이 확 붙지 않아 셔터만 태웠다. 광주시민의 재산을 함부로 없애지 말자는 어떤 시민의 말을 듣고 시위대는 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MBC 방송국 건물 뒤쪽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시위대는 MBC 방송국 앞 도로에만 있었고 방금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기로 약속하고 셔터에 붙은 불을 껐는데 뒤로 가서 방화했을 리 없다. MBC 방송국 방화는 분명 공수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즉, 시위대는 방화시도 후 그냥 돌아갔는데, 갑자기 건물 뒤쪽에서 원인모를 폭발.
공작은 공수보다도 보안부대 공작원일 가능성이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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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 ...이 전춘심이가... 우리도 모르지. 말을 유창하게 잘 하더라고. 하여튼 말을 유창하게 잘해. 사실은 광주 5.18사건은 전춘심이 때문에 커져버렸다고 해도, (전 : 전춘심이가 그걸 끌고 다녔습니까? 그것을? (이 : 응,) 저도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춘심이가 그랬고, 시체 한구를 리어카에 끌고 다녔고,) 이 : 시체가 두구여, (전: 또 한구가 다른데 있었습니까) 이 : 하여튼 전춘심이가 시체 두 구를 끌고 다녔어, 으응.
이 : 어째서 내가 MBC 불탄 것을 기억하냐면 그당시에(전 : 저도 MBC타는 날 바로 앞에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도청에서 장동로타리까지 대치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날 나도 의협심이랄까, 불의를 보믄 못참는 성질이 있단 말여, 성격이랄까. 나도 공직생활을 한지가 30여년을 했는디 서기관?까지 하고 그만뒀는데 ...했는데... 애지간한 사람들은 몇사람은 내가 잡아가꼬 다시 돌려주기도 하고 그래. 지금도 내가 ... 그 당시에는 내가 한창때 아니라고,... 그날 19일, 그날 낮에 내가 우리 직원을... 조주사라고 하는데(이름을?) 군인들이 그날 낮에 금남로에서, 그냥 막, (전 : 19일이 제일 아마..)그리고 아마 그날 저녁에 불난 것일거여.(전 : 그렇죠.)그러자 부시장이 비서관은 아니었지만 뭔 어려운 일만 있으면 나를 불렀거든. 그러고 도에서는 관리실장 문창수는 내 학교 선배여. 내가 광주에서 국민학교, 서중, 광고, 전대를 나왔는데 내가 본토박이고 고향이 광주시 서동이란 말이여, (전 : 전대는 어디를 나오셨나요? 이 : 전대 농과대학. 광고9회, 서중32회) 내가 농대 다니다가 대표선수 올라가니라고 학교를 그만둬버렸제. 농대 3학년 다니다가, 그런디 구시장님이 와보라고 하드라고, ...직원을 ....것는디... 구시청장님이 접근을 해야 것는디 가믄 잡혀븐다는 거여, 잽히면 작살이 나불제. 긍께 일단은 나를 불러가고 금남로 요리 한 번 돌아봐라. 근디 그당시에는 차가 다녀, 뭐가 있어. 그래서 자전거로 한바퀴 쭉 돌아봤제. 도니까 그때 당시에 ....잡힌 건 다 학생이여.... 원폭작전이라고 하나, 다 대가리 처박고 패고, (전 : 원산폭격)다 두들겨 맞고, 그래서 이것이 세상이 말세다냐, 이것이 뭔짓이다냐. 그래가꼬 도청있는데로 들어왔단 말여. 상황을 쭉 보고 시청으로 다시 들어왔단 말여. 그리고 시장님한테 보고를 했제, 지금 상황이 이러요. 글고는 나는 나왔는데, 그날 오후에 굉장히 머리가 아프더라고 내가 안 잊어버리는게 내가 머리가 깨져불 정도로 머리가 아프더라고. 내가 퇴근 전에 바로 나와버렸어. 그리고 내가 집이 계림동에 살 때라 집에 가서 그당시 내가 4층 건물을 갖고 있었거던, 근무를 받을때거든. 집에 가서(감기도 아니었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파스를 여기다 붙이고 저기다 붙이고 그랬거든. 그리고 스르르 잠이든 거 같애. 깨본게 집사람이 옥상 위를 올라갔다 오더니 막 나를 깨우는 거여. 이제 막 난리가 났다는 거여, MBC가 타고 광주가 타고 난리여, 그래서 막 옥상에 올라가 보니까 옥상이라 훤히 보이제. 그 와중에 집으로 시장님 전화가 왔어. 내가 전화 하니까 빨리 좀 나와야 쓰것다, 그러자 그당시 내가 시청으로 가니까 구용상 시장하고 부시장하고, 집에 가도 10분 거린가 밖에 안될 거요, 그러다 보니까 그날 전춘심이가 시체를 끌고 다니고 난리가 난거요. 막 시민여러분, 우리 오빠를 이렇게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이래갖고 끌고다니고, 그날은 누군지도 몰랐고, 우리가. 시내를 한바꾸를 돌고, MBC를 돌고 그리 돌아서 지금 시청을 넘어서 공용터미널을 지나서 대인동으로 해서 MBC로 해서 세무서보고 그리고 바로 장동 로타리로 해서 돌아온 거지. 시체갖고 보고를 했지,
그때부터서 나는 어디가도 못했지, 시장이 딱 잡아노니. 그러자 나는 공무원이라도 공무원증 같은 거 안 가지고 다니거든. 근데 어떻게 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공무원증이 호주머니에가 있어. 근게 아마 우리 집사람이 넣어 놨는가벼. 근디 그 공무원증 땜에 살고 그랬어. 시장님하고 같이 저녁부터 계속 같이 돌아다녀는데, 한데 전춘심이가 어떤 제안을 했냐, 시장하고 지사를 지금 상업은행 앞에서 시민들하고 대화를 하게 해달라, 그런께 안나갈 수가 있나, 시장하고 지사하고. 그러자 나가 시장하고 지사하고(전 : 제안을 어떻게 했어요? 이 : 어쨌든 나오라고. 전 : 마이크로 하면서 이 : 어쨋든 나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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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21일 오전임.
21일
09:50 시민대표와 장형태 도지사의 협상
- 시위대들이 뽑은 시민대표 김범태 군(27. 조선대 법과 1년)과 전옥주 씨(32. 여) 등 3명이 장형태 전남지사와 도청 상공국장실에서 협상, 대표들은 도지사에게
1. 유혈사태에 대해 도지사가 공개사과할 것
2. 연행 시민, 학생을 전원 석방하고 입원중인 학생의 소재와 생사를 알릴 것.
3. 계엄군은 21일 정오까지 모두 시내에서 철수할 것.
4. 전남. 북 계엄분소장과 시민대표들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
- 장형태 지사 '군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다. 나머지도 책임지고 수락하겠다'면서 10시에 대표자 3명 돌려보냄. 그러나 분위기는 계속 고조(한때 시장 납치설). (월간조선, 1985. 7)
* "나는 협상대표자가 되어 대학생 1명, 시민 1명과 함께 도청으로 갔다. 도지사는 '나도 여러분 못지 않게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주둔하면 도지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요구사항을 말씀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시민들이 몹시 불안해 하고 있으니 계엄군을 철수하도록 해주고, 연행된 학생들과 시민들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 그리고 공정한 보도를 하도록 하고 계엄사령관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요구사항을 말했다. 도지사는 '12시까지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줄 테니 나가서 시민들을 제지해 달라. 그러면 5분 후에 나가서 시민들에게 사과의 말을 하겠다' 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시민들에게 협상내용을 말한 후 '아리랑', '선구자' 등의 노래를 부르며 도지사를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자 시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지사 대신 구용상 시장이 나와 인사말을 하려는 찰라였다. 시민들 틈에서 장갑차가 나타났다. 계엄군의 사격으로 장갑차에 탄 청년은 고꾸라졌다." (구술 : 전옥주, 현사연 조사)
(보안사 [광주사태 상황보고]에 따르면 [보안사 요원들은 21일 09:00 지하정보 활동을 전개]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곧이어 09:20 광천동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KM-900)이 탈취됨. 09:20 - 아세아 자동차 공장 APC 피탈.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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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처음에는 시청으로 오라더니 도청으로 오라고 했어요. 근께 그당시 장형태 도지사가 내가 68년도에 장지사님을 시장으로 모시기도 했거든, 장지사님도 나를 굉장히 믿고 자식같이 여기기도 하고 그랬는데, 헌데 도에서 연락오기를 시장하고 지사를 나오라고 한다 시청에서는 나하고 시장님하고 둘이 오라는 거여, 도청으로 갔는데 도지사실로 갔제. 그래서 지사님하고 같이 앉었지. 그 자리에 장지사, 정시채 부지사, 문창수 기획관리실장, 그다음에 범택규내무국장, 구시장하고 나하고 지사실에 앉았단 말이지. 금남로에 단상을 만든단 말이지, 상업은행 앞에다. 그당시 금남로가 딱 찬거여(전 : 그랬죠.) 그당시 단상을 만든단디, 거기서 지사하고 시장하고 나오란 말이여. 허면 그당시 군인들은 도청앞에 바리케이트를 쳤어, 장지사가 시장님한테....하니까 시장만 나간거지.
나가게 되니까 군인들이 못가게 하는거여. 그러니까 나하고 둘이만 가. 그러면 도청앞에 YMCA하고 상업은행 앞에 그 사이에는 완전히 비무장지대여, 아무도 없어. 그 거리를 나하고 둘이만 거기를 걸어가는 거여. 근디 군인들이 못가게 하드라고, 잡혀분다 이것이여, 잡혀불면은 카드가 되어버린다 이거여. 총부리 대놓고 어, 고위공직자가, 시장 잡아놓고 막 자기들 요구사항을 주면서,
그당시에 군인들이나 공무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불순세력이 있다, 그렇게만 생각을 했지. 그러나 내가 본 견지에서는 순수한 학생들인디, 근디 난중에 불순세력이 나타났는가 어쨋는가는 모르것는디 잘 모르겄지만... 우리를 도청앞에서 나와 그리 가는데 군인들이 못가게 해,
그래도 거기를 가야한다 죽어도 거기를 가야한다. 시민들하고 뭔 대화를 해야 뭔 이야기가 될 거 아니냐, 시장은 시민들에게 호소를 하기 위해서 나간 것이고 이자 그애들은 될 수 있으면 단상에서 구호를 외치면서 어떻게 반정부 구호를 할란가 그랬는지는 모르겄지만 그러나 하여튼 거기를 걸어가니까 막 단상에 올라갔다 이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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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21일
10:00
* "9시쯤 또 다시 김범태, 전남대 상대 3년 김상호(21) 등 4명의 남학생이 도청으로 들어와 현관에 서 있던 장지사를 만나 빨리 나와달라고 재촉하고 나섰다. 장지사는 도청 현관에서 고성능마이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대기중이었다.
이때 구용상 광주시장이 시위군중 앞에 나타났다. 도지사가 늦어져 욕설이 나오자 부하로서 조금이라도 상황의 악화를 막아보려는 듯 그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나와 자제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당신은 필요없어. 비켜요, 비켜' 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군중들이 도지사가 도착하지 않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때 대대장인 두 명의 중령이 필자에게 다가와 '빨리 지사님을 나오시게 해서 사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도 협상이 이루어지면 계엄분소장에게 건의해서 협의사항이 꼭 성사되도록 하겠읍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끝내 장지사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때 장지사가 시위군중 앞에 나왔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오지 못했다. 뒤에 이 일로 그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장지사의 출현이 늦어지자 군중들은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왔다. 공수부대와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그때 학생들은 카빈총과 쇠파이프, 식칼 등으로 무장한 후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앗아 온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오전 10시 10분 뒤쪽, 그러니까 도청 광장쪽에 있던 공수부대에게는 실탄이 지급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이때 사병 1명당 10발씩 지급되었다.
시위군중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졌을 때, 장지사는 도청 본관 3층 지사실 옆 복도에 있었다. 필자도 함께 있었다. 실탄이 지급되고 있는 광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10일간의 취재수첩)
(여기까지의 의혹.
20일 밤 시위대는 MBC 방화 시도 후 물러갔음에도 의문의 폭발사건.
시신을 리어카에 끌고다니며 시위를 선동한 전옥주의 등장.
자위권발동(집단발포)의 명분이 되는 수상한 소수의 칼빈 무장자 등장.
또, 주목해야할 사항.
보안사가 가지고 있던 2군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따르면, 5.21일 새벽 04:30에 계엄사 대책회의를 열어 자위권발동을 논의, 오전에 육본, 국방부를 방문해 [소탕계획(자위권발동)]을 건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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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전춘심이하고 나하고 셋이 단상에 있는거여... 조용히 하라고, 광주시장이 나왔다고... 그런께 말도 못했제, 근데 시장이 막 마이크를 잡을라고 하니까 시체가 단상 앞에가 두 구가 있드만. 거놈의 태극기를 제껴분께 시체가 얽혀있는거야. 그러니까 거기를 시민들이 봐분께 돌맹이가 우리한테 몰려드는 것이여. 그니까 나는 어쩔거여. 시장을 보호해야제, 그 시장을 보듬다시피하고 완력으로 보듬고, 시장신발하고 내 신발하고는 날라가불고 그 단상에서 뛰어내렸제.
그러니까 앞에는 최루탄, 뒤에서는 돌맹이 날라오지, 뒤에서 경찰은 뭐 그당시 경찰이나 있었나요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고 뭐 양쪽에서 이러저리 쏴분디 오만달싹을 못해요, 우리가. 그러자 내가 완력으로 보듬다시피 해가지고, 지금 어디냐면 금남로 카톨릭센타 사이로 들어가는거여. 막 밀치고 옆에 사람이 있어도 보듬고 그래가지고 중앙국민학교까지, 신발을 이미 던져불고, 옷이고 뭐고 다 찢어져 나가불고.
그래가지고 그리 나가서 광주경찰서 앞으로 해가지고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지, 뭐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다시 도청으로 들어간거지. 그런데 그때부터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지. 나라도 시민들하고 대화를 해야되는데 뭐 대화할 시간이 없제. 그래서 나는 20일날 그때 군인들이 지사하고 시장하고 헬기를 태워 선무활동을 한마디로 시민들에게 호소를 하기 위한다고 그렇게 한다 이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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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21일
10:30 도청은 철수준비를 서두르고
- 군헬기 4대가 도청, 조선대, 전남대에 이착륙하며 도청 지하실에 모아놓은 시체와 진압무기, 주요 기밀서류 공수 시작.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데모군중 장갑차 1대, 군 지프 4,5대 빼앗아. 도청 반경 5백 미터내에 군경이 사수하고 그 외의 천지는 완전히 무법지대. 광주시장, 데모군중 설득하려다 군중에 납치설. 변두리 지역 축제 분위기. 현재 2명의 시체를 리어커에 실어 태극기 꽂고 돌아다녀. (월간조선. 1985. 7)
- 장형태 도지사, 헬기에서 저공비행하며 선무방송.
- 도청 뒤쪽에서 실탄을 지급받은 3개 소대 가량의 병력이 맨 앞쪽의 병력과 교대. (10일간의 취재수첩)
11:02
- 작전지원 헬기 1대 용산 출발, 보안요원 3명 수송. 12:55 K-57(광주비행장) 도착 예정. (육군본부 상황일지)
13:25
- 헬기 이동보고
1. 보안요원 3명 수송
. 일시 : 용산 출발 11:02, K-57 도착 12:55
. 기종 및 대수 : UH-1H 1대
2. 작전지원 헬기 이동
. K-16 11:15, CAC 도착 13:10
. 기종 및 대수 : UH-1H 10대 (육본 상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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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나는 도청에 남아불고 나는 문창수 그양반과 정시채씨하고 셋이만 남은거여. 공무원들은 이미 다 도망가불고 나타나들 않고 방송만 하고 계속 이렇게 해도 안돼, 밑에서 저공비행을 하면 총으로 쏴불고. 그렇게 방송을 하고 "시민여러분 자제합시다." 이렇게 해도 그거이 될거요, 안돼지. 그러고는 시장하고 상무대로 들어갔던 것이제. 그 양반들은 거기가 있어분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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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상황임.
13:55
- 군용 헬기에서 '3시까지 연행자를 석방하니 귀가하라'고 선무방송.
14:00 월산동 로터리 헬기 기총소사
* "우리가 탄 차가 월산동 로터리에서 백운동 쪽으로 달리는데 도청 쪽에서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그 총에 맞은 여학생 한 명이 가로수 아래로 픽 쓰러졌다. 나는 얼른 차에서 뛰어내려 그 학생에게로 갔다. 어깨에서 피가 흘러 헝겊으로 팔을 동여맸는데도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학생을 차에 태워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 "도청 쪽에서 사직공원 쪽으로 이동하는 헬기에서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소리와 불빛을 내는 것을 봤다. 헬기는 지상 1백30미터 정도의 높이로 날아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동교(불로동다리) 주변을 향해 쏘았다고 들었다." (구술 : 조비오, 현사연 조사)
* "서석병원 담에 기대 있는데 양동 쪽에서 계림동 쪽으로 날아가는 헬기에서 총을 쏘며 지나갔다." (구술 : 김정기, 현사연 조사)
15:00
- 데모군중 발포행위
일시 : 5.21 15:00
장소 : 광주시내
경위 : UH-1H 1대가 시내상공을 비행중 데모군중의 대공사격을 받은 바 있음
피해 : 무
광주상공 저공비행 금지 요망 (육본 상황일지)
* "백운동 로터리로 시민들이 모여들자 헬기 1대가 나타나 저공비행을 하면서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귀가하십시오' 하는 선무방송을 했다. 우리가 헬기를 향해 사격을 가하자 낮게 떠 있던 비행기는 방송도 하지 않고 높게 떠서 날아갔다."(구술 : 구성주, 현사연 조사)
- 20사단 병력 헬기로 도청 투입 실패. (특전사 전투상보)
15:40
- 선무방송 헬기 방송중 대공사격으로 3발 관통. (전교사 작전일지)
* "방림동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전남대학 부속병원을 지나면서 보니까 병원 옥상에서 몇 사람의 시민이 낮게 떠서 선무방송을 하는 헬기를 향해 총을 쐈다. 그러자 헬기는 고공비행으로 날아갔다." (구술 : 김광영, 현사연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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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이자 오도갈데가 없게 되고, 그러자 그날저녁에, 아니 그날 낮에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 경찰들도 해산명령이 싹 떨어지고, 아니 내가 도청에서 있으면서 문창수씨가 도청 기획관리실장이었는데 내 서중선배이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기획관리실장실에 가서 "형님, 상황이 어떻게 돼가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디 어째, 분위기가 이상해. 경찰들이 다 도망가불고, 해산명령이 떨어져분거여.
자 어디 나갈데가 있는가, 도청에서. 그러자 그날 금남로에 학생들이 들어온거 아니요, 군인들도 철수해불고. 그러자 도청뒤쪽으로 가보니까 지금다 어디로 가는거여 하니까 지금 자기네들도 철수한다고, 참 갑갑하더구만. 글믄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할거 아니냐 하니까 문창수씨가 우리도 길을 뚫어봐라, 도청뒤에서 공사장에서 아시바가 있드만, 그러니까 막 설치해놓고 담장이 높으니까 그리 설치하고 뒤쪽으로 설치하고 해서 창구멍으로 그리 넘어간 것이 정시채하고 문창수씨 모시고 넘어가는데 넘어와서 하여튼 어디로 피해야 할거 아니요,
어떻게 상황이 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00집 들어갔다가 나와가지고 옛날 구시청자리 옆에 거기가 신도장이라고 여관이 하나 있어요, 그리 길을 건너간디, 보였다하믄 쏴요. 누가 뇕는지몰라, 그 당시까지만 해도 거기 군인들이 있었어요. 하여튼 번개같이 사거리를 지나가버려요, 한사람씩. 그래가지고 신도장으로 들어갔지. 그래서 그날 신도장에서 하룻밤 자고, 그러자 21일이 안 되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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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21일. 하룻밤 자고나면 22일임.
21일
16:00
- 7, 11특전여단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16:25
- 광주경찰서장 등 간부들은 무기 없는 상황에서 시위대와 맞설 대책회의를 논의했다(전날 군에서 도경 및 광주시내 경찰서, 지파출소는 무기를 회수해 감).
우선 윤병용 서장은 각 과의 기밀문서를 챙기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회의는 '적절한 시기에 철수해야 된다. 군병력을 요청하자'는 등 서로 의견이 엇갈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윤서장은 회의 도중 전화로 도경에 현재의 상황을 보고하고 1개 소대의 군병력을 요청했다. 여의치 않은 듯 서장의 표정이 무거웠다. 당시 서에는 지원 나온 전투경찰요원과 경찰관 등 1백여 명이 있는 것 같았다. (월간조선, 1985. 7)
17:00 헌혈하고 나오던 여학생,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
* "기독교병원에 피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시민들이 헌혈한 피를 각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수거하여 기독병원에 보급했다. 우리가 탄 차가 양림동을 지날때 한 여학생이 차를 세웠다.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주세요' 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헌혈을 많이 하고 있으니 학생은 그냥 집으로 가라'고 해도 한사코 헌혈을 하겠다고 하자 기독교병원까지 태워다주었다. 우리는 차를 돌려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병실이 부족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복도에 방치되어 있는 환자를 급히 기독교병원으로 옮겼다. 기독병원에 도착해 보니 한쪽에서 사람들이 울부짖고 있어 그쪽으로 가봤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조금전 헌혈하겠다고 조르던 그 여학생(박금희)이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학생이 헌혈을 하고 집으로 가려고 병원 마당을 지나갈 때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고 했다." (구술 : 이광영, 현사연 조사)
도청에 남은 병력 철수
- 도청에 있던 군인과 경찰들은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광주경찰서 직원들은 먼저 전투경찰대원들에게 트레이닝복을 입혀 철수시킨 뒤 맨 마지막에 철수. (월간조선, 1985. 7)
- 11여단 병력, 조선대로 철수 완료. (특전사 전투상보)
17:15
- 전남도경 상황악화로 도경상황실 폐쇄. (육본 상황일지)
17:20
- 교도소(주 : 창평.담양.고속도로 길목) 경계 임무 교대를 위해서(31사 : 3공수) 제3공수 전남대에서 이동 개시. (전교사 작전일지)
17:35
- 3공수 전남대학교 철수, 광주교소도로 이동.
17:45
- 31사단, 3공수여단에 교도소 방어 임무 인계. (31사단 전투상보)
17:50
- 전교사 작전 80-5호에 의거, 광주도시권 외곽도로 완전봉쇄 지시
- 35대대 조선대로 이동 완료. (특전사 전투상보)
18:20 20사단 병력 외곽에 배치
- 전교사, 20사 62연대 2개 대대 통합병원 입구 투입과 동시 군중 대치. (전교사 작전일지)
18:25
- 제3공수, 교도소 도착. (전교사 작전일지)
* "저녁을 먹고 난 직후 천막을 씌운 트럭 1대가 교도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70∼80명의 시민이 타고 있었는데 거의 축 늘어져 있었다. 공수들은 그들을 발로 차고 곤봉으로 때리면서 트럭에서 끌어내렸다." (구술 : 홍인표, 현사연 조사)
18:30
- 35대대 철수 준비. (특전사 전투상보)
18:50
- 20사 62연대 3대대, 송정리 비행장(주 : 나주.영광.영암.해남.무안.목포 등지 길목) 입구 및 서창다리 투입. 23일 16:00 포병 학교 병력과 교대. (20사 작전상보)
18:55
- 20사 61연대 2대대 광주-목포 도로 차단을 위해 송암동 투입(11/207). 23일 16:00 보병학교 병력과 교대. (20사 작전상보)
- 60연대 송정리 확보.
- 강진 성전파출소에 무장폭도 기습, 총기 탈취. (전교사 작전일지)
18:56
- 20사 61연대 3대대 톨게이트(주 : 장성.전주.서울의 길목) 봉쇄를 위한 투입(11/228).
- 20사 61연대 3대대 비아송신소에 투입. 23일 16:00 기갑학교 병력과 교대. (20사 작전상보)
19:00
- 8시 30분까지 사이에 도청, 도경에서 군 철수, 조선대 쪽으로(1만여 명). 도청, 도경은 시민이 접수, 일반인 접근 금지시켜. 학생들은 '헌혈하자'고 전단 뿌려. (월간조선, 1985. 7)
- 경찰관들, 사복으로 갈아입고 시내를 빠져나감. (말, 1988. 5)
- 외곽 주요도로 봉쇄지점 점령 완료
.31사 : 오치(1개 중대)
.3공수 : 교도소(순천 방향) 1개 여단
.11공수 : 소태동(화순 방향) 1개 여단
.20사 :.극락교(광주-송정간 도로) 1개 대대
.백운동(광주-목포간 도로) 1개 대대
.톨게이트(광주-전주) 1개 대대 (전교사 작전일지)
광주역에서 시청 쪽으로 군부대 트럭 질주
* "광주역을 통과한 군부대 트럭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시청 쪽으로 행렬을 지어 질주해 왔다. 트럭에 군인들이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부대가 이동하는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재빨리 길을 건넜다. 길을 거의 건널 무렵, 맨 앞에 오던 트럭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췄다. 차에서 뛰어내린 공수 한 명이 내게로 달려오자 총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인도에 몸을 굴렸다. 나에게 다가온 공수가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구타하고 짓밟았다. 그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팽개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구술 : 김선문, 현사연 조사)
* "학동시장 옆 사진관 건물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후 7시경 도청 쪽에서 장갑차 1대가 케리바 50을 쏘면서 쏜살같이 질주해 왔다. 나는 같이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지시를 내리고 그들을 향해 총을 쐈다. 장갑차는 일시 후퇴하더니 잠시 후 길 양쪽을 향해 총을 쏘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구술 : 위성삼, 현사연 조사)
철수하는 공수부대의 장갑차에 치어 사망.
* "오후 7시경 학운동 집 앞 도로에 앉아 있는데 시내 쪽에서 장갑차 1대가 무섭게 돌진해 왔다. 어찌나 과속으로 달려오던지 내 남편은 엉겁결에 손을 들었으나 장갑차는 그대로 돌진했다. 남편은 그 장갑차에 치어 이웃집 문턱에 나동그라졌다. 내 남편은 머리가 깨져 뇌가 바닥으로 쏟아져 사망했다." (구술 : 윤삼례, 현사연 조사)
남평-효천간 도로에 매복한 계엄군의 집단발포
* "우리가 탄 버스가 해남을 출발하여 나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40여 대의 차량이 광주로 가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광주 외곽지역에 계엄군이 주둔해 있을지 몰라 선발대를 뽑아 3, 4대의 차가 먼저 출발했다. 내가 탄 차가 남평 드들강을 건너고 있을 때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앞서가던 차에서 빨리 되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우리는 즉시 차를 돌려 나주를 향해 질주했다. 나중에 온 사람에게 들어보니, 선두에 있던 지프차는 집중사격을 받아 거기에 탔던 사람들은 즉사하고, 트럭 1대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다 사격을 받아 운전수만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날 밤은 나주예식장에서 새우고 새벽 5시경 주위에 있던 시위대를 모아 토론한 결과 '효천을 통과해서 광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으니 송정리 쪽으로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송정리에도 광주로 가려는 사람이 많아 그들을 태우고 가다보니 송정리 비행장 진입로에 탱크 4대와 계엄군이 포진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송정리로 되돌아왔다. 송정리에서 차를 버리고 무기만 소지한 채 걸어서 극락강을 거쳐 유덕동으로 갔다. 유덕동에도 계엄군의 검문검색이 심해 총과 실탄을 논바닥에 묻고 결국 빈손으로 광주로 오게 되었다."(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 "21일 정오를 전후하여 시외지역으로 나간 차량들이 광주로 들어가기 위해 나주에 속속 도착했다. 시위차량을 전부 모아보니 73대였다. 광주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 먼저 공수의 매복 여부를 확인해 봐야 된다고 생각한 나는 선발대를 뽑았다. 3명의 지원자가 있어 그들을 3대의 차에 태우고 몇 명씩 더 승차시켜 광주로 보냈다. 그들이 떠난 지 30분쯤 지났을 때 마지막으로 갔던 버스가 유리창이 완전히 박살난 채 되돌아왔다. 그 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유리창에 몸이 걸린 채 죽어 있었다. 그들이 탄 차가 남평다리 부근을 지나갈 때 야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이 총을 쏘았다고 했다. 앞에 출발한 2대의 차량에 탄 사람은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되돌아온 버스에 탄 청년들이 울분에 가득찬 목소리로 외쳤다." (구술 : 박행삼, 현사연 조사)
19:25
- 20사 62연대 병력으로 상무대 경계 보강
장군 공관 : 1개 중대
사령부 외곽 : 1개 중대
북문 : 1개 중대
시월산 탄약고 : 1개 중대 (20사 작전상보)
19:30
- 광주경찰서 쪽에서 50여 명의 경찰관들이 군복 차림으로 동명동, 우리가 투숙해 있던 여관 앞으로 달아났다. 이때는 용케도 시위대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민가에 들어가 사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귀가했다 한다. (월간조선, 1985. 7)
* "저녁 무렵 군인, 경찰 등 37명이 착검한 상태로 우리집(서석동)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피해는 주지 않을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서 사복을 달라고 했다. 우리 집은 남자가 없기 때문에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하자 그들은 신을 신은 채 안방으로 들어와 장농에서 옷을 꺼내 이것저것 입어보더니 몸에 맞는 것이 없자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몸집이 적은 경찰 2,3명만 내 티셔츠를 입고 서둘러 나갔다." (구술 : 이순자, 현사연 조사) (주 : 시민으로 위장한 복면조)
20:00
- 시민군 도청 접수. 카빈 2천2백40정, M1 1천2백25정, 38구경 권총 12정, 45구경 권총 16정, 기관총 2정, 실탄 4만 6천4백발, TNT 4박스, 뇌관 1백 개. (주 : 시민군위장 복면조)
- 광주 동신학교, 차량 20대로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폭도 80명 방어진지 구축하면서 교내에서 공포 발사.
- 98연대 2대대에 폭도 80명 버스로 와서 대대장과 면담 후 부대 주변에서 대기. (계엄사 상황일지)
20:30
- 전남지역 자위권 행사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 7공수 차량제대 주남마을 도착. (특전사 전투상보)
21:00
- 군사령부 증원부대 운영(20사 69연대). (전교사 작전일지)
- 20사 60연대 추가 이동 접수 지시. (육작명 80-23호)
- 20사 병력 공수이동 실시(성남비행장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익일 07:00 도착. (20사 작전일지)
21:30
- 62연대 2대대 지역 전차 2대, APC 2대 배치 작전통제. (20사 작전일지)
23:25
- 61연대 2대대 지역 동원병력 투입(8/197).
- 61연대 2대대 지역 증원병력 투입(1대대 1중대 5/125, 수색중대 3/67명). (전교사 작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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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4월 초파일이 5월 23일인가 될 것이요. 그때 내가 5월 23일이 4월 초파일인 거 같애. 21일날 ....을 합니다. 내가 도청직원이 아니라 시청직원인디 누가 도청직원이 있어야지, 정시채하고 문창수하고 셋이 도청에 들어갔는데, 이미 도청은 학생들이 접수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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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는 사람의 고의인지는 모르나, 처음부터 이무길님이 날짜를 헷갈리게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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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주 연행과 인계
신도장에서 셋이서 자고 그 이튿날 도청에 들어갔는데, 그날 기획....... 여학생인데,.... 최양이었어.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뭐라고 했는데 소란해서 모르겠고, 미스 최라고만 알고있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도청 앞에서 계속 방송을 해 가지고 시민들한테 방송을 해가지고... 하나요?....일주일간을 같이 생활했어요. 일주일을 같이 생활했는데(전 : 그 여학생이?) 밤 10시만 되면 꼭 어디를 가더라 이거야. 자기들도 처음에는 무심코 지냈는데, 밤 10시만 되면 어디를 가더라 이거야. 그래 하루는 시간이 딱 넘었어,... 대학생들이라 사리판단을 할줄 알드라고. 데모도 하고, 아 이것이 우리가 하는 것은 학생들도 다 알아요, 근데 이 최양 말이 아주 아무래도 이상하다, 저 여자가 이상하다... 그래 고맙다 해놓고 문창수 기획실장한테 보고를 했죠. 그때 대한민국 간첩들은 다 와있다고 소문이 나있었거든, 그랬더니 잡아라. 우리가 어떻게 잡아와야 되는지, 그 당시에 도청 방송실까지 싹 학생들이 방송반, 무슨반, 봉사반 해가지고 싹 조직이 나뉘어져있는데 저 여자를 잡아가지고 오라 이거야. 그러자 ...보고 이야기를 해 가지고 저여자를 일단 입을 막아야겠다, 그당시에 저 여자 때문에 사건이 커진다, 왜 시민들한테 시체를 끌고 다니면서 죽여버렸다고 이야기를 하냐 이거야, 그당시 우리끼리는 나쁜 년이다고 생각을 했지. 잡아오라는데 그 당시 어떻게 그 여자를 잡을꺼여, 도청 앞에서 마이크잡고 이야기한디. 그당시 문창수실장이 나더러 잡아오라는 거야. 할 수없이 끌어내고 할 수없이 나도 위장도 하고 단상에 올라가고, 그리고 "아야, 우리 목도 마른께 음료수라도 한잔 하자, 그러자 학생들이 최양이 우리가 하고 있을테니까 그러면 아저씨가 어떻게 잡아보쇼. 그러자 학생들 눈치가, 그 당시에는 총을 가지고 있었쟎아요. 학생들이 그럼 니네들이 호위를 해라 해놓고는 같이 간 거야. 나는 "어야" 그 당시에 전춘심이라는 이름도 모르니까, 지금이니까 이런 편안한 생각을 가지지, 그 당시에 현장으로 돌아갈 때 는 비참한 상황이었어. 손가락 하나면 가버리는 세상이었으니까.
나도 그러니까 비장한 각오로 단상으로 올라간 거였지. 그러자 그 애를 데리고 마이크를 누구 학생한테 넘기고 데리고 삼층으로 올라간 거였지. 가자말자 내가 도지사실로 데리고 가고 문창수가 기다리고 삼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그 당시 기자들도 있고 그랬는데 얼굴은 말대가리가 같이 긴데, 말을 청산유수같이 잘해. 너 정체가 누구여, 너 때문에 이렇게 사건을 악화된 것이여. 너 이름 써. 글자도 못 알아 먹게 써. 국민학교 1학년 글씨나 될까. 너 본적 써. 보성 뭐라고 쓰더만. 너 어쩌다 이렇게 돼었냐? 자초지종을 써. 내가 낚시를 가는데, (온전한 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했는데, 니가 어찌 이렇게 사건을 악화시키고 있느냐 이러는데 문창수는 간수를 잘해라, 그 옆방에 잠자는 데가 있는데 거기다가 가둬나 버렸어요.
그러자 학생들이 어떤 남자 하나를 잡아 가지고 왔어. 학생들이. 최양이랑 같이 있던 개머리판이 없는 칼빈 소총을 가지고 있는 어떤 남자하나를 잡아 가지고 왔어. 이놈 새끼, 이상한 놈이라고. 아저씨, 개머리판도 없는 칼빈을 가지고 있소? 그래, 둘이 같이 가둬놓고 있는데, 조금 지나니까 세시경이나 되니까 이사람들이 도청 보면 뒷 건물이 경찰청 건물인데, 그 건물 옥상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니 있드라고. 문창수한테 형님 저 뒤쪽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웅성웅성하니 모여있다고, 글고 막 우리를 쳐다봐. 둘이를 가둬놓으니께. 그러자 안되겠다, 잡아와븐 통에 사건이 커지는 갑다, 첩보가 어디로 넘어갔는가도 모른디, 저걸 어떻게 보안대로 넘겨야겠는데 수사당국으로 넘겨야 되는데 어떤 방법으로 넘겨야 쓰겄냐 이말이여.(전 : 말하자면 전춘심이가 안에서 유리창으로 무슨 신호를 한 모양이죠? 이 : 몰라 하여튼. 상황이 심각하니까 빨리 넘겨부러야한다 이말이여) 그러자 내일 잡아넣은다,
그 당시에 갱생원이 월산동에가 있을때야. 그애들이, 내가 그애들을 잘알아. 나하고 형님동생하고, 광주에서 한가닥하는 내 후배들이고. 내가 업무적으로 광주시내 철거하면서 그 애들 데려다 쓰고 해서 형님, 형님한다 이 말이여. 그애들이 도와줬지, 도무지 어디 나갈 데가 없어 광주시내 5대 통로는 학생들이 다 막아버렸어. 군인들이 오면 같이 싸우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 문창수 실장 정시채 부지사하고 군당국으로 넘겨야하는데 어찌했으면 쓰것나. 막막하드만, 무슨 재간이 있어야지. 도청에 차량이 있었는데, 짚차를 주더만. 7777번이라고 씌어진 짚차를 주더라고 그날 3시에 차를 타고 그 개머리판 없는 칼빈 총하고 전춘심하고 뒤에다 싣고 또 최양이라고 그 애랑 앞에는 내가 타고 그리고 최양 친구하나가 운전을 하고 그리고 도청 앞을 출발한 거지. 그러면 학생들이 내가 알기로는 전대생인데, 애들이 컴보이를 하고서, 그래도 그 애들을 넘겨야만 이 사건이... 사리판단을 할 줄 알아야한다, 최양이. 그날 3시에 출발을 하는데 무지하게 검문을 받아버렸네,
(주 : 이분들이 전춘심의 행동거지를, 학생들이 전춘심과 동행하던 개머리판 없는 칼빈을 소지한 사람의 행동거지를 각각 수상히여겨 간첩이라 생각하고 군에 넘기기로 결정함. 그러나...)
7군데를. 처음에 수창국민학교 앞에 금남로 나오는 길, 학생들이 M-16을 딱 치켜들고 어디가냐 하니까 최양이 나가서 같이 자기끼리는 통하데 그래도 안된다 이것이여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하니까 "이새끼, 너는 간첩아니냐고." 그때 그 애들을 간첩용의자라고 불렀거든. 그러니까 간첩 아니냐고 총부리를 들이대니까 야, 안치워 자씩들이 건방지게, 나도 너희 같은 동생들이 있어 하고 이 자식들이 좋은 말로 하면 듣지, 나도 의협심이 있어서 운동 꽤나 한 놈이라 말했지, 단 상황이 나도 싹 도망가버리고 난 뒤라 어떻게 나도 의무와 책무를 다하기 위해 간 것인디 내가 손떼면 어떻게 될 것이여. 그러자 학생들을 한 20분을 설득을 해서 가야한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보장은 못한다 누가 쏴불지 모른다, 그래도 걱정말아라, 죽고 사는 것은 내 운명이다 그리고 최양하고 같이. 그 앞에서 지나고 다음은 양동파출소. 그앞에서 또 그런 실갱이가 벌어졌지, 환장하것드만. 그 다음이 서부서 앞에, 서부서 앞에서 또 잡히고, 다음은 한전 앞에. 간디마다 이놈의 것이 한전 앞에 지나니까 지금 서구청 자리 앞에, 그 앞에서 또 잡히네. 마지막으로 어두워지고, 간디마다 최양도 설명하고 나도 설명하고 지금 농촌진흥원 앞이구만, 그 앞에까지 갔어. 벌써 그때는 컴컴해버려, 8시가 다 되어가는 때니까. 한디,
지금 초원갈빈가 그때는 논이었네. 근디 그 앞에를 가니까 그 여자는 못 가, 그 당시 변전소가 지금 산림조합자린데 거기가 갱생원들이 거기다 원목나무를 세워서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진을 치고 있더라고. 그리고 그 건너편에 일칠병원가는데 군인들이 거기가 완전히 비무장지대아니라고. 아 근디 초원갈비 그 근방 간디 논두렁 어디서 수류탄이 터져버린 것 같애, 그러니까 우리가 차를 스톱을 했지. 스톱을 하니까 총 딱 들이대고 당신 누구냐, 너는 뭐냐 그랬지. 근디 이 새끼가 총만 들이대고 저 여자만 넘기라 이거야, 그 여자를. 그러자 거기서 시비가 붙었지. 그 여자를 안 넘기면 너는 죽여분다 이것이여. 내가 맨 몸뚱아리뿐인데, 내가 총이 있어 뭐가 있어! 완전히 입고있는 것은 실뿐인디 안된다, 옆에서 최양도 당신이 누구냐 그러니까 근게 자기들도 모르는 애들인가 봐. 같이 어울려다니고 그러면 알텐데 몰라,
그 애들과 한참 실갱이가 붙는데, 운전하는 애가 총을 하나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넘기라고 하니까 그 애들도 그렇고 최양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안 넘겼지. 실갱이가 붙었지, 욕도 나오고. 지금 생각하면 손가락하나면 죽는데, 그러자 누가 수류탄을 던진 것 같애. 더 이상 차를 못가게, 그렇게 한참 하자 한무리가 열댓명이 우르르하고 달라들어. 밤중에 보니까 아니, 형님하면서 나한테 한단말이야. 본께 그애를 보니까 알겠어. 구해주러 온 애들은 나하고 형님동생하는 사이다. 어떻게 된일이냐하니까 형님 우리가 지키고 있습니다. 군바리 이새끼들 잡아불라고 우리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형님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하니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죠.
저 여자는 우리가 간첩용의자라고 판단을 하고 군당국에 넘겨야한다 그런데 여차저차해서 3시에 출발해서 밤11시가 넘어 도착을 했는데 어찌했으면 쓰것냐 어떻게 저기를 넘어가야 했더니, 그리고 저새끼가 누구냐 니 일행이냐 했더니 아니라고하더니 야 너 이리와봐 니가 뭔디 우리 형님한테 총부리를 대고 어째야하자 그러면서 형님 갈라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좀 가르쳐주라해서, 이제는 걸어서 그 뒷구멍으로 들어간 것이여. 지금 서석고등학교 뒤쪽인가 그길을 나도 광주가 고향이지만 처음이었는데 골목길골목길 가르쳐주더만. 그리고 막 넘어가니까 지금 안기부 바로 그당시 정보부가 나오드만, 형님 이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그리 넘어갈라 하니까 밤중에 군인들끼리 싸우고 저희들끼리 싸우고 어느 총에 맞아죽을지를 모르겄드만. 그래서 포복을 했지. 나하고 최양하고 남학생하고 간첩용의자가 대구사람이여, 그리고 전춘심하고. 어떻게 해서 최양은 개머리판 없는 총을 메고 나는 두 놈을 옆구리에 끼고, 그 힘이 어떻게 나왔는가 몰라.
(주 : 광주시민군 행세를 하던 간첩용의자 즉, 개머리판 없는 칼빈을 소지한 사람은 알고보니 광주사람도 북한사람도 아닌 대구사람)
그놈은 도망갈라고 하고 나는 잡고 못가게 하고 움직이는데 완전히 포 사격을 양쪽에서 해버리니까 밤중에 어느 총에 맞을지를 모르니까 완전히 포복을 한 상태에서 내가 생각해도 한 50M간 거 같애. 하여튼 저리 건너가야 한다. 내가 안기부 당시 정보부건물을 저기만 가믄 정보국 건물뒤가 1.7병원이야. 거기만 가면 살겠어. 그러자 포복을 하고 밤중에 기고 그러는데 갑자기 붕 떨어져버리더라구, 거기가 꼬랑창이었어. 내가 꼬랑창에 바로 박혀버린거지. 그사이에도 전춘심이하고 그놈만 딱 틀어잡고 도망만가면 죽여분다고 꼬랑창에서 보니까 지형을 보니까 1.7병원앞에 후문에 술집도 있고 그러드만, 불빛이라 자세히 보니까 보이드만. 저기를 어떻게 어떻게 건너가야 쓰것는데 하여튼 내가 뭔힘이 있었는지 양쪽에 끼고 최양보고 아야 저기 건물로만 들어가자하니 그당시 그 건물이 안에는 유리창이 있고 밖에는 양철로 된 미닫이 문이 딱 닫어졌네.
그 문 열틈도 없이 뭔 힘이 났는가 몰라도 둘이 보듬고 문을 쳐분거여. 그러자 문짝이 날라가불고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간거야. 그러자 주인 아주머니하고 남자가 이불을 뒤짚어 쓰고 총소리가 나니까 둘러쓰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대로 문짝을 날리고 들어간께 얼마나 놀랬겠어. 주인양반이, 그래서 공무원증을 보이고, 나 공무원인데 이 애들 때문에 군인들을 좀 불러주라 어떻게 하면 되겠냐하고 그 아저씨가 뒤쪽으로 가서 1.7병원 쪽으로 가드만. 간첩 잡아왔다고 총 쏘지 말라고 막 이야기하는 것 같드만, 그리고는 있는 사이 벌써 M-16들고 군인들이 내 뒤에서 총을 들이대고 손들라고 몸수색을 한디 나오는 것이 공무원증이거든, 나를 수사당국에 넘겨라, 그리고 그애들을 따라간 것이 1.7병원이었지.
(주 : 수상한 복면조들이 활개를 치던 시점으로서, 이렇게 어렵게 간첩용의자들을 군에 넘겼는데...)
1.7병원으로 들어가니까 당시 군인들이 쫙 깔려있드만. 인계를 한거야. 그것들이 나중에 증언을 받는 거였는지, 거기다 인계를 하고 내가 홍대령에게로 간 거 같애. 그리고 1.7병원 병원장이 내가 잘못 봤는지는 몰라도 홍 뭐라고 써져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지금 내가 상무대를 들어가야한다 문창수씨가 오늘 빨리 넘기고 너는 상무대로 가서 구시장하고 장지사를 뵙고 특명이 모시고 나오라는 특명만 받은 거야. 나는 뭐 아무 생각도 없고 그 애들만 넘겨버리고 시장하고 지사만 모시고 나올 일만 생각한 거야. 이러저래해서 상무대에 가야한다고 했더니 군인들이 그러더구만, 당시에 우리들은 구시장하고 장지사가 상무대에 있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주 : 홍대령이 바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명령으로 20일 파견된 '특수임무' 3개조의 지휘자 홍성률 대령.)
군인들이 앰블런스를 하나 내주데. 그리고 상무대를 들어간 거제, 거기서 차가 갈 수가 있으니까. 그러자 정문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부관이 나오더구만. 부관이 나와는데 중위인데 시에이시 사령관실로 데려간 거야. 내가 이름도 안 잊어버렸는데, 소준열씨야. 소준열씨가 그날 발령을 받았다데. 그날 자기도 낮에 발령을 받고 시사령관으로 왔다더구만, 구례사람인데. 그래 나하고 앉아서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됐냐 대화를 하는데 쭉 이야기해줬어. 나는 광주시청 아무개요, 이렇게이렇게 해서 왔소. 최양은 떨어져부렀고, 나는 최양하고 시장하고 지사하고 관계가 없은께, 멀리 떨어져있고 그후로 최양은 어떻게 됐는가 모르겄어. 그후로 나는 시에이시 사령관실로 간거야. (전 : 최양하고 그 운전했던 학생은 연행은 안됐죠?)
이 : 모르겄다니까. 나는 거기서 떨어져 버린거여. 시에이시 사령관실에서 여군 하사관이 밤중에 라면을 끓여왔더라고. 12시가 넘었제. 시계고 뭐고 다 날라가버리고 내 몸뚱아리 하나 빠져나왔는데 내 몸이 내몸일 것이여. 그 라면을 먹고 시내에서 3시에 출발을 해서 이렇게이렇게 왔다하니 그사이에 보안대에 시켜서 뒷조사를 했던 모양이야. 그 여자집이 화정동 그 근방이야, 우리 지나왔던. 그러니까 나하고 이야기를 하드만 대단한 인물이다고 말이야, 껴안다시피 하더라고 나도 어리둥절했어. 나하고 악수를 하드니 무기도 없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했다고 나한테 상당히 경의를 하고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훌륭한 일을 했다고. 그러자 장지사하고 구시장이 오드만.
구용상 시장을 모시고 다시 시청으로
둘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하니까 나도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했제. 넘기라하고, 넘기고. 시 상황실에 가서 보고하고. 내가 데려온 애들집에 수사대가 찾아가니까 총도 나오고 삐라도 나오고 그리고 농촌진흥원 앞에서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놈은 그애 오빠여. 그러면서 거기 갔더니, 나한테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고 그러다 그날 거기서 날을 새고, 공무원들은 나와서, 전부 계속적으로 하니까 그 당시만 해도 사람이 몇이 죽은지를 모르니까 왠종일 총을 쏴부니까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제. 그러니까, 어떻게 나갈 것이냐, 나는 죽어도 나가야된다. 안된다하드만.
(주 : 간첩용의자들 연행과정에 방해한 사람은 다름아닌 전춘심의 오빠? 전춘심은 시위 선동시 자기 오뺴가 죽었다고 했음. 오빠가 많은가?
그리고, 이무길님이 용무를 마쳤으니 돌아가려하는데 군인들이 못가게 말림.)
군인들이 그 당시에 호칭을 하는 말이 폭도들인데 나는 폭도가 뭣인지 순수한 공무원입장에서 윗분을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자기들은 폭도들이라고 하고 잡히면 하여튼 카나리아(앵무새를 지칭)가 되야된다 폭도도 되고 안 죽을려면 반정부구호도 하고 읽어라하면 안 읽을 장사가 어디 있겠냐, 그래도 나는 나갈라하니까 안된다 그러면 나는 여기 있을라니까 시장 당신은 나가야 된다. 장지사 말이 그러더만, 장지사는 거기에 있고, 그날 시장님만 나하고 시사령관 짚차를 주기에 1.7병원까지 타고 와갔고 거기서 내려서 뒷담으로 넘어서 철조망 통과해서 내가 밤중에 넘어왔던 코스대로 낮인께 바로 넘어와서 지금 한전 앞에까지 걸어왔어. 걸어와 갔고 우리 시청 직원하나가 있어 정기사라고, 그 애가 그 근방에 사는 것도 같고 어쨋든 오토바이 하나를 구해서 내가 운전을 하고 구시장을 모시고 집에 바로 못들어가.
백운동 외곽도로로 해서 수피아여고로 해서 금성으로 해서 계림동으로 해서 골목길로만 골목길로만 찾아서 잡혀블믄 안된께. 시에이시 사령관 당부도 잡히믄 안된다, 잡히믄 둘다 죽는 줄 알아라하고 그래서 우리도 잽히믄 죽어불란다하고 나온거니까. 그래서 안잡히는 방법을 찾은 것이 골목으로만 골목으로만 해서 시청으로 들어간 것이여. 그래가지고 시청으로(도청으로 안갔어)왔는데, 시장이 우리가 민간인이기 때문에 들어가자면서, 시장이 각 동을 순시하자 그래. 차가 있어 뭐가 있어. 자전거를 두 대를 빌려타고 나하고 둘이 충수동, 충운동, 대금동으로 해서 대의동으로 해서 광주시내 동을 다 돌아다닌거야. 공무원들 몇이는 있드만.
시민들에게 절대로 불평을 일으키면 안된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물었제, 뭣뭣이 필요하냐고? 음식도 쌀도 생활필수품도 부족하지, 그러니까 시장님 입장에서는 최대한 방법을 동원해서 가지고 올라고 그때는 시피엑스라고 지금 을지연습같은 게 있거든. 그당시 을지연습체계로 발동을 하라 그러면 어느 공무원이 나와야 말이지. 누가 나와야 시피엑스체제고 뭐고 발동을 하지, 할 수가 있나? 안돼, 체제가. 그래도 동장들은 그 동에 거주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동장들은 나와서 동사무소를 지키고 있드만. 그러니까 시장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시민들에게 왠만한 불편을 느끼느냐고 하면서 시민들을 위로하고 있는 거였지. 우리가 자제를 하자고, 시장님하고 나하고 계속 시장님도 집에 못가고 나도 집에 못가고 시청에서 잠자면서, 그러다가 시장 친구집에서 자고 우리집에서도 한 번 자고, 그러다가 장지사한테 연락이 왔지, 그당시 전화는 됐거든. 어떻게 돌아가냐, 이렇게이렇게 돌아간다 상황을 설명하고 들어와라 하니까 나는 25일날 나갈란다.
새벽 5시에 만나자했어요. 이렇게 연락을 끊었어요. 그래서 24일날 밤에 구시장님 모시고 나왔죠. 차가 있어야 지사를 모시러 가죠. 그래서 오토바이 90cc짜리 하나를 빌려가지고 지금 광천동으로 해서 화정동 삼익아파트 그길로 해서 그 밑에가 그때는 전부 야산이었는데 그리그래서 새벽 3시에 나왔어요. 골목길 골목길만 찾아서 큰길은 쫓아올까봐 못나서고 해서 화정동 삼익아파트 야산을 타고 내가 광주시내 지리를 알음알음아니까 그리로 넘어가서 상무대 잿등 길이 나오드라고. 그래서 거기서부터는 맘놓고 큰길로 나섰지요. 그래가고 상무대 앞에 가니까 딱 5시가 됐더만. 그러니까 지사님이 나와있드만. 그래서 지사님을 모시고 나오는 것이 일이야. 그러자 나오는 코스가 잿등으로 해서 화정동 삼익아파트로 해서 수피아여고로 해서 옛날에 같던 장동으로 해서 계림동으로 해서 먼저 시청으로 모시고 왔는데 시장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지사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도청으로 가야겠다 이것이여. 지사님이 차가 있나 오토바이로 모시고 갈수도 없고, 그러다 시청에 보니 앰블런스가 하나 있어 그놈을 내가 운전을 해서 지사님을 앞에다 모시고 내가 운전을 하고 도청으로 갈라고 그러다 지사님 바로 도청으로 갈 것이 아니라 상무관으로 먼저 갑시다.
우리가 거기에 먼저 가서 조의를 표해야 되겠다 하고 차는 상무관 앞에다 놔두고 지사님 모시고 상무관으로 들어갔죠. 한데 시체가 입관을 하고 있는데, 지사님 들어가니까 시민들이 지사님 왔다고 웅성웅성하고 난리가 났죠. 시민들 몇이서 지사 멱살을 잡고 "이놈의 새끼 니가 군인들을 불렀지"하고 군인들을 불러들여 가지고 우리들 시민들을 죽였지 하고, 물론 가족들은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이요, 피붙이가 죽어부렀으니. 어찌됐거나 유탄을 맞았든, 직격탄을 맞았든 죽기는 죽었으니까, 지 가족들은 기가 막힐 것 아니요. 그러니까 지사만 붙잡고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거예요.
굉장히 사태가 심각했죠. 그러자 그 자리에서 총알을 맞으면 어쩔 것이요. 그래서 내가 웃통을 벗고, 팔을 비틀어불고, 힘을 꽉주고 밀쳐불고 뭔힘이 나왔는가 몰라. 그때는 죽기아니면 살기였으니까. 지사가 뭔 죄냐, 쏠려면 쏴라 이러자 학생들이 에워싸서 지사실로 모시고 갔죠. 그러고 보니까 도청에 지사님을 모셔놓고 나니까 구시장을 찾는다고 난리여. 그리고 지사님보고 저는 빨리 시청으로 가야쓰것습니다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지사님 놔두고 나는 다시 그 앰블런스타고 시청으로 들어갔죠. 기가막힌 생활을 했어요. 지금이니까 그렇죠, 살았다고 돌아온게 지사님하고 시장님하고 26일날 밤이예요.
아마 시에이시 사령관하고 통화를 했던 것 같애요. 27일 04시를 기해서 들어온다 그랬어요. 무지하게 울어불드만, 워미 계엄군 놈들이 우리 시민들 다 죽여버리겠네하고 우리 불쌍한 시민들을 어떻게 할거냐고, 절대로 계엄군은 들어오면 안되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총같은 것도 회수를 할란다. 그당시 목사를 비롯해서 광주시내 유명인사들이 나와서 지사님하고 시민대책위원회를 꾸려서 굉장히 수습을 하죠. 낮에는 나는 그 앰블런스를 타고 총회수하러 다니고 시내가지고 다니는 총은 다 회수하고 또 밤에는 지사님하고 시장님모시고 나는 생활이 바뀌어요.
(주 : 21일부터 몇몇 보이던 수상한 복면조들은, 22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시내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고, 23일 보안사가 데려온 기자들의 사진모델이 되어준 뒤, 24일 광주시내를 빠져나간 시점이며, 27일 '상무충전작전' 즉, 도청 최종 진압 작전이 계획된 시점임.)
계엄군의 진주와 시체 수습
그날 26일날 밤에 시에이시 사령관하고 통화를 하는 내용은 이제는 도저히 안되겠다. 27일 04시를 기해서 계엄군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러자 지사는 지사대로 시민들 다 죽인다고 울고, 대처나 27일 새벽이 되니까 탱크가 들어오고 난리가 나드만, 그날 10시에 지사님이 도청으로 오고 시장님은 내가 모시고 시청으로 갔는데, 계엄군들이 시청으로 상주를 하드만. 아침 10시에, 자 시체가 어디어디에 있으니까 이 시체를 빨리 치워야 한다 이것이여. 군인들 말 한마디면 시장이고 뭐고 다 가불제, 근디 시체를 치울 사람이 누가 있어, 그 당시에. 시체를 치울 사람이 누가 있어, 그래서 우리는 가르쳐 준 대로 교도소 있는 데 가면 시체가 있다 이거여. 그리고 광고에 가면 시체가 있다 이거여. 자기들은 계엄군이 거가 파견되어 가지고 있은께, 그러자 내가 앰블런스에 타고 사회과 직원 조성갑을 데리고 이제 시체 치우러 다닌 거여. 먼저 교도소로 갔지.
시체가 맞아버렸는지 어쨋는지 머리통이 날라가버렸더구만, 앞에가 가마니로 덮어져 있는데 머리통이 날라가 버렸어, 도대체 어떻게 죽였는가는 모르겄는데 그 시체를 앰블런스에 주섬주섬 담아서 보듬고 싣고, 광고로 가니까 광고 가면은 저위에 도서관이 층층대가 상당히 높아요. 그 도서관에가 시체가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도서관 앞 층층대에다 차를 놔두고 올라가니까 거기는 죽어 있더구만. 참 둘이서 띄엄지. 시체가 오죽에 무거와, 그놈을 보듬고 머리통은 널럴럴 한데, 머리통은 층층대에 자꾸 치면서 앰블런스에 싣고 시체를 포갤 수밖에 없어. 그 다음에 신역에 있다드만. 신역에 두구가 있드만, 신원이고 뭐고 확인할 시간이 없어. 먼저 그 시체 두구를 싣고 그렇게 네구를 싣고 우선 상무관으로 갔어. 일단 내려주고 다시 시청으로 들어왔어. 그런데 그 이튿날 또 대령이 교도소에가 시체가 묻혀있다여. 일곱군가? 그러자 조성갑이하고 둘이서 그당시는 이미 계엄군이 들어와분 뒤라 시청직원들이 다 나왔어요. 그런디 인부를 좀 구하자 교도소 앞에가서 그 느티나무 있는데가서 다 시체를 묻은 자리에 나무를 꽂아 놨드만요. 그래서 일곱곳을 다 팠어요. 일일이 다 파가지고 앰블런스에 실어서 운전은 내가 하니까, 그렇게 해서 5.18은 인제 일단 수습이 돼요.
(주 :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 종료 후, 이무길님 등 공무원분들이 시신들을 수습)
그래가지고 이걸, 그 당시에 구시장이 진두지휘하고 장지사가 (경질되고?)....하고, 김종호씨가 지사를 하고 시장은 문창수씨가 시장을 하죠. 5월 말경인가, 6월인가 될거예요. 그렇게 관련이 돼가지고. 날짜는 기억이 안나는데 금요일인줄만 알아요. 그당시 정시채 부지사가 잡혀가 버렸거든. 뭣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보안대에 잡혀가 가지고 우리도 뭣 땜에 잡혀갔는지 모르는데 어쨋든 보안대에 잡혀가요. 일요일날 친구들 서이가 전라북도 송곡 저수지가 나도 처음 가봤지만 나도 집사람한테 낚시를 간다는 말만 하고 어디 간다는 말은 안했제. 그런데 그날 아침에 난리가 나버린거야. 문창수씨가 나를 찾느라고, 관행이라고, 일요일 아침에, 난리가 나분 모양이여. 강영수국장이 그러다가 찾아와서 동생 어디갔냐고 물으니까 우리 집사람은 낚시갔다는 소리는 못하고 시장이 찾고 난리라고 하니까 그당시 시청에서는 광주시내 방송을 통해서 하고, 토요일인께 내가 어디 놀러나간 줄 알고 무등산 계곡이랑 증심사에 마이크를 틀고 "이무길씨, 이무길씨 급히 찾는다고"찾고 그당시에 핸드폰이 있어, 삐삐가 있어, 그러자 밤이 돼서 난리가 나부렀어. 밤이 돼서 우리집에 연락을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사실은 무서워서 말을 못했는데 사실은 낚시를 갔다고 했더니, 그러면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이 난리를 나게 하냐고 그러면서 어디로 갔냐고 하니까 사실은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고 했지. 그리고 친구 누구누구하고 갔다고 하니까 그 친구들 집에 전화를 해보니 어디로 갔다고 하니까 전라북도 송곡저수지까지 연락을 했더라구요.
(주 : 505부대원 허장환님의 증언대로 보안부대의 5.18 책임소재 만들기(조작간첩 만들기)가 시작됨)
아닌 밤중에 12시나 됐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애, 저수지가 상당히 컸는데, 여자는 우리 아들놈 이름을 부르는 것 같고, 그랬더니 친구들이니 이름 부르는 것 같다고 하고 그런 것도 같고 해서 그 저수지에서 나를 찾을라고 부르고 다니더구만, 그러다가 낚싯대를 저수지에 싹 빠트려버리고 일어나자 강국장이 빨리가자 이거 뭐 난리가 나부렀는갑다, 집에가서 잠을 잔디 잠이 올것이요. 보안대에서 시장, 설명을 들어보니까 금요일날 정시채부지사가 잡혀갔다고 하드만, 나도 그때서야 안거지. 점심시간에 잡혀갔는데 고위공직자들한테 문구가 내려졌는데 5.18데모가 일어나게 된 동기, 이래가지고 이게 만들어졌어. 얼른 하나 눈에 띄는게 문구 하나가 최규하대통령 외화낭비만 하고 성과는 전무, 이런 것이 원인중의 하나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다가 정시채를 얼마나 잡아 꽂아버렸는가 막 들어가면 지하실이 있죠, 너이새끼, 니가 고위공직자가 돼 가지고 사꾸라 아니냐, 니가 이랬다 저랬다 해가지고 최규하 대통령이 어찌됐든 간에 니가 마음대로 대통령 하는 일에 성과가 있네 없네 하고 일을 하냐말이야. 그러니 정시채부지사가 뭘 알거요, 그러니 당시에 기획과 문창수실장이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들한테 보고가 된거지.
그 당시에는 수사관들 말한마디면 시장 군수도 다 나가버리는 세상인데, 그러면서 그날 아침에 토요일날 아침에 문창수한테 보안대에서 전화를 한거야. 박인데, 박 중위가 거 시장 좀 바꾸라우 그랬는갑드만, 그러니까 비서실에서 여자가 누구십니까하니까 여기 보안수사대야 어쩌고 저쩌고 하니까 비서가 상황판단을 못하고 직함이 무엇입니까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화를 벅 내면서 시장이 그렇게 높나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하니까 시장 좀 바꾸라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니까 나도 지나간 소리를 다 종합해보니까 그래요. 그 당시에 비서실장이 김범남이라고 우리 광고후배인데, 오늘은 어째 이상하게 전화를 받는 것 같거든, 그래서 얼른 전화를 바꿔 받으며 왠 일이십니까 하니까 거 시장 좀 바꾸라는데 말이 많구만 하면서 이 눈치 빠른게 얼른 시장을 바꿔줘. 여보세요, 니가 시장이가. 우리 애들을 보낼까, 당신이 순순히 오겠어.
(주 : 박중위라는 이가 실은 보안사가 파견한 홍성률 대령의 지휘하에 있던 505보안부대 정보과 박OO상사일 가능성이 높음.)
시장과 부지사를 구하고
시장은 우선 정시채 부시장 잡혀간 건 알고 있고 일단 잡혀갔다 하면 지하실에 갇혀서 조인트 까고 하는 걸 알지. 그런데 박중위가하는 말이 거 당신 부하 직원 중에 이무길이라고 있다며, 그 친구를 날 좀 만나게 해줘, 그 친구 아주 대단한 인물이야. 하면서 보안대에서는 이무길하면 내 이름을 알아버려. 하 그런 용감한 직원이 있어, 그 용감한 직원 빨리 소개해 주고 당신은 이리와. 그러니까 시장이 날 찾는거야. 그러자 그날 밤중에서야 그 난리가 나서 나 혼자 보안대를 갔지. 문제는 이 서류때문이니까 니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보안대 가니까 나는 이무길이다, 나를 찾아서 왔다했더니 정문에서 연락이 돼드만, 글더니 박중위가 정문까지 나와. 와, 당신이 기냐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시장은 어디 갔어, 하니까 시장은 내 선배요 할 말 있으면 나랑 합시다했지.
나는 인자 전부 막아야하니까 나를 칭찬을 그렇게 해주니까 나도 맘놓고 이야기를 했지. 그 당시 아무나말 못해, 저기 부지사도 내주시죠 하니까 거, 안되는데 그래서 형님했다가 선생님했다가 막 그랬죠. 중위가 부르더니 부지사 어쩌나 저쩌나 하더니만 이 친구한테 면담 좀 시켜줘 하는데 얼마나 맞아버렸는지 못 보것드만. 하여튼 디지게 맞아버렸드만. 하여튼 내가 불러서 왔으니까 최대한 힘을 쓸테니 그리 알고 계쇼. 박중위한테 갔더니 용감하다고 칭찬이 대단해, 수사를 하실려면 첫째 5.18이 어째서 났는가 그리고 군인들이 총부리를 어떻게 겨누고 어떻게 시민들을 학살을 하고 이런 것을 알고 수사를 해야한다 그러면서 설명을 했죠. 이 자식이 말이야, 그 용감한 시민정신이 있어서 극구 칭찬을 하고 했더니 동지를 원수로 아네, 그러는 거예요. 자식자식 하지마 나도 총 없이도 산 놈이여, 죽으려고 하면 그때 죽어버렸어. 그러다가 형님했다가 선생님했다가 달개면서 설명을 듣고 수사를 하란 말이지 했어요. 정시채가 뭔 죄냐, 정시채나 문창수 같은 사람 없다 이거야. 그 공무원들 하나 없어도 그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서 도청에 남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애국자가 어디있냐? 말이여. 그랬더니 문건의 내용을 가지고 그러는 거야.
5.18이 왜 일어나게 됐냐는 그 문건은 브리핑자료로 만들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그것이야 기획관리실에서 만들었겠지만 그걸 문창수가 만들었겠느냐?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니까 내가 알기에 실장이란 것은 감독만 하지 실제 만들기는 기획관하고 그 당시 구례군수였던 박정홍이하고 직원들이 만들었을 것 아니냐, 시장이나 부지사가 뭔 죄냐? 그러자 구례군수 이 자식 당장 잡아와 그러더라구, 아이구, 대령님, 구례군수 그놈 잡아다가 한 대 까버리면 다 불어분다 이것이여. 내가 책임지고 데리고 올 것인게 나를 믿고 형님이 나를 믿으란 말이요, 내가 그런 상황을 겪은 놈인데 구례군수 잡아다 뭐할 것이요. 그럼 어떻게 할라고 하냐, 하니까 내가 그 내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적어 가지고 올텐께 좀 봐주라.
그러는데 여수시장 잡혀오고, 박철웅이 잡혀왔제, 나는 그사람들 잡혀오는 거 다 봤제. 그래서 박철웅이가 애국자라드만, 애국가를 불러보라니까 1절을 못부르드만. 그러니까 또 조인트를 까고 구둣발로 차고 애국가도 모르는 놈이 애국자여, 하고 그 당시에 여수시장도 디지게 뚜드려 맞드만. 그 꼴을 봐버리니 문창수고 정시채고 박정홍이고 잡혀오면 다 족치겠구나 싶어 내가 그 내용을 쭉 정리해 써 가지고 올텐께 형님은 나만 믿어주쇼. 그랬더니, 박중위가 그래그래 내가 그럼 한 번 믿지, 해서 그 다음에 밖에 나와 공중전화를 했지. 시장한테, 형님 구례군수에 박정홍이라고 있소, 그래 있다고, 그럼 빨리 좀 불러다 주쇼. 그래서 잡아다가 시장실에 있다가 구례군수가 나하고 동갑이드만 나도 이 내용을 어떻게 당신이 만들었냐 성질이 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내가 뭣을 알겄냐, 기획관리실장이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다 이거야. 이 씨벌헐놈의 새끼가 없어, 야 이새끼야 니가 군수면 다냐, 니가 이걸 만들 당시에 비판을 하면서 그런 내용을 만든 경위를 쓰라는데 이 새끼가 비판이 아닌 핑계를 대고 있어야. 예끼, 그러면서 니가 군수여, 문창수 앞에서 시장 앞에서 뺨을 질러버렸지.
니가 군수란 놈이 말에 책임감도 없이 말을 해, 그렇게 한바탕 하고 나니까 문창수씨가 성질이 더런 놈이니까 손대면 안되고 어찌됐든 내용을 유효적절한 문장을 만들어야 되는데 경위서를 써야 되는데 우리가 안을 짠 것이 "시민들의 여론정보과 형사들의 여론을 참고로 집중적으로 요약해서 만들다보니까 이렇게 됐다"로 하고 인자는 저놈은 잡혀가면 문창수가 시켜서했네, 부지사가 시켜서 했네 할 놈이니까 니가 잘해라하고. 형님 이렇게 짜왔는데 어떻습니까, 야 이것이 내용이 이렇게 돼냐? 군수 이자식 잡아들여야겠다, 한단말이요, 나하고 이야기좀 하자, 군수를 잡아죽여야 쓰겄다 이래요. 군인들은 그 사명감이란 것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들이라서 좋은 말로 살릴 것을 그러면 죽여버린다는 거여, 사직서를 가져오라는 것이. 그래서 시청으로 다시 왔어. 갔더니 구례군수 사직서를 가져오라고 하요. 구례군수에게 사직서를 써라고 했다. 잘못 만들었다는 사직서는 써라. 그리고 최대한으로 다시 돌려줄테니까 사직서는 써라.
문창수는 우리들만 믿고, 이것이 뭔 고생이냐 말이여. 이것은 내일까지 해결할테니께, 완전히 궁정동사건이 나온 것이여, 엄청나게, 이런 것만 해도, 우리는 여기서 하나보다.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형님 가지고 오라면 가지고 오기는 하는데 이 파리같은 거 자르면 뭐하요, 그럼 어찌했으면 쓰것냐 하길래 한 번만 봐주쇼. 문창수는 내 학교 직속선배요, 박종홍이는 군수라고 해봐야 좆도 아닌 것인디 그런 파리목숨보다 못한 것을 짤라봐야, 그런 것이 공무원이라고, 한 번만 봐쥬쇼. 그럼 어떻게 할래, 찢어불고 없는 걸로 합시다. 그러자 대번에 아, 이자식 배짱좋다 그래 좋다
이 덜 떨어진...
고 박정희대통령의 신복 정해성육군참모총장을 연행구속시킨 장본인이 바로 전두환 !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신군부 전두환 노태우의 막강한 하나회시절
면박님이 이무길씨 일개 시청직원 증언자료를 믿어라고 올려놓은것 보면 답이
안나오더군요
일개 시청직원은 라도 시민 아니냐? 별...
518때 억울한 사람들 정말 많아요. 그리고 그당시 시대적상황이 하나회자체가 권력이었고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무길님의 518 증언자료는 신빙성이 없다는것입니다.
다만 취재자가 날짜를 착각해서 하루씩 앞당겨졌을 뿐입니다.
증언록은 읽어볼만한 내용이니 시간되면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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