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에게 밀양이라는 도시는
1. 강간사건
2. 송전탑
3. 503의 공약 신공항 부지
4. 영화"밀양', "똥개"의 촬영지
5. 무더운 여름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의 도시로 알려져있고 익숙하시겠지만
제가 간략하게 소개해드릴 내용은 밀양출신의 독립운동가 입니다.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창립 멤버 13명 중 5명 김원봉, 윤세주, 한봉인, 한봉근, 김상윤(김옥) 은 밀양 출신입니다.
황상규, 김대지 두 분은 의열단 고문역할도 하셨습니다.
약산 김원봉
윤세주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 때 밀양에서 주도하고,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활동을 벌이다가, 1942년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한봉인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다.
한봉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일제의 주요 기관 파괴와 친일 앞잡이 처단을 목적으로 각종 무기와 탄약을 서울로 반입하려다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하다 1927년 2월 11일 사망하였다.
김상윤
경남 밀양 출생.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 13명과 같이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그 뒤 밀양경찰서 폭파에 가담하였고,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10월 19일 상하이에서 활약 중 사인불명으로 사망하였으며 중국 푸젠성에 그 묘비가 있다. 1968년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황상규
고명학원(高明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할 때 대표자 39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직에 참여, 군자금모집을 담당하였고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김대지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위원을 지냈다. 조선공화정부 내무총장, 의열단 간부 등을 역임하며 무장항일 투쟁에 주력하였다.
최수봉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 , 당시 24세)
3·1운동 직후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의열단에 가입했다. 고인덕으로부터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받아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여 송혜덕에게 맡겨놓고 기회를 기다렸다.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도주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출처 : 두산백과
밀양은 김원봉과 윤세주 말고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적게 잡아서 100여 명이라는데, 이런 고장도 드물다. 독립운동기념관이 충남 천안시 말고 지방자치단체로는 밀양과 경북 안동에 있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밀양 출신으로 지금까지 정부 서훈을 받은 사람만 65명. 여기에 김원봉은 빠져 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밀양시립박물관 옆에서 2008년 문을 연다.
손정태 밀양독립운동사 연구소장(당시) 인터뷰 中
사단법인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 http://xn--iq1b29mdsi.com/
밀독연.com
밀양시 독립기념관
밀양시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
밀양의 독립운동가 70인(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
독립운동가 박차정과 김원봉(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
의열단장 김원봉 밀양 생가에 '의열기념관' 연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9157144
보배에서는 '밀양' 이란 도시가 부정적인 시선이 깊지만
중소도시인 밀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을 배출했고, 활약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발퀄로 사진과 글을 붙여 만든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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