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밀겔에 첫인사차 글하나 게제 하겠습니다.
게제할 글은 예전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임진왜란 관련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원균의 정치적 대립구도속에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수군 최고의명장으로 생각되는 이억기 장군에 대한 미흡한 개인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는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학계나 군사분야에서 이억기 장군에대한 연구는 한번쯤 해봐야할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이분야에서 계시는 분이시라면 이억기 장군에대한 연구는 충분한 역사적 논점이 존재할 부분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반말체 문장으로 기술한 부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이제 시작합니다.
만약 이순신 이 칠전량에서 원균과이억기와 같이 사망하였다면 역사는 어느 장수를 역사에 명장으로 기록할까??
이억기(李億祺, 1561년~1597년)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수(景受)이다. 아버지는 심주군(沁洲君) 연손(連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하여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 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21세 때 경흥부사(慶興府使)를 역임하였는데 이는 당시에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북방의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남하하자 전투가 벌어졌고 이들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26세 때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임명되었다. 1587년 여진족이 경흥 부근으로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게되자 당시 경흥부사였던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이 체포되자 이억기는 이들을 변호하였으며 이때 이순신과 인연을 맺기시작하였다.1591년(선조 24) 32세 때 순천부사를 거쳐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과 협력하여 당항포·옥포해전에 출정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참소로 하옥(下獄)되자 이항복(李恒福)·김명원(金明元) 등과 함께 무죄를 변론하였다.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원균 휘하의 좌익군(左翼軍)을 지휘하여 용전하다가 칠천량(漆川梁) 싸움에서 원균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투에 패하게 되자 패전한 장수로서 바다에 투신 자결을 선택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상기 내용들은 각종 포털사이트의 나온 이억기 장군의 연력 이다. 그런데 연역을 들여다 보면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이억기 장군의 행적은 출중한 무관으로써의 공로로 인해 젊은 나이에 승진한 것을 알수 있다. )
이는 그가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왕족 종친의 계보이기 때문에 낙하산 인사를 단행해서 직책을 가졌다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있다. 이억기는 실록에도 나타나지만 어린나이였을때부터 무예에 출중함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는 낙하산으로 직책을 획득한게 아니라 출중한 그의 무예 실력으로 인해 임진왜란 이전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어린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획득한 것이다.
또한 늘 이억기 장군을 이야기할 때 가장큰 역사적 오류를 범하는 것중에 하나가 ..왜란당시 수군 수사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마치 그가 이순신을 따랐느니 아님 늘 이순신이나원균의 리드를 당하며 뒤에서 지원이나 기동타격 역할을 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사회의 신분이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은 당 시대적상황을 펼쳐보면 누구도 알수 있다.
원균이 세명(이순신과이억기)의 수사중 연배가 높다고 해서 이래라저래라 할수도 없는 입장이거니와 이순신이 이억기보다 연배가 높다고 해서 형님동생사이로 비춰지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역사적 인식자체를 잘못생각하고 있는것이다.
이억기,이순신,원균 모두 서로가서로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수 없는 입장이였다.
그렇게 따진다면 탄금대 전투당시 신립(46세)과 이일(54세)의 관계또한 다시 조명되야 할 것이다.
왜란전까지의 세 수사의 무신 공로를 보면 이억기 장군이 결코 이순신이나 원균의 경력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다.오히려 당시 최연소 나이로 공로를 인정받아 용장으로써의 명성을 얻고 있다.
이는 왜란 발발직전 전쟁징후를 파악한 조정에서 급히 세수사를 남해안에 배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이억기 장군에 대한 편견된 시각을 보자면 선조의 종친이기 때문에 선조가 견제하여 삼도수군 통제사에 오르지 못했다???
(종친:임금의 맏아들자손은 4대손까지..나머지 아들의 자손은 3대손 까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억기는 과연 선조의 종친일까??
굳이 따지자면 이억기는 왕족 계보를 두고는 있지만 선조의 종친은 아니다.
이억기 장군의 족보를 보자면 정종대왕의 10남인(덕천군)-->덕천군의 슬하에 4남을 두었다.그중 장남 (신종군)-->신종군은 슬하에 9남을 두었다.
그중 차남 (신곡수)--->신곡수는 슬하에 5남을 두었다.그중 신곡수의 차남(심주군)-->심주군의 3째 아들이 이억기 장군이다.
이 요약한 족보만 보아도 선조가 굳이 이억기 장군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거나 견제 할만한
왕의 가문과는 거리가 멀게느껴진다.
더군다나 정종대왕의 계보라면 더더욱이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선조가 이억기장군을 왕족출신이라 의식적으로 배제하였다면 이억기 장군보다 당시 위협할만한 종친의 왕실계보들이 줄을 잇고 있었을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벌써 자기아들인 광해군이나 권율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이억기보다 왕권 패위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것이다.)
!! 이억기는 과연 원균과 이순신의 조연이였나?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순신을 도와, 이순신과 협동하여,원균 수하에 있으면서,기동타격의 역할을... 왜 이억기에 대한 후대에 평가는 원균과이순신의 조연 역할로만 비춰져야 하는지..이는 당시 당파싸움이 만연했던 조선 조정에서 원균과 이순신의 대립구도속에 실질적으로 이억기를 지지했던 조정의 정치 세력들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가 이억기를 의식적으로 배제를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당파싸움의 주세력들이 이억기를 총알 받이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가 이억기를 의식적으로 배제를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당파싸움의 주세력들이 이억기를 총알 받이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임란 개전 이전의 세수사의 등용대한 당시 조선의 상황.
원균은 경상우수사 이전에 이미 전라 좌수사(이순신 부임이전)에 부임한다.그러나 1591년 사간원에서 탄핵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유는 원균의 근무태도 이다 일종의 인사고가 성적인데 이것이 형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조24년(1591년) 2월 4일
사간원이 아뢰기를,"전라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균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타나지만. 인물에 대한 장악력이라던가 성격에 대한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 된다. 이로써 원균이 덕이 있거나 병사를 장악하는 리더쉽의 능력에 대해선 의문을 품지 않을수 없다.
원균이 전라좌수사에서 탄핵 된이후 후임자로 유극량이 임명되나 사헌부에 의해 또한번 탄핵된다 ..탄핵 사유는
선조24년(1591년)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라 좌수영은 바로 적을 맞는 지역이어서 방어가 매우 긴요하니 주장(主將)은 불가불 잘 가려서 보내야 합니다.
새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 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軍官)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閫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또 하삼도(下三道)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의 우후(虞候)는 직책상 군무(軍務)를 총괄함은
물론 수색과 토벌도 해야 하므로 그 임무가 매우 긴요합니다.
그런데 다들 꺼리므로 흔히 용잡한 무리를 뽑아 보내게 되니 매우 온편치 못합니다. 현존하는 무리 중에 합당한 자는 그대로 두고 합당치 못한 자는 사태(沙汰)시켜 모두 군직을 주되
그 녹봉(祿俸)은 양계 우후(兩界虞候)에게 주는 녹봉의 예에 따라 차등있게 시행하게 함으로써 권려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수사는 이미 체직하였다.”
당시 정치적후원을 받지 못했던 유극량은 전라좌수사 부임 4일만에 탄핵된다
이무렵 정철 등 서인세력이 기축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죄로
몰락하자 같은 서인세력인 윤두수의 입지도 약화되면서
원균이 이런저런 연유로 수사직이 박탈된것이다.(가장 큰 이유야 그의 성품이 문제였지만)
그 후 그동안 서인세력의 농간으로 한직으로 떠돌던 이순신이유성룡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전라좌수사에 발탁된다.이 문제를 두고 또 한번의 탄핵 상소가 이루어졌으나 이순신은 그대로 중용된다.
선조 24년(1591년2월16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이틀뒤인,선조 24년 (1591년2월18일)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이 당시 오히려 이순신의 수사직이 너무 파격적이라 사간원에서 등용에 대한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 했지만 선조는 이순신의 수사직을 그대로 중용한다.
이와같이 임란개전 이전만 하더라도 당시 조정의 인재등용에는 어떠한 기준점이 있는 것이 아닌 당파싸움에 의해 등용이 됐음을 알수 있다.
한편 원균이 경상우수사에 부임하게 된 동기는 기축사화 건으로 유배를 당했던 원균의 지지세력인 윤두수가 선조명에의해 풀려나와 조정에 복귀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억기는 독자적,선봉적 지휘권을 발휘하는 작전 수행은 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 수군 전투사를 들여다 보면 지휘장수는 늘 이순신이나 혹은 원균 옹호론자들은 원균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억기는 늘 그들의 지휘를 받았을까? 아님 지원만 했나?
먼저 이억기,이순신,원균의 남해 각 수영의 부임시기를 보자면, 이억기와이순신 공히 1591년(선조24년) 원균은 1592년 임란이 일어나기 3개월전 부임한다.
1591년 전라우수사 (이억기),1591년 전라좌수사(이순신),1592년 경상우수사(원균)
당시 조선의 해군전력을 보자면 ..
임란전 경상좌,우수영 의 전력이 조선 최대의 수군 화력을 보유.
경상우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관할지역이8관(官) 20포(浦)였던 것으로 추정됨.(많게는 15관 까지 보는 견해도 있음)
8관(官) : 웅천, 진해, 고성, 거제, 사천, 남해, 곤양, 하동
20포(浦) : 오아포, 가배량, 제포, 영등포, 적량, 옥포, 평산포, 지세포, 사량, 당포, 조라포, 안골포, 미조항, 상주포, 곡포, 소비포, 가덕, 삼천포, 천성보, 율포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5관(官) 5포(浦)
5관 :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
5포 : 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의 규모 차이가 납니다. 5관 5포로 경상우수영 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던 전라좌수영이 임란 개전 직후 동원한 판옥선이 24척인데 3배 정도의 진포를 가지고 있던 경상우수영의 전력이 모르긴 몰라도 전라본도 수영의 규모보다는 훨씬 더 컸을것으로 사료됨
임란전 각 포마다 기본적으로 대선이 2~3척을 가용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우수영 20포 * 2 산술적 계산만 보아도
대선같은 경우 40~50척은 보유..거기다 중,소 선을 합하면 100여척 정도는 보유하였을것으로 추정 할수 있음.
<징비록>에 경상우수영 전선 100척, 병력 1만이라는 기록이 있는걸 봐서 사료의 오차 범위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개전전 경상우수영의 수군 전력은 조선 최대의 병력으로 추정됨.
그러나 개전이 되자 처음으로 해상에서 왜선과 교전한
(함대 출동후 수영 귀환까지 상황으로 기준은 두겠습니다)
1.옥포해전(1592.5.7~8)에서(합포,적진포 해전포함)
전라좌수영 : 판옥선 24척 ,협선(연락선) 15척 ,어선 46척 인데 반해 (당시 좌수영 총 전력으로 판단됨.이후 각 수군의 현황보고 내용은 따로 기술하겠음)
경상우수영 :판옥선 3~4척과 협선 11척
성과:왜선 약 42 척 격파
원균은 수많은 함대를 어디다 두고 왔는지 판옥선 3~4척만이 존재..
원균이 가장 질타를 받는 이유가 일차적으로 일본에서 조선 공격시 기습적으로 감행을 한것을 이유로 들다하더라도 1차적으로
일본이 조선 함대와 첫 교전할수 있는 지역은 경상우수영이 아닌 경상 좌수영 관할이였음
경상좌수사 박홍 같은 경우는 급작스런 일본의 대규모 수군을 보고 놀라 자멸했다 치더라도 (박홍 또한 그냥 도망간것은 아니고
당시 소집동원한 병력이 1500~2000 여명 정도의 병력이 모여 있었음. 그러나 워낙에 많은일본의 대선단들 앞에 전의상실하고 도망하였음.
그렇다면 여기서 추론 할수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이 경상우수영으로 바로 들어온것이 아니라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경상우수영 함대들을 후일도모를 위해 최대한 많은 함선들을 안전곳이나 전라본도 수영쪽으로 이동을 시켰써야 하는데 , 그렇지 못한점
,두번째 만약 그러한 병력(수군)을 일시 모집할수 없어서 수많은 함선을 자침혹은 버리고 왔던점 또한 수사 자질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할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짐.
옥포해전 당시 경상우수영이 3~4척의 함선만 가지고 왔다는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함.
2.사천해전 (1592.5.29~6.2) 당포해전 포함(거북선 처음 출전)
전라좌수영: 판옥선 23척 ,거북선2~3 척
경상우수영: 판옥선 3척
성과:왜선 약 34척 격파
3.당항포,율포해전 (1592.6.4~6.7) 이때부터 전라우수영(이억기) 함대 칠전량(춘원포)해전 전까지 연합함대 구성
(이억기 함대가 지난 옥포와사천해전에 참가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설득력이 있는 추론은 임란전 각수영에는 관할 포 마다 2~3척의 배들이 나누어져 있었음.
이런 선단들을 전부 모집시킬수 있는 시간상 지체일 가능성이 가장 설득력이 얻고 있음.
일예로 일본의 조선 침략당시의 파발이나봉화가 전달된 순서를 보자면
경상좌수영->경상우수영->전라좌수영->전라우수영 순으로 이억기 함대가 가장 늦게 일본을 침략사실을 알고 병력을 규합하기 시작함.)
전라우수영: 함선 25척(1592.6.4 함류)
전라좌수영: 함선 23척
경상우수영: 함선 3척
성과:왜선 약 33척 격파
4.한산도,한골포 해전(1592.7.8~7.10)
전라우수영: 함선 26척
전라좌수영: 함선 24척
경상우수영: 함선 8척 (수리해서 보수한 함선이 추가됨)
성과:왜선 약 110여척 분파 및 나포
5.부산포해전(1592.9.1)
전라좌,우수영 연합함대 : 함대 81척 (세부 분류 사료 못찾음)
경상우수영: 함선 7척
성과:왜선 약 100여척 분파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 여러 가지 사료를 찾아보고 문의 해봤지만 , 부산포 해전 당시의
전라좌,우수영의 각각의 출전 함대 수는 현재로써 알길이 없음.
6.웅천,웅포해전 (1593.2.1~3.8)
전라우수영 : 함선 40척
전라좌수영: 함선 42척
경상우수영:함선 7척
성과:이당시 큰 성과는 없었고 조선수군의 사망자들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이시기의 왜란 해전사는 호불호가 갈려 (조선수군이 패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논의하지 않겠습니다.
7.제2차 웅포해전 (1593.5.7)
총 104 척의 함대가 출동하는데 원균이 기간내 전선 신조를 못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
경상우수영:함선7척
전라좌,우수영이:함선 97 척을 동원한 것으로 봄 ,좌우수영 비율은 비슷할것으로 판단됨
갑자기 많아진 함대의 수는 이억기가 기간내 함선 신조및보수를 15척 이순신이 9척을 신조및보수 한 것으로 보아 신조및수리
함선이 전라좌,우도 수영에서 투입된 것으로 보임.
성과:웅포에 왜선 약 900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보고 대치만 하다가 귀환함 성과 없음
여기까지 왜란사 해전은 이억기와이순신의 합작품으로 보는 것이 아닐는지??
왜 각종사서에는 이순신이 총 사령관(지휘관)이란 뉘앙스로 표기되어 있는지 ?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가된 것은 (1593.8)에 선조의 명에 의하여 통제사 자리에 앉는다.
!!그렇다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기전까지 이순신이 이억기와원균을 지휘했나??
선조25년(1592.7.9) 당항포와율포해전 전공으로 추측됨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우도 수사(全羅右道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과 협동하여 적선 39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수급(首級)을 바친 것은 단지 9급이지만 왜란 이후 전투에서 이긴 공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억기를 특별히 논상(論賞)하소서. 계본을 받들고 온 이흥상(李興祥)은 멀리서 행재소에 도달하였고 또 군공(軍功)이 있으니 6품에 상당하는 관직을 제수하고, 진무(鎭撫) 이근석(李根碩)에게도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소서. 계본 중에 기록되어 있는 군공에 대해서는 해사(該司)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억기 등이 노획한 회갑(盔甲) 따위의 물건을 중국 장수에게 가져다가 보여주었다.
선조26년(1593.1.11) 각도에 있는 병마의 숫자
답보(答報)하면서 헤아려 개진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천 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백 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천 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천 명, 수원부(水原府)에 주차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이상은 왕경(王京)의 서쪽에 있으며 경성(京城)과의 거리는 1일 정(程)이다. 】 양주(楊州)에 주차한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천 명, 양근군(楊根郡)에 주차한 의병장 이일(李軼)의 군사 6백 명,【이상은 왕경 동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1일 정이다. 】 여주(驪州)에 주차한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천 명, 안성군(安城郡)에 주차한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백 명【이상은 왕경에 있으며 1일 반 정이다. 】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천 8백 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3천여 명, 각처의 의병이 각각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데 합해서 약 5천여 명이다. 【이상은 왕경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2∼3일 정이나 4∼5일 정이다. 】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만 명, 울산군(蔚山郡)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박진(朴晉)의 군사 2만 5천 명, 창녕현(昌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성안(成安)의 의병 1천 명, 영산현(靈山縣)에 주차한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천 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주차한 본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만 5천명, 창원부(昌原府)에 주차한 본도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만 5천 명, 합천군(陜川郡)에 주차한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천 명, 의령현(宜寧縣)에 주차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천명, 거창현(居昌縣)에 주차한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천 명,【이상은 왕경의 남쪽에 있으며 경성과의 거리는 7∼8일 정이나 12∼13일 정이다. 】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앞바다에 주차한 본도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水軍) 5천 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만 명 및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만 명,....(하략)
(함대 출정기록으로 보나 병마의 숫자를 보나 임란당시 이억기가 관할하던 전라우수영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보다 훨씬 많은 함선과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수있음.)
선조 26년(1593.5.29)
상이 비변사의 당상관인 좌의정(左議政) 윤두수(尹斗壽), 좌찬성(左贊成) 정탁(鄭琢),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창연(鄭昌衍), 창산군(昌山君) 성수익(成壽益), 병조 참판(兵曹參判) 심충겸(沈忠謙)을 인견하였는데 좌승지(左承旨) 홍진(洪進),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박홍로(朴弘老), 지평(持平) 이수광(李睟光), 정언(正言) 이상신(李尙信), 검열(檢閱) 조유한(趙維韓)·신영(申泳), 가주서(假注書) 남이신(南以信)이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부산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적을 좌우에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이니 어찌 끝내 안전할 리가 있겠는가. 그들이 기세를 타고 곧장 쳐들어 온다면 대처할 방도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이들을 부산에서 몰아낼 수 있겠는가? 만약 그들이 바다를 건너가지 않는다면 중국이 우리 나라를 구원해 준 은혜는 시작만 있고 끝이 없게 되는 것이다. 경략의 자문에 ‘부산에 비석을 세워 왜적과 경계를 정하였다는 말이 있어서 의심하고 있다.’ 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마음이 허탄스러워 이러한 말들을 조작하였으니, 마땅히 속히 극구 변명해야 할 것이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마땅히 상께서 말씀하신 뜻으로 회자(回咨)하여 분명하게 변명해야 합니다.”
하고, 정창연은 아뢰기를,
“자문의 뜻을 살펴보면, 저들 역시 부산이 우리 나라 경계 안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말을 조작해서 회군(回軍)할 계책을 삼으려는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우리 나라에서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로 후일 변명할 구실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자께서 주문(奏聞)하여 흑백을 가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중략)
상이 이르기를,
“우선 이 자문을 보내고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펴서 조치하라.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적이 도성을 떠났으니 즉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고 있으나 나는 적들이 우리 나라를 쉽게 떠나지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의 장계를 가지고 온 사람이 ‘수전(水戰)을 할 때에는 반드시 왜적을 유인하여 바다로 나오게 한 뒤에야 공격할 수 있는데 지금은 아무리 유인하여도 나오지 않으니 공격할 만한 기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억기(李億麒)의 장계를 보아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니 수전 역시 할 수 없겠다. 또 화약(火藥)을 집집마다 활[弓]과 화살[矢]처럼 반드시 구비하여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였다. ....(하략)
위의 내용을 유추해보면 당시 선조는 각 수사에게 개별적으로 조선수군의 상황을 각각 장계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됨.
즉 세 수사 역시 수사 자격으로 누구의 결정을 받아서 한것이 아닌 각각 조정에 자기들이 관찰한 전황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유추할수 있음.
선조 28년(1595.2.20)
주역》을 강하고, 성영의 처벌·도원수의 체직 등의 일을 논의하다
<중략>
이항복이 아뢰기를
“이들 무리는 첫째 가는 자는 정병(精兵)을 삼고, 그 다음 가는 자는 농군(農軍)을 삼고, 그 다음은 또한 신수역(薪水役)을 시킬 수 있으니, 어찌 모두 헛되이 버릴 것이겠습니까마는 잘 거두지 못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판서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주 같은 경우는 그 유가 매우 많습니다. 그중에서 토민(土民)보다 나은 자는 그가 하는 대로 맡겨 두고 약간 영리한 자를 골라서 장무(掌務)로 정하였는데, 급료가 매우 고르지 못하고 혹은 대신 받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소신이 남하했을 때 ‘어느 사람이 대신 자기의 요미를 받아갔다.’고 정소(呈訴)한 자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비록 소신의 직책이 아니나 그 사이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잡아다 물었더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김의원(金義元)【일찍이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다. 】이 여기에 와서 또한 말하기를 ‘둔전(屯田)을 하여 이들 무리로 농군을 삼는다면 양식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 일을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신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선처 방법을 말해 보라.”
하니, 이항복이 대답하기를,
“장정은 골라서 활쏘기와 포쏘기를 가르쳐서 수군으로 보내고 노약자는 농군을 삼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때 들으니, 이억기(李億祺)가 이들을 가지고 둔전을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는 공사(公事)를 만들어 처리하라.”
하니, 특진관 유영경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항복이 아뢴 일은 비변사에게 이문(移文)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요즘 남쪽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으니, 그들 무리가 유리(流離)하여 굶어 죽기도 하고 혹은 도로 적중으로 들어간다 합니다. 어찌 공사가 없어서 그렇겠습니까. 봉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임란 개전후 전라우수영은 조선최고의 수군 함대와병력을 보유하였으며,이병력은 칠전량 해전까지 계속유지된다.
이처럼 이억기는 독단적으로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으며,(이순신과원균을)주도해서 해전을 치루고 둔전을 일궈 자체적으로 전라우수영 수군의 식량을 해결하였다.
이당시 띨띨한 선조가 명에 잘보이려고 조공을 갖다바치기에 바빠 군량미 가 모자라 굶어죽거나 배고픔을 이기지못해 탈영사병들이 속출했다. 그나마 이순신과이억기 는 자체적으로 수군병력들을 유지함으로써 남해안 재해권을 확보할수 있었다.
도원수 권율 같은 경우도 이 둔전에 관한 평가에서는 조정대신들에게 질타를 받았을 정도로 당시 식량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 또한 그리 쉬운일들이 아니였다.
원균같은 경우 과연 병력이 아무리 많았다고 해도 7년간에 걸친 왜란사에서 수군병력을 그의 리더쉽이나성격등을 보았을 때 유지를 할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사라지지가 않는다.
위의 사료상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시에 각 수영 수사들이 단일 지휘체계가 아닌 공동 지휘권 혹은 개별지휘권을 발휘하였고,세 수사중 누가 서열이 높고 낮음이 없었음을 유추할수있다.
결국 옥포해전부터(1592.5.7)~웅포해전(1593.5.7) 까지의 해전에서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니였다.
세수사의 공동 작품이였다는 것이다.원균이야 솔직히 곁다리 정도라 할수 있지만,이억기는
결코 이순신의 병력이나 함대보다 못하다고 보는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것은 (1593.8)부터 이다.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임기2년)이 왜란때 처음 생긴직책인데..그 1대가 이순신 이다.
그렇다면 삼도수군통제사 라는 직책이 당시에 강제성이 강력한 지휘권을 가진 직책이였나?
(당시 이억기나 원균이 이순신의 명령으로 강제성을 받고 따랐을지는 다시한번 연구해봐야 할 문제일 듯 싶다.)
어찌되었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가 강제성을 가지고있는 강력한 지휘권이라는 전제하에 1593.8 월(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임명된) 이후부터의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억기와원균지휘했다는 가설을 두고,참전했던 해전을 보자면,
당항포 해전과 장문포해전 정도를 들수 있다.
당항포 해전(1594.3.4)
지휘관-이순신,원균,이억기,어영담
어영담이 총지휘
함선:연합함대 124척
주력함선 어영담이 지휘하는 공격함대 편성
경상우수영,전라좌수영함대: 함선 10척
전라우수영: 함선 11척 (어영담이 전라좌우수영과경상우수영 함대의 지원을 받아 총 21 척 함선로 왜선 격파)
장문포 해전(1594.9.29)
조선최초 수륙 합동작전
이순신,원균,이억기,권율,곽재우,김덕령등
이 전투에서 쟁쟁한 장군들의 네임벨류에 비해 졸전 하다가 왜군의 피해보다 아군의 피해가 더 큰 패전을 맞음 .
이 두가지 해전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후의 해전이다.판단을 각자의 몫으로,
!!이억기는 이순신과 친하고 존경했기때문에 그를 따랐는가?
속으론 가능할수도 있다.이억기가 이순신의 무고를 변론했다고 (사실이억기가 이순신을 변론했다는 세부내용자료는 찾지못했음) 그를 존경한 것이 아니라 같은군인이고 같이 전투에 참가한 장수로써 주변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무고를 주장했다고 보는관점은 틀린것인가??
꼭 친하고 존경해야만 그의 무고를 주장할 수가 있는것인지 ,속으로야 존경할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친하고 존경하다는 논리적 접근은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에서 해석이 된것인지??
이억기는 이순신뿐아니라 원균이 통제사로 있던 칠전량(춘원포)해전도 참가한다.
당시 “조정의 명을 어기면 우리 세사람만이 죽으나 명령을 따르면 나라일에 크게 욕된다”고 말하면서 출정을 합니다..이 또한 당시 수군통제사인 원균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군인으로써 명령에 충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만약 이순신과는 친하고 존경하고 원균은 미워했고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면 원균이 지휘하는 칠전량 해전에 참가하여 패배의 원인을 알면서도 끝까지 맞서 싸웠을까요??
이억기는 당시 이순신을 좋아하고 원균을 미워한것이 아니라, 장수로써 조정에 충실했고 , 조선을 위해 싸운것이 아닌지??
이억기는 이순신과원균 모두를 같은 장수로써 인식하고 행동했다는 논리적 결론은 불가능한 것인지?
임진왜란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될 무렵 조정에서는 이억기에 대해 다시한번 그를 평가한다.
선조 31년 (1598.5.6)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하여 들리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설사 형세가 궁하여 육지에 내려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 수자리에 고생하였고,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여 적을 토멸한 공로는 잊을 수 없으니 치제(致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변사에 물어보라.’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억기(李億祺)가 육지에 내려 치사(致死)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교전할 때 힘을 다해 분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했다고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있고, 여러 해 동안 수자리에 고생하고 힘을 다해 적을 토멸한 공로에 대한 것도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미 포상(褒賞)의 은전을 베푸셨고 증직(贈職)까지 하였으니, 치제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치제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 35년(1602.7.18)
대사간 이상의(李尙毅), 사간 김대래(金大來), 헌납 윤길(尹), 정언 이구징(李久澄)·유색(柳穡)이 피혐(避嫌)하며 아뢰기를,
“이응표(李應彪)는 바로 이억기(李億祺) 관하의 장수입니다. 억기는 일찍이 응표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언약했었는데, 적과 접전하다가 선척(船隻)이 분궤(奔潰)될 때를 당해 억기는 오직 응표만을 믿고서 닻을 내린 채 기다리며 군관(軍官)을 시켜 큰 소리로 빨리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응표는 기(旗)를 눕히고 서둘러 노를 저어 도망침으로써 억기를 패하여 죽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직접 목격한 자도 있습니다. 배를 만들어 팔아 군량과 기계를 마련했다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변장이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응표는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경영했습니다. 배를 많이 만들어 경강(京江)으로 와서 장사하고 값진 목재를 곧바로 그의 집으로 수송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므로 통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들이 논한 것은 대개 여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변사에서 회계한 말을 보건대, 하나는 먼저 적선을 격파하고 이어 후방을 막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상사(上司)에 품보(稟報)하려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었다는 것으로, 신들의 논박을 사실이 아닌 것처럼 하였습니다. 신들은 모두 변변찮은 사람들로서 외람되게 언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말을 해도 제대로 신임을 받지 못하니, 뻔뻔스럽게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의 직을 체척하소서,”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80년대) 이순신장군에 관련된 그림책이나 위인전을 읽을 때 늘 원균은 뚱뚱하며 술 과 함께 살고 술마시다 왜군의 습격을 받아 허겁지겁 도망가다 죽는게 된다.그림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졸장과패장은 엄연히 해석되어 지는 부분이 틀립니다.원균의 옹호론자들이 가장 인지해야 할부분은 이순신 보다 월등하고 대등했었다가아닌 원균은 80년대 그림책이나 위인전에서 해석되어진 졸장은 아니였다는것을 먼저 인지시켜야할것이며, 이억기 또한 이순신의 후원세력이 아니라는 것 또한 바로잡아야 할것이다.
임진왜란사에서의 원균이 졸장 이였다면 , 그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경상좌수사 박홍 같은 인물이 더 부각되어야 할것이다.
역사의 해석은 후대의 몫이지만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제는 원균이 술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패전했다는 표현방법들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칠전량에서 원균이 술 마시다 왜군한테 패한 것이 아님을 한참이 지난후에 알게되었다.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해전사에 이순신 장군의 역할은 명랑해전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명장임음 부인할수 없는 일이다.
다만 ,당시 선조의 정치적입지와 당시 조정 대신(동,서인)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여러 명장들도 더 이상 정치적 해석이 되어서는 않된다고 생각하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오타도 있고 틀린부분도 있습니다.고수님들의 많은 지적과 오류 수정에 관한 고견 겸허히 받들겠습니다.
<참고자료-임진전란사,조일전쟁,조선왕조실록(국역),징비록(국역),원균과이순신,임진왜란(1966년원본 박종하),난중일기>
선무공신 이억기님에대해선 저도 아는게 별로없어서 패스^^
추천합니다 10+
글이 너무길어서 읽다가 ~~~~
여기분들 길면 안좋아합니다 군사겔 특성이라 빠르고 강하고 간결하게
부탁합니다 ^^
제가 친일주장한거 아니라는거 아시면서 왜이러신지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이제 그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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