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열이나라
세종대왕과 노비 제도에 대한 팩트체크
『경국대전』의 편찬 시기: 『경국대전』은 세종이 편찬한 것이 아니라 세조 때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된 법전입니다.
세종이 이 법전을 통해 이전 제도를 없애고 노비 제도를 강화했다는 주장은 시대적 배경이 맞지 않습니다.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차이: 세종이 1432년 태종 시절의 '노비종부법(아버지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을 '노비종모법(어머니의 신분을 따름)'으로 환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종의 종모법은 어머니가 양인일 경우 아버지가 노비여도 자식은 양인이 되는 법이었습니다.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무조건 자식을 노비로 만드는 악법인 '일천즉천(一賤則賤)'은 세조 때 확립되어 성종 때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습니다.
세종의 예외 조항 유지: 세종은 종모법을 시행하면서도, 40세 이상이 되도록 자식이 없는 양인 남성이 노비 여성에게서 얻은 자식은 양인으로 인정해 주는 등 천민이 양인이 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지속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노비 소유 사실 부합: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조선의 대표적인 사대부들이 수백 명의 노비를 거느린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실제 퇴계 이황이 자녀들에게 남긴 상속 문서(분재기)를 보면 남녀 노비 367명을 물려주었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 당시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층의 핵심 재산이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드는 형태가 아니라, 주인과 따로 살며 농사를 짓고 소작료 성격의 신공을 바치는 '외거 노비'로 서양의 중세 농노와 유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조선시대 노비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국왕 한 명의 단편적인 의지라기보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핵심 재산(노비)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 사대부 계층의 지속적인 요구가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에 가깝습니다. 현대의 인권 기준으로 과거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비판할 수는 있으나, 관노비에게 출산 전후 130일의 휴가를 주고 남편 노비에게도 산후조리 휴가를 주었던 세종의 복지 정책 등을 함께 고려하여 역사적 인물과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관점입니다.
근데 실체를 알고보면 무식해서 용감해진거임.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잘못된걸 절대 인정 안함.
근데 실체를 알고보면 무식해서 용감해진거임.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잘못된걸 절대 인정 안함.
경국대전, 종모법 강화로
이전엔 일부 자녀를 아버지 신분에 따라 양인으로 인정했던 제도 없애고 , 싹다 노비로만듬 ㅋ
우리나라 지폐에 율곡이이, 퇴게이황 이런 사람들도 수백명씩 노비거느림
세종대왕과 노비 제도에 대한 팩트체크
『경국대전』의 편찬 시기: 『경국대전』은 세종이 편찬한 것이 아니라 세조 때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된 법전입니다.
세종이 이 법전을 통해 이전 제도를 없애고 노비 제도를 강화했다는 주장은 시대적 배경이 맞지 않습니다.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차이: 세종이 1432년 태종 시절의 '노비종부법(아버지가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을 '노비종모법(어머니의 신분을 따름)'으로 환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종의 종모법은 어머니가 양인일 경우 아버지가 노비여도 자식은 양인이 되는 법이었습니다.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무조건 자식을 노비로 만드는 악법인 '일천즉천(一賤則賤)'은 세조 때 확립되어 성종 때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었습니다.
세종의 예외 조항 유지: 세종은 종모법을 시행하면서도, 40세 이상이 되도록 자식이 없는 양인 남성이 노비 여성에게서 얻은 자식은 양인으로 인정해 주는 등 천민이 양인이 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지속적으로 유지했습니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노비 소유 사실 부합: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조선의 대표적인 사대부들이 수백 명의 노비를 거느린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실제 퇴계 이황이 자녀들에게 남긴 상속 문서(분재기)를 보면 남녀 노비 367명을 물려주었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 당시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층의 핵심 재산이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드는 형태가 아니라, 주인과 따로 살며 농사를 짓고 소작료 성격의 신공을 바치는 '외거 노비'로 서양의 중세 농노와 유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조선시대 노비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국왕 한 명의 단편적인 의지라기보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핵심 재산(노비)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 사대부 계층의 지속적인 요구가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에 가깝습니다. 현대의 인권 기준으로 과거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비판할 수는 있으나, 관노비에게 출산 전후 130일의 휴가를 주고 남편 노비에게도 산후조리 휴가를 주었던 세종의 복지 정책 등을 함께 고려하여 역사적 인물과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관점입니다.
근데 실제로 더 한거 같은디...
임진왜란때 다 강간당해서 싸 질러놓은 것들이 많다...
몽골 침략 중국 침략 당해서 다 짬뽕국가 되버린지 오래
저런 토착왜구 사상과 철학을 갖고 있어도 이상할게 없다..
앞뒤 보지도 않고 그냥 내 생각이 무조건 맞아.
나라도 팔아먹을수 있다는걸 느끼게 된다
구한말에 태어났으면 일제앞잡이 노릇할 양반이구만
저정도는 해야 출연료 값 하는거지 ㅋㅋ
다른 빌런들도 더 분발해야한다
지금 학교에서 역사수업은 꼴랑 주1회
이제는 시험도 안봄
공부는 오직 국영수과 만 하고
그틈을 리박스쿨같은게 파고들고
엄청많이 보는 유튜브는 이상한게 넘처나고
그러니 이모양이 된것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볼줄이야 ㄷㄷ
미국다녀와서 충격먹고 돌변함. 쇄국정책 비판함
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협박하자
폐하를 모시는 무감(武監), 액례(掖隷)들이 흥분해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황현 매천야록 고종실록- 1905년 11월 17일
이미 궁은 일본군에의해 포위되었고 일본군및 매국노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당일 밤의 긴박한 상황이나 고종의 끝까지 거부하려 했던 저항 의지는 은폐된 기록임..
무식하면 공부좀하고 글 올리자..
그리고 이완용이 독립협회 2대 회장인건 맞는데..공금횡령으로 제명된건 왜 말 안하지?
일본군이 어떻게 전쟁한번없이 조선에 들어왔는데? ㅋㅋㅋ그게 가능할거라보냐?
민비가 직접 부른거아니냐? ㅋㅋ 동학농민운동과, 임오군란이 가장 시초
또한 인용된 매천야록의 기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아니라 1907년 고종 강제 양위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는 초기 개화파였으나 권력 지향적 기회주의로 변절해 결국 매국노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왜 본인 사비들어갔냐면 , 일제강점기전부터 조선은 그 작은 독립문 하나 지을돈도 없을정도로 가난했던것
그것도 모르고 문재인은 독립문에 가서 만세부른거고
그냥 정상 지능이라면 다 아는내용인디;;
임진왜란때도 나라를 하루만에 내준 경우는없었음 7년간 전쟁함
고종, 민비의 의도가 아니고선 절대 일어날수없는일 ㅋㅋㅋ
사극이라도 봐라 ㅋㅋ 이완용이 무슨 힘이있어
한국 성과 호적을 돈주고 사서 정착했지요
이혼하지 않았나요?
남자 ㅈㄴ 별로던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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