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읽었던 글인데, 다시 생각나서 찾아 읽어보니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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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내 휴대폰이 울렸다.발신 번호가 없는 낯선 전화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가냘프고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나는 미혼이고, 당연히 아이도 없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 말하려던 찰나,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나 떨리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어... 그래, 아빠다."
아이는 안도하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밝은 목소리로 재잘대기 시작했다.오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친구랑 싸운 일, 할머니가 맛있는 걸 해줬다는 일...나는 엉겁결에 맞장구를 쳐주며 통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첫 통화가 끝났다.
그날 이후, 아이는 종종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나는 어느새 그 아이의 '가짜 아빠' 노릇에 익숙해져 있었다.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아이는 시각장애를 앓고 있었고, 엄마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아빠는 아이가 아픈 후 연락이 끊겼다고 짐작될 뿐이었다.
"아빠, 나 이번에 눈 수술하면 아빠 얼굴 볼 수 있는 거야?""그럼, 당연하지. 우리 딸 눈 뜨면 아빠가 제일 먼저 안아줄게.""와! 신난다. 아빠, 나 수술 안 무서워할게. 꾹 참을게."
아이는 수술 날짜를 받아두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동원해 희망을 심어주었다. 인형을 사주겠다, 놀이공원에 가자, 맛있는 걸 사주겠다...비록 얼굴도 모르는 남남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아이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수술을 며칠 앞두고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응, 우리 딸. 왜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나... 수술 받으러 가기 전에 아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그래, 수술 잘 받고 나오면 아빠가 바로 달려갈게. 알았지?""응... 아빠, 사랑해.""나도 사랑한다."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수술이 예정된 날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예전에 통화하다가 얼핏 들었던 병원 이름을 기억해 내고 무작정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이의 이름을 대며 수술 결과를 물었다.
간호사는 잠시 침묵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환자분, 며칠 전 수술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는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다.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였지만, 내게는 딸이나 다름없었다.나는 병원 측에 양해를 구하고, 아이의 장례식장이 차려진 곳으로 찾아갔다.
영정 사진 속의 아이는 눈을 감은 채 맑게 웃고 있었다.상주로 앉아 계신 할머니께 조심스럽게 인사를 드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네가... 그 사람이구나. 우리 손녀가 매일 밤 통화하던 그 아빠가..."
할머니는 품 속에서 꼬깃꼬깃한 편지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네주셨다.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간호사 언니에게 부탁해 남긴 편지라고 했다. 비뚤배뚤한 글씨였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가 온 마음을 다해 쓴 글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펴 보았다.
"아저씨, 고마워요."
"저 사실은 아저씨가 우리 아빠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우리 아빠 목소리는 아저씨보다 훨씬 더 굵었거든요.""하지만 아저씨가 너무 친절하게 받아줘서, 그냥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어요.""아저씨 덕분에 나, 진짜 아빠가 생긴 것 같아서 너무 행복했어요.""나 수술 받다가 죽을 수도 있대요. 만약에 하늘나라 가면, 거기서 진짜 아빠 만나면 아저씨 얘기 꼭 할게요.""우리 아빠 해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빠."
편지는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나는 영정 사진 앞에서 소리 죽여 오열했다.아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하지만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진짜 아빠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랑해 줄 누군가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거짓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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