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룬제 군사대학. 1832년, 제정 러시아 시절에 세워진, 유서깊은 전통을 가진 고등 교육 기관입니다. 여러 이름을 가졌으며, 현재는 러시아 군사 종합 아카데미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에겐 공산혁명 이후 붙은 다섯번째 이름인 '프룬제 군사대학''이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죠.
1984년,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해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체르넨코를 만났고, 둘은 북한의 군사 간부와 국방 과학자를 양성하기위해 북한의 학생들을 소련으로 유학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 합의 이후, 1986년부터 1990년까지 5년간 250명의 북한 유학생들이 소련의 프룬제 군사 대학에서 유학하며 소련의 선진된 군사 교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250명은 집안 배경 빵빵하고 머리도 좋은, 소위 '엘리트'들이었죠.
자아, 이 250명의 엘리트들이 소련에서 가만히 선진된 교리를 배우는데만 열중했다면 모르겠지만,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뒤틀어질대로 뒤틀어진, 변질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지경이된 주체사상의 나라에서 그나마 멀쩡한 사회주의 체계가 돌아가고 통제도 덜한편이었던 소련에서 유학한 학생은, 그들의 조국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의 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사회주의 조국을 자랑하던 유학생들은 다른나라 유학생들에게 그 잘난 사회주의 조국은 '스탈린식 독재국가'라던가, '변질된 1인 숭배 국가'라는 반박을 들으며 질타당했고, 김일성의 '위대한', 압제자 일본제국을 몰아낸 항일 투쟁은 뿌리채 부정당했습니다. 뭐, 모두 다 맞는 말이었으나, 북한의 유학생들에게는 매우 충격으로 다가온 말들이었죠.
이와중에 몇몇 유학생들은 자주 운운하며 헛소리하던 북한이 참 마음에 들지않아 친소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KGB에 포섭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89년, 이젠 사회주의권을 영원히 바꿔버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폴란드엔 자유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소련의 위성국들은 하나 하나 빠져나갔으며, 동구권은 무너졌습니다. 사회주의의 큰형님 국가격이던 소련에서도 변화를 부르짖었으며, 중국은 진작부터 덩샤오핑의 지도하에 변혁노선을 걷고 있었죠.
북한의 유학생들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여과없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의 조국에서라면 볼 수 없던 광경이었죠. 영원할거라고 믿었던,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거라고 생각했던 사회주의는 허물어졌고, 유학생들은 이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식의, 1인 숭배적인, 그리도 씹어대던 이조 봉건시대를 연상시키던 사회주의는 과연 옳은것인가? 라고 말이죠. 유학생들에겐 주체사상에 대한 의문이 심어졌으며, 그리고 현 북한정권에 대한 충성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죠.
김정일은 이들을 가르키며 '전쟁이 나면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울 자들'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줬고, 전폭적으로 밀어주기도 했습니다. 뭐, 사실 맞는 말이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정말 열심히 싸우긴 할 친구들이었죠. 그러나 충성심은... 글쎄요?
그리고 91년, 이젠 소련 정권조차 붕괴했습니다. 유학생들은 북한으로 돌아왔습니다. 유학생들은 저들끼리 똘똘뭉쳐, 남한의 하나회를 연상케하는 일종의 사조직을 만들어 단합했으며, 머리를 맞대어 생각이란걸 하기 시작했죠.
당시 북한은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에게 권력이 막 넘어가는 와중이었고, 그 악명높은 세습 독재의 기미가 가시화된 시점이었습니다. 거기다 덤으로 북한도 슬슬 막장이 되돈 시기이도 했고요. 사회주의의 고향에서 제대로 되어먹은 사회주의를 배워서 '자칭' 사회주의의 근본주의자가 된판에 세습한답시고 돌아간다는 나라 꼬라지도 참 마음에 안드는데, 거기다가 이 식단은 또 뭐래요? 쌀밥이 나오면 뭐합니까? 반찬이 한심한 수준인데. 거기다 이 담배는 또 뭐래요? 이 술은 또 뭐고요? 하나같이 저급품들 뿐이었습니다. 군사 엘리트들에게 나름 좋은거 준다고 줬는데도 이꼴이었죠. 소련이 그리워지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요? 소련이라는 나라는 이미 망했는데 말이죠.
이래저래 불만을 많이 가지게된다가 자기들끼리 똘똘뭉쳐 러시아어로 쑤군대던 유학파들은, 이러한 부류가 늘 그렇듯, -지배층 입장에서- 불순한 생각을 품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대가 강해야 사회주의가 무너지지 않을것이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죠.
제아무리 8월 종파사건으로 모든걸 김일성의 소유물로 만들어버린 북한이지만, 그럼에도 공산주의의 흔적이 남은 국가였고, 세습이라는건 정말 납득하기 힘든것이니까요.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 세습을 할때면 김가네의 힘이 약해지고 왕실의 비호를 받는 문민 테크노크라트들이 약해지며 군부 (= 또라이 강경파)의 힘이 강해져 천안함사건을 일으키고 연평도에 포격질을하는등 온갖 도발행위를 일삼는게, 바로 저 이유때문입니다. 세습은 어쨌건 저들의 상식에서도 상식을 벗어난것이었으니까요.
유학파 장교들은 폭발했습니다. 더이상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된다 싶었죠. 어쨌건 북한은 인민의 나라, 공산주의의 나라로 남아야만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대로만 간다면 북한은 명실공히 인민을 위하지 않으며 공화국도 아닌 김씨 가문의 소유물이 될것이었습니다.
어쨌건,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사상이오 신념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런 연유로, 드디어 '거사'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다가오는 1992년 4월 25일, 조선인민군의 창건 60주년 기념식에서 있을 사열식에서 전차포로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일본의 천황같은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 북한을 단합시켜 땅끄를 몰고 남한을 침공, 조국 통일을 이룩하자는게 이들의 계획이었죠.
거사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프룬제 유학파 출신의 김일훈 소장의 평양방어사령부 소속 전차사단의 전차들이 열병식에 사용될 예정이었고, 이 전차로 그들은 김정일을 날려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거사는 실행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와중에, 생각치도 않은곳에서 일이 틀어졌죠. 인민무력부장 박기서가 이의를 제기한겁니다. 이 기념식은 인민무력부에서 여는건데, 왜 전차는 인민무력부의 것이 아닌 평양방어사령부의 것을 사용하느냐, 하고 말이죠. 김일성의 고종사촌이라는 인맥을 사용한 박기서는 부득불 우겨대어 결국 평양방어사령부의 전차를 인민무력부의 전차로 바꾸었습니다. 거사는 이렇게 틀어졌습니다. 열병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고, 김정일을 향한 포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담자들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열병식이야 늘 있는것이었고, 늘 있는 열병식엔 언제나 돼지놈들이 나와서 발코니에서 지켜보고 있을테니까, 다음 기회는 늘 있는것이었죠.
하지만 또 일은 이상한데서 틀어져버렸습니다. 러시아는 소련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첫 쿠데타 음모가 실패하자 기존 KGB의 간부였던 한 사람이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고발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전해 들은 김정일은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
라고 분노하면서 조선인민군의 방첩기관인 인민군 보위국에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제공 된 명단을 들고 친소파 장교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북한 정권은 결국엔 프룬제 유학생들로 구성된 사조직의 존재와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룬제 유학생들은 물론이오, 그들의 가족, 그리고 과거 유학시절 그들의 감시를 담당했던 보위부 장교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했습니다. 심지어 이 영향을 받고 노동당과 내각의 소련 유학파들도 날아가버렸죠. 김정일에 대한 반역 모의는 기록으로도 남아서는 안되는 일이었기에,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 장교들과 관료들은 왜 당이 돈들여 키운 엘리트들이 갈려나가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후일, 2001년, 중앙당에선 이러한 대숙청이 남조선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엘리트 장교들을 갈아버리기 위한 일이었다고 해명했으며,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던 유학파 장교들을 간부에 등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위장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숙청을 피한 유학파 장교 대부분이 군복을 벗어야만 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장교들조차 고위직엔 절대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기점으로 김정일의 시대는 철저히 자주고립의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 그나저나 남한이 이정도 조작능력을 진짜로 가진거였다면 참 좋았겠네요. 그러면 할수있는게 몇개야 오메...
여튼 이렇게, 북한에 존재했던 체제 변혁의 움직임은 종결되었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였죠. 뭐, 그리 아쉬움이 들지는 않습니다. 이들도 결국 남한을 침공하기로 결의했던 개새끼이오, 사회주의가 붕괴하던 순간에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바보들일뿐이니까요. 거 참, 인간 장벽 만들던 사람들 보고 배운거 없었나?
출처 :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9962
덕분에 배우고 갑니다
지금 같이 핵위협에 시달리지도 않고 말 입니다.
예전에 김영삼 시절에 북폭을 막았다고 모두들 칭찬하고 안도 하였습니만,
핵위협이 한창 고조에 다달았을 때는, 그때 차라리 북폭을 했어야 하는데 라는 글들이 많았지요.
시작됐다면...음 당시는 지금 처럼 대한민국이 첨단무기로 북한을 압도하는 상황도 아니였고
미국도 걸프전이 끝난지 얼마안된 상황에서 전면전을 치루어야했으니 지금보단 엄청난/많은 피해를 각오해야 했을겁니다.
거기에 미2사단 역시 인계철선 역활도 휴전선에 배치 되어있던 시절이였구요.
걸프전 직후라도 해도, 결과는 같았을 껍니다.
two-war strategy 전략 자체가 유럽-중동,유럽-아시아,중동-아시아 두개의 전장을 상정한 계획 이니까요.
미국이 two-war strategy 버린 시기는 2014년 오바마 때 였고, 이때 전략은 ONE-PULS로 바뀝니다.
한쪽에서 전쟁을 치루고, 한쪽 전장은 유지를 하다는 전력으로 바뀌었죠.
어차피 저 시기때는 우리군의 역활은 미군의 증원이 올때 까지 남침을 최대한 잡아두는 역활이였으니까요.
거기에 앞서 이야기 했듯이 주한미군 2사단이 인계철선 역활로 전방에 주둔 하던 시기였죠.
또한 92년이라고 해서 북괴 전력이 우리군을 단숨에 격파하고 내려 올만큼 우리군 역시 만만한 존재는 아니
였습니다. 6.25처럼 변변한 전차 와 전투기,포병세력이 없었던 시절의 국군도 아닌데 말 입니다.
F-4,F-5라고 하지만 저쪽 역시 MIG-19,21이 주력이였던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또한 화학무기 전력 역시 비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은 서방측 2위 보유 국가 였습니다.
해군은 창군 이래 단 한번도 북한 해군에 전력적으로 밀린적 없었던 유일한 군종 입니다.
참담하는 표현은 주변 일본 과 비교했을때 이야기죠.
그리고 당시에 최신 자주포 였던 K-55를 붕어빵 찍듯이 뽑아내던 시절이였습니다.
어차피 북진은 작계에 따라 미군증원 후 올라는거였으니까요.
여기서 제일 중요 포인트는 주한미군 2사단이 전방지역에 배치 되어 있었거,
미국 역시 two-war strategy 전략을 유지 하던 시절 였다는 겁니다.
걸프전 당시에도 걸프만에 미군 전력 집중으로 인하여, 동북아의 미군전력 감소 또는 지원이 어렵지 않냐의
우려를 미국은 two-war strategy 전략을 운운 하면서, 미군은 두개 전장에서 승리 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하면서 남한정부를 다독이며, 북한에 대해서는 딴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죠.
어차피 전쟁은 각오를 했던, 어이없게 시작을 했던간에 전쟁 개시면 일단 큰 피해를 입을수 밖에 없습니다.
92년이나 지금이나 피해 경중만 다를 뿐이지, 전쟁으로 인해 큰 물적,인적 피해는 똑같다는 겁니다.
지금은 유사시 특히 북진시 자포자기식 핵공격도 감안 해야 되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거죠.
제가 말하는 요지는, 핵공격의 위협을 머리에 지고 사는것 보다 차라리 그게 없었던 그 시절이 전쟁을 치루기에
는 더 낫았는 겁니다.....거기에 상대가 일방적으로 걸어 온 전쟁을 피할수도 없는 상황 이잖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 였으면, 쟤들 골백번은 내려오고도 남을 존재 였다는 사실은 잊지 마세요.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니까, 주저 하는 겁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머리가 깨어난다는걸 느낍니다 ㅎ
잘보고갑니다
늦은감이있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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