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손절했으면 전력을 보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독일군이 3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스탈린그라드에 쳐들어갔지만, 소모전 끝에 20만명 이상이 갈려나갔고, 최후에 남은 9만명도 소련군에게 항복했죠. 소련군이 지구전을 펼치면서 장기전으로 흐르니까 독일군 내에서도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나왔는데, 히틀러는 '후퇴 금지. 현 위치 사수.'라는 명령을 전선에 하달했고요.
언제 손절했으면 전력을 보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독일군이 3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스탈린그라드에 쳐들어갔지만, 소모전 끝에 20만명 이상이 갈려나갔고, 최후에 남은 9만명도 소련군에게 항복했죠. 소련군이 지구전을 펼치면서 장기전으로 흐르니까 독일군 내에서도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나왔는데, 히틀러는 '후퇴 금지. 현 위치 사수.'라는 명령을 전선에 하달했고요.
당시 포위당한 6군 과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4기갑군 일부 함께, 파울러스가 진언 한대로 서쪽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 했으면 포위망 바깥의 4기갑군 잔존 병력 와 나머지 돈집단군 가용 병력을 총 동원하여
탈출 작전을 했을때 가능성을 굉장히 높았습니다.
당시 독일군의 전투력 과 전력을 봤을때 충분히 해낼수 있는 능력은 되었습니다.
이후 이루어진 스탈린그라드를 포위망을 조이기 시작하여, 겹겹으로 포위망을 형성을 소련군을 만슈타인이
급조 된 호트기갑군으로 구출 작전을 펼쳤을때도, 호트기갑군은 엄청난 선전을 하면 스탈린그라드 외곽 40Km
까지 뚫고 들어갔으니까요.
이런 사실을 봤을때 포위망이 넓게 형성 된 천왕성 작전 초기에 탈출을 시도했으면 독일군 능력을 봤을때
충분 했다는거죠.
문제는 스탈린 이름이 들어간 이 도시에 편집증이 도진 히틀러 과 공중보급을 충분히 해줄수 있다는 괴링의
허언그리고 히틀러의 명령을 금과옥조 처럼 여기던 파울러스 덕분에 6군 과 4기갑군 일부가 결국 괘멸 당하죠.
근데 여기에 나름대로 반론도 존재 합니다.
독일 6군의 희생으로 캅카스 지역에 깊숙히 진격한 A집단군이 무사히 탈출 할수 있었다라거죠.
독일군의 청색작전대로 라면 스탈린그라드가 중요한 요충지 이긴했지만, 저 정도로 소모전을 벌여가며 필히
점령 해야 할곳은 아니였다는 겁니다.
단지 스탈린 이름이 석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두 독재자의 자존심 싸움장으로 변질 되었다는게 문제였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 하면서 독일은 독일군 전체가 6개월간 쓸수 있는 물자,보급품 그리고 생산력
1년치에 해당 되는 자원을 저기서 소비 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울수 있는 능력치를
벗어나는 바람에 이후 계속 물자 와 병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면서 독소 전선에서 주도권을 잃는 동시에
공세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2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소련 아니였으면 상륙도 못하고 독일 점령 못했음. 전쟁만 더 길어졌을 수도요.
스탈린그라드... 독일도 소련도 엄청 갈려나간... 소모전... 날씨도 최악이라 얼어죽은 애들이 태반이었음.
당시 포위당한 6군 과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4기갑군 일부 함께, 파울러스가 진언 한대로 서쪽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 했으면 포위망 바깥의 4기갑군 잔존 병력 와 나머지 돈집단군 가용 병력을 총 동원하여
탈출 작전을 했을때 가능성을 굉장히 높았습니다.
당시 독일군의 전투력 과 전력을 봤을때 충분히 해낼수 있는 능력은 되었습니다.
이후 이루어진 스탈린그라드를 포위망을 조이기 시작하여, 겹겹으로 포위망을 형성을 소련군을 만슈타인이
급조 된 호트기갑군으로 구출 작전을 펼쳤을때도, 호트기갑군은 엄청난 선전을 하면 스탈린그라드 외곽 40Km
까지 뚫고 들어갔으니까요.
이런 사실을 봤을때 포위망이 넓게 형성 된 천왕성 작전 초기에 탈출을 시도했으면 독일군 능력을 봤을때
충분 했다는거죠.
문제는 스탈린 이름이 들어간 이 도시에 편집증이 도진 히틀러 과 공중보급을 충분히 해줄수 있다는 괴링의
허언그리고 히틀러의 명령을 금과옥조 처럼 여기던 파울러스 덕분에 6군 과 4기갑군 일부가 결국 괘멸 당하죠.
근데 여기에 나름대로 반론도 존재 합니다.
독일 6군의 희생으로 캅카스 지역에 깊숙히 진격한 A집단군이 무사히 탈출 할수 있었다라거죠.
독일군의 청색작전대로 라면 스탈린그라드가 중요한 요충지 이긴했지만, 저 정도로 소모전을 벌여가며 필히
점령 해야 할곳은 아니였다는 겁니다.
단지 스탈린 이름이 석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두 독재자의 자존심 싸움장으로 변질 되었다는게 문제였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 하면서 독일은 독일군 전체가 6개월간 쓸수 있는 물자,보급품 그리고 생산력
1년치에 해당 되는 자원을 저기서 소비 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울수 있는 능력치를
벗어나는 바람에 이후 계속 물자 와 병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면서 독소 전선에서 주도권을 잃는 동시에
공세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2차대전 당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미군의 참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캅카스지역의 유전을 확보해야 독일은 서부전선에 원활한 보급이 가능했거든요.
그래서 그지역을 확보를 했으나
스탈린 그라드를 치지 않으면 안전한 원유 수송로의 확보가 힘들었죠, 독일이 아무런 생각없이 들어간건 아니에요.
그뒤 스탈린과 히틀러의 똥고집이 작용하긴 했지만. 원인은 석유보급이 원인입니다.
결국 미군의 참전하는 순간 독일은 졌다고 보면 되죠.
시간이 지나면 누가 먼저 치든,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사항이였습니다.
단지 히틀러가 먼저 선수를 쳤다는거죠.
두 독재자인 히틀러 와 스탈린이 자신의 군대를 말아먹는 과정이 똑같았습니다
단지 순서의 차이일뿐....
히틀러는 초기에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독소전 초기에는 간섭이 덜 했지만,
모스크바 전투 이후 군부의 대한 입김이 커지면서 장악을 하게 됩니다.
편집증에 가까운 "후퇴 불가"로 인해 많은 독일군이 특유의 유연성 과 기동성을 살리지 못하고 매몰.
스탈린은 초기에 군부를 완전 장악 작전 하나하나 시시콜콜 간섭, 역시 후퇴불가를 외쳤으나
독소전 초기에 막대한 병력 과 물자를 말아먹은 후 자신의 실수를 인정.
모스크바 전투 부터는 군부에 전쟁을 일임하고 자신의 간섭을 최소화 하려 합니다.
여하튼 덕분에 독소전 초반에 러시아는 괴멸적 피해를 입으며 패퇴 하지만 국가 생산시설을 동부로 옮기고 전 국토가 전시 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전선에서 인력을 갈아 넣어서 방어 하는 동안에 말이죠... 소련이 전시체재로 전환 되고 미국의 막대한 물량 지원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안 치루었다고 해도 동부전선을 개장한 이상 그 병력은 결국 동부전선 어디선가 갈려나갔을 겁니다. 독일군 전력의 70%에 달 하는 전력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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