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했다는 첨자진입니다.
2차세계대전에 티거전차가 했던 대형입니다.
어째 모양이 비슷하죠. 저렇게 대형을 구성하는 이유는 옆에 아군의 도움을 쉽게 받기 위함도 있고, 정면과 측면의 적에게 대응하기 위함입니다. 현대전에서 V자형태로 대형을 구성하는 이유는 십자포화로부터 피해를 최소한으로 받기 위함입니다.
열병기로 바뀌면서 십자포화를 받게 되면 궤멸 확정이 되게 됩니다. 따라서 무슨짓을 해서라도 십자포화를 피해야만 했고, 때문에 만들어진 대형중 하나가 V자 대형입니다.
원리는 대충 이런겁니다.
그림을 보시면 측면에서 쏘게 되면 그야말로 일렬로 늘어선 병력은 화력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총알이 관통을 한다면 원샷 투킬도 가능하죠.
때문에 V자 대형이 만들어집니다.
이런식이면 한발에 열명이 꿰뚫리는 사태를 피할 수 있지요. 아군 입장에서는 적에게 적당한 대응도 가능합니다.
보통은 이렇게 십자포화안에 넣을려고 아군이나 적군이나 안간힘을 씁니다. 저런 대형은 냉병기나 열병기 공통사항이구요.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이 저런 형태의 십자포화입니다. 냉병기 시절만 해도 개인기로 어찌 어찌 해볼만 했다면, 열병기로 넘어가면 저런 십자포화에 걸리면 얄짤 없습니다.
저런 십자포화가 측면을 강타하는 것이고, 소부대 전술에서 측면을 노려라고 하는게 이런겁니다. 물론 머리로 생각하는것과 실현시키는것은 하늘과 땅 차이죠. 그리고 저런건 상대도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도박형태가 됩니다. 뒷치기가 가장 좋기는 한데... 문제는 뒷치기 하다가 아군끼리 총격전을 벌일 수 있습니다. 뒷치기는 효과가 좋은만큼 리스크도 그만큼 증가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첨자대형은 전형적으로 포화를 주고 받을때 하는 대형입니다. 전근대라고 해도 화살과 노가 있었기 때문에 저런 대형이 유효 했을 겁니다. 일본군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시에 재수없으면 십자포화에 걸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겠지만, 배라는 물건은 일자대형이 화력을 집중시키기에 가장 유리하기 때문에 일자대형이 좋기는 한데.. 설명 드렸다시피 적이 화기를 가진상태에서 일자대형으로 늘어서게 되면 "죽여주세요" 하는게 되어 버립니다. 특히나 왜군의 배는 빠르고 조선의 판옥선은 느리기 때문에 미리 대응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해 놓고 이동한다음, 적을 십자포화에 가두는 거라고 봅니다.
하지말라고 하는 판에 접근전을 했다는 이들이 있어요?
100% 난중일기 안 본 사람이거나, 평가절하를 위해 밑밥을 깔고 있거나 입니다.
대장군전 사진인데, 아마도 조선수군은 이런 발사체로 곡사를 했을 겁니다. 곡사로 해야만 최대 사거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당시 활도 대부분 곡사를 했고, 현대의 직사포라는 물건도 결국은 곡사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양과 차별점은 서양의 대포는 궤적을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저런 대장군전은 눈으로 날아가는 궤적을 볼 수 있습니다. 화살도 애기살이 아닌다음에야 눈으로 볼 수 있는데 저런 거대한 물체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즉 말인즉슨 궤적을 보고 수정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서양의 대포는 저런 발사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궤적을 볼 수 가 없고, 궤도수정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1차세계대전까지도 서양의 전함은 직사에 대한 대비책만 강구했을만큼 곡사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습니다. 그 유명한 유틀란트 해전에서 곡사에 대한 이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의 대포는 떨어지는 명중율과 궤적확인이 불가능함에 따라 근접해서 포화를 주고 받았다면, 조선 수군은 눈으로 보면서 탄도수정을 했을 겁니다.
조선은 승자총통류의 개인화기에도 화살을 사용했기 때문에 대형화포에 화살을 쓴다는 개념이 낮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칠전량해전에서 일방적으로 궤멸되었던것도 설명이 되는데, 왜군은 조총을 사용하기 때문에 야간에서 쏘는게 꺼리낌이 없었다면, 밤이라서 탄도수정을 못하는 조선수군은 화포도 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접근을 허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밤에는 저런 큰 물건이라도 보이지가 않으니까요. 맞출 수 가 없을 겁니다.
밤에는 예광탄같은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당시에 그런 물건이 있을리가 없지요.
짚단에 불붙여서 나무에 불붙여보세요
몇단이나 필요할지?
그것도 바다위에서?
전형적 책상물림사고방식 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왜군의 배는 내구성이 빈약하다고 했는데, 아마도 곡사로 배밑창까지 뚫어버렸을 겁니다. 철촉이 왜 있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목선이라도 배밑창이 뚫리면 침몰합니다. 남북전쟁때나 미영전쟁에서 배밑창을 뚫기 위해 잠수함을 개발했다는걸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시도 목선이었는데, 밑창이 뚫리면 침몰입니다.
그리고 모비딕소설을 떠올려 보시면, 모미딕이 배밑창을 뚫어버렸죠. 이 소설은 모카딕이라는 고래가 기초가 되었다고들 하는데, 이고래가 당시 목선을 들이받아서 목선이 침몰했습니다. 배밑창이 뚫리니까 목선도 침몰해 버린겁니다.
역사학자도 자료 부족으로 정확한 사정을 알기 어려운 만큼 아마추어도 다양한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접근전을 했다는 건 난중일기를 보면 말이 안되요.
상부갑판은 천지, 선내는 비격진천뢰, 선체와 흘수선은 현황과 장군전.
조선수군의 접근전 훈련수준과 상관없이 수가 충분치 않기에, 하나하나의 사상자가
전력약화에 큰 문제를 발생할 수 있으니 화약수급과 판옥선 방어력, 연안항해술과
통신, 정찰에 그렇게 신경을 쓴건데, 도대체 접근전을 했다는게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이순신 장군도 옥포 해전?때 총에 맞았고
부산포때에는 정운이 총같은대포? 대포같은총?에 맞아서 전사 했죠
대장선의 장군이 입은 갑옷이 뚫릴 정도의 거리를 허용했더는건 가깝게 싸웠다는걸 의미 하는거지만 그렇다고 배를 붙이며 싸웠다는 말은 아닙니다
대형의진 안에서 두세척이 짝을 지어 소규모 전술적 행동으로 배가 붙는 행위를 차단 했을 거라 보고요 앞열의 배가 부서져서 가라앉고 있으면 작은 왜선은 그걸 뚫고 들어올수가 없습니다. 가깝게 싸웠지만 그렇다고 배를 붙이고 싸우지는 않았을거라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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