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아주경제기사중...
https://news.zum.com/articles/47261055
구국의 영웅, 마침내 순국하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6시 30분,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 위수구금소를 나섰다. 위수구금소 간수장(看守長) 다쓰다 소토지로(立田外次郞)와 간수 2명, 헌병 3명의 호위 아래 7시 15분 형장에 도착했다. 이때 윤 의사의 모습은 체포될 때 왼쪽 손에 들었던 중절모자를 쓰고 양복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형장은 이시카와현(石川縣)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다.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없고, 높이 약 7m의 단애(斷崖)가 돌기(突起)되어 있어 사격에 적합한 장소였다.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는 육밀(陸密) 제489호로 ‘윤봉길의 압송 및 사형집행은 극비로 시행하라’는 명령서를 제9사단장에게 하달했다.
이에 형장으로 가는 길 요소요소에 헌병을 배치하고, 특히 형장은 보병소대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철통 경계를 했다.
전일 선임된 형장 입회자는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가나자와 위수구금소장, 육군 법무관 감옥장, 제9사단 군법회의 녹사, 군의관, 가나자와 위수구금소 간수장이다. 관계자 이외에는 신문기자는 물론 그 누구도 접근을 금지했다. 형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根本莊太郞)는 군의관 세가와 요시오(瀨川吉雄)에게 윤봉길에 대한 건강진단을 실시토록 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언도된 사형을 집행한다’며 윤 의사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윤봉길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간단 명료(明瞭)하게 답했다. 이어 헌병들은 윤 의사의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십자가모양의 형틀에 양손을 두 마디씩 묶었다. 사형 집행은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녹사(錄事) 다치무라 규베(立村久兵衛)는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그 순간을 기록하여 육군대신에게 보고했다.
정부(正副) 사수 2명이 윤 의사 전방 10m 앞에서 ‘엎드려쏴’ 자세로 사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검찰관의 신호로 7시 27분 쏜 정사수(正射手)의 제1발이 윤봉길 의사 양 눈썹 사이에 명중했고, 7시 40분 군의관이 절명(絶命)을 확인했다. 유해는 노다산 육군묘지에 인접한 가나자와시(市) 공동묘지의 쓰레기하치장 옆 사람이 다니는 좁은 통로에 평장(平葬)으로 묻고 그 흔적을 없앴다.
이렇게 윤 의사의 유해를 극비리 암장한 다음 일제는 유해가 발굴될 때까지, 14년간 유해를 짓밟고 다니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무릎을 꿇어앉힌 채 십자가모양의 형틀에 묶어 처형, 그의 기개를 꺾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미소를 띠며 당당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남을 청년 의사 윤봉길. 25세의 나이로 ‘대한남아로 할 일을 다 하고 미소 띤 얼굴’로 생(生)을 마쳤다.
더 많은 분들 보실수 있도록 추천 부탁드립니다. ㅠㅠ
(추가)
윤봉길의사의 가족
풀 색깔 좀 바꿔보세요.
애초에 현실감을 높여보겠다고 흑백사진에 색깔을 입힌거 아닌가요?
계절을 감안해서 배경도 신경을 좀더 쓰면 좀더 현실감이 있을거라고 조언한 것 뿐이에요.
뭔 불만들이 그리 많은지?
끝까지 당당한 모습과 표정을 보고 저도 한참을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모두 화이팅~
어찌 잊으리오
토왜 이 기생충들이 없지는 그날까지...
도움을주는지..
지들도 찔리겠지
대한의 수호신이 되시어 만대까지 굽어보소서!
나도 기개있게 살아야겠습니다
지금도 수호신이 되시어 대한민국을 지키고 계실 겁니다.
No japan
의사님을 추모합니다... 꾸벅~!
물론입니다. 계속 해 나아가야죠...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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