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74년생)
저희집이 어려서 좀 가난하여 이른 나이에 일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하였습니다.
서울 오류초등학교를 나왔는데 당시 오류2동에는 고아원이 있었고
대부분의 신문을 돌리는 아이들은 고아원 출신이거나 혹은 집에 어려운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에 한명이었고요
정확하게 석간신문 158부를 돌렸으며 당시에는 색이라구 불리는 백팩에 신문을 가득넣고 옆구리에
잔뜩 들고 출발을 하곤 했습니다.
배급사에 신문이 도착하면 전단지를 사이에 넣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당연히 숙련자는 빨리 넣고 출발하고 초보자는 늦게 출발합니다.
그깟 종이가 한장씩 더 들어갔을 뿐인데 무게가 상당히 올라갑니다.
혹은 끌차라고 하는 것에 신문을 실고 출발을 합니다.
신문을 가지고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158부를 배정 받았지만 실제는 160부 - 162부 정도 들고 나옵니다.
신문을 돌리다가 누군가가 신문달라고 하면 당시 200원을 받고 신문을 팔았습니다.
2부만 그렇게 팔아도 그날은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보통 3시 시작을 하고 6시 - 6시 30분 정도면 끝이 납니다.
늦으면 7시 정도에 끝납니다.
당시 월급은 3만원
운이 좋아서 신문을 보겠다고 신청하는 집이 있으며 그날 500원을 받았습니다.
3만원이 적은 돈 같지만 당시 초등학교 육성회비가 5천원 - 6천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락실 가서 오락 한판에 50원 쭈쭈바 50원
학교에서 한달 우유값이 2500원 정도 하던 때라 어린 저에게는 3만원이면 큰 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석간 신문은 신문배달원이 수금도 같이 하였습니다.
수금이 잘 안되면 신문을 돌리고 와서도 다시 전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어느날
수금이 안되는 집이 있어서 전표를 가지고 다시 나갔습니다.
저녁에 도착하여 벨을 누르고 수금하러 왔다고 하니 문을 열어 준 것은 같은 반 여자아이...
여자 : 어?.....00아
나 : 어......어 ....... 신문값이 밀려서 .....
여자: 엄마 !!!
나 : ...............
잠시 후 아주머니가 신문값을 가지고 나오셨고 저는 창피함에 인사도 안하고 나왔습니다.
다음날 우리 반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00아 너 신문 돌린다며?"
"어....그냥 해보고 싶어서...."
창피하고 창피하고....창피했습니다.
아무도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는데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신문을 돌린다는 것을 몇몇은 이미 알 고 있었는데
그날 따라 신문을 돌리는 내가 창피했습니다.
슬픈건지 . 짜증나는 건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기분을 억누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린 마음에 신문돌리는게 너무 창피해서 그날 하루종일 아무하고도 말도 하지 않고 도시락도 혼자 먹었습니다.
그 때부터 친구들에게 무언가를 사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내가 가난해서 신문을 돌리는게 아니라고 말하듯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 돈을 많이 썼습니다.
그렇게 나의 초등학교는 나의 자격지심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ㅣ
.
..
나의 12살의 어느날 그곳에 서있을 나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00아 고마워 ......너는 잘했고 ...멋졌어 .....
너는 너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고 가난하다고 쓰러지지 않았어
비록 남들처럼 화려하게 비상하지는 못했지만 거친 파도에도 좌초되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
너의 배 위에 웃으면서 뛰어 놀고 있는 와이프와 딸래미를 봐
00아 너는 잘 버텨왔어
그리고 아직 너의 배는 더 멀리 갈 수 있어
하늘을 날지는 못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넓은 들판이 되었어
이제 더 멀리 갈 수 있게 해준 나의 12살아
넌 잘했어
스스로 개척하고 열심히 살아오신 아우분께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행복하십시요...두배로
그 일이 발단이 되었으니 진짜 멋진일입니다.
지금은 165CM 에 88KG 입니다. .ㅜㅜ
저보다 훨씬 오래 되었나 보네요
저 때는 석간은 3만원
조간은 9만원 수준이었어요
120부에 6천원이면 아이고 선배님~~~~
조간 신문은 아파트가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예전에는 아파트가 새벽에 엘리베이터를 꺼놓는 곳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아파트는 한부 배달하러 꼭대기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고
다시 옆에가서 꼭대기 올라가고......흐미....아파트가 너무 싫었어요 그때는...
그래도 예전에는 아파트가 많이 없어서...다행이었죠
스스로 개척하고 열심히 살아오신 아우분께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행복하십시요...두배로
가진게 몸뿐이라 열심히 굴리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뭔가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는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먹고 살려고요~~~~~
당시 한 달에 2,000원 받는곳 있었고
저는 동아일보 1,000원 받았지요
1,000원 받아도 동생들 하고 라면 파티를 했었지요^^
라면이 몇 십원 했었....
도데체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보다 훨씬 고생 많으셨을거라 짐작됩니다.
저도 동아일보 였습니다.
석간은 동아일보였고
조간도 했는데 조간 신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ㅜㅜ
대략 150부 정도 했고 여분은 한부에 100원씩 받고 팔아서 집에 갈때 튀김 사먹고 했었는데 ㅎㅎㅎ
글을 읽으니 그 때 기억이 마치 그림처럼 떠오르네요 ㅎㅎ
배달하다보면 참 잘해주시던 어른들 생각이 아직도 따듯하게 기억이 납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재미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어린마음에 슬픔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랑 같은 시기를 보내신 선배님을 보니 왠지 뭉클합니다...ㅜㅜ
오류동이었죠.. 그쪽에 예전에 아버님이 기부도 하신것으로 알고 있어요..
오류역 맞은편 경인국도에 오류회관도 기억나네요..
참 열심히 사셨네요.. 저보다 어리시지만... 저때에도 마을금고에 입금하면 20원 입금하고 그랬네요..
오류동에 대해서 기억하시는 분을 만나서 기쁩니다. 선배님
고척동이면 개봉동 근처네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쪽에 교도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을금고....
기억나요
예전에는 학교에서 단체로 통장만들게 했는데 그 때는 모두 마을금고 였던 것 같아요
혹시 오류역에 대해서 기억하시는게 있으실까요?
제가 2021년 03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아버지 모시고 주말마다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는 오류역 오류1동 방향에 큰 공터가 있었고
아주 큰 버드나무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 모시고 갔더니 그 버드나무가 없어졌더라구요
어렸을 때라 그럴지 몰라도 꽤 큰 나무였기에
쉽게 옮기거나 자르지는 못했을텐데...
그런데 그 나무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구요
저의 장인어른도 오류초등학교 나오셨는데 그 나무를 기억하시거든요
혹시 그 나무에 대해서 아시는게 있을까요?
/> 고척동에 살았는데 오류역앞 버드나무가 있었고 나무주변에는 나무를 둘너싼 의자가 있었던거 같아요~
주변에 오류극장도 있었구여~
항상 점심은 오류시장에 들어가서 가락국수 먹고 그랬는데.. 오류시장 뒷쪽이 높은곳이었어요..
예전에는 황토흙이어서 저희가 차가지고 배달하고 그러면 빨래 한거 흙 뒤집어 쓴다고 동네주민들이
누구네집 가전제품 들어온다하면 황토흙길에 물 뿌려주시고 그랬는데... 그때는 정이 많았죠..
오류회관에서 친구 어머니 환갑잔치도 했었구요.
고아원이 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거기에 갔었는데
고아원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운영이 되더라구요...
저도 중2때 몇달 친구들과 신문배달 자전가 타고 했었습니다. 동아일보 ㅠ 킁
앞으로 좋은일만 가득 하실 겁니다 화이팅! 님 가정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좋은 사람은 돈 많이 버는 사람......ㅎㅎㅎ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겟습니다.
왠지 저의 어렸을때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자식들 신문 돌리면 싫어 하셨어요
우리 부보님도 그러셨지만
가정이 넉넉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죠
내가 초등때 신문을 돌리던 구역 안에는... 창녀촌도 있었으니... 사연 많지. 풉.
그곳에서 쥴리년이 출세할 줄은 그 때도 지금도 몰랐다.
기대하겠습니다.
참...그.....그냥 어려운 ..ㅎㅎㅎ
다들 그렇게 보냈던 시적이었죠
그냥 저 혼자만의 자격지심 이었죠 ㅎㅎ
어서오세요~~~
저도 4학년때 1년간 조간 돌렸어요
아침에 담임샘에게 신문가져다 드리곤했죠 샘이 노트며 연필주시고 예뻐해주신 기억도 나요. 지금도 제2 인생으로 택배하는데 아마 전 배달이 적성에 맞았던걸까요 ㅎ 택배하니 건강해지고 스트레스 덜해 좋네요
글을 읽으며 또 읽었어요 마음아파 못쓰는 글 남깁니다
좋은 선생님에게 좋은 영향을 받으셨을거에요~~~
가족분들 모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가족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행복입니다.~~
저희 때는 조간 신문은 한달에 9만원 정도 였어요
대시 수금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좀 편했던 것 같아요
그 몇백원의 수입이 그날의 기쁨이었을 정도니까요
좋은 부모님이 밑에서 좋은 것을 배우신 것이 중요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 내가 가진 위치를 남용하지 않는 것 자체로도 훌륭한 것입니다.
한집당 수당으로도 받았었나요?
저는 몰랐어요
그냥 한달에 얼마.. 이런 식이었거든요
정말 열심히 사신겁니다~~
앞으로 더 행복하세요~~^^
이제 곧 50이 되는데 일 할 수 있는 남은 인생 마무리도 잘하겠습니다.
김용재란 친구였죠
저도 재미삼아 따라다닌적 있었죠
친구가 사주는 쮸쮸바 빨면서
그친구는 2구역을 돌렸었어요
경향신문 보급소 였는데 월급안줘서
친구가 울면서 노동청에 고발한다고 했던게
생각 나네요
그 보급소 소장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옛날생각 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한 사람 돈 떼어 먹는 사람이 있었어요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죠
선임자의 좌꺽우꺽 쓰여진 종이가 재밌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비 오는 날은 참 싫었지요. 봉지에 다시 신문을 넣어야되니까요.
신문 돌리다가 같은 반 여자애 보여서 얼른 골목에 숨은 기억도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그때는 어찌나 부끄럽고 숨기고 싶었던지.
지금 돌아보면 참 짠한 저의 어린 시절
저런 경험도 다 제 삶의 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맞습니다.
창피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냥 저 스스로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옛날 생각나는 글이라 코끝이 찡 합니다.
예전에는 모두 그렇게 살았고
모두 그렇게 성장했었던 것 같아요
저녁에 코피나고 몸살났었어요ㅠㅠ
고생많으셨고 존경합니다
꾸준히 하시면 건강을....ㅎㅎㅎㅎ
솔직히 가급적이면 하시지 않는게 좋아요
그 때는 길거리에서 신문 사려는 사람이 많았었죠
진짜 몰랐어요
조간신문을 15000원 주었다고요?
와....저는 9만원 정도 였어요
그리고 조간 신문 특성상 수금을 하지 않아서 편했던 점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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