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만평 노비 150구 였음
퇴계의 전답경작은 거의 노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퇴계의 노비 사용 원칙을 보면 가급적 관용을 베풀되 상전을 원망하지 않고 심복케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퇴계는 노비들의 태만과 완강으로 인해 파종, 제초, 비료주기의 적기를 놓치는 것을 개탄해 마지 않았고 외지전답 소출이 노비들에 의해 훔쳐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퇴계는 준에게 '어리석은 노비'가 '잇속을 품고 집안일을 한다'든지, "듣자하니, 노비들이 모두 태만하여 일하지 않으니 지극히 문제가 심각하다. 그 중 가장 심한 놈을 골라 매를 때려 놀라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 했는가 하면, 노비가 완강하여 상전을 위해하려는 자는 "어찌 눈앞에서 부르리요, 때려 죽이니만 못하겠다."라 하여 강경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규모있는 영산으로 집적한 재산이 결국 그 후손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시켜 놓은 동시에 도산서원을 퇴계학파의 본산으로 그 위치를 유지하게 한 것도 퇴계가 이룩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힘입은 바 컸던 것이다.
덧붙여서 노비문제에 대해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몇마디 더하겠다. 고려와 조선시대 노비를 농노로 볼 것인가, 노예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농노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보충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퇴계가 백명 이상의 노비를 거느리고 그들을 데리고 농업경영을 한 것에 대해 현대적인 감정으로 접근해서는 안될 것이다. 퇴계학파가 인간 이황을 성인에 가까운 위대한 학자로 만들어 놓은 것에 비해 이 연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 이황의 현실적 모습을 밝혀 놓은 것 뿐이었다. 현실에서 초월한 무결점의 존재로 떠받드는 것도 위험하지만 현대적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도 위험하다
요약
퇴계는 노비가 말을 안 들으면?? 줫패라
그러한 퇴계를 현대적인 감정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그당시 생활을 존중해라
옛날에도 공부잘해서 대학자로 성공하려면 돈이 많아야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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