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1980년 5월18일 전남 광주에서 일어났던 상황들에 대해선 아직까지 양측 논란이 계속되고 있어,세부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피력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다만 이것이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에 대해선 저또한
아직까지도 중립적인 생각이기에 "사태"로 표기하겠습니다.
저는 당시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떠나 사태이후 그당시의 일들에 대해서 과연 광주시민이나,호남인들의
사태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냐는 겁니다.
가장 의구심이 드는 부분하나만 문의 드리겠습니다.
인물: 정웅
출생지: 1928년 전남 순천출생
별칭 : 백암(伯巖)
본관 : 慶州
직업 : [前]국회의원
병역사항: 육군 소장
경력
기간 기관경력
1973. ~ . 사단 참모장
1974. ~ .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기획과장
1980.01 ~ . 보병 제31사단장(육군소장) 당시 광주향토사단
1981.03 ~ . 제11대 국회의원 입후보중 사퇴
1987.08 ~ . 근로복지공사 부사장
1987.08 ~ . 민추협 부의장
1987.10 ~ . 평민당 안보.국방위원장
1987.10 ~ . 평민당 당무지도의원회 부의장
1987.10 ~ . 김대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
1987.10 ~ . 평민당 군정치중립화 추진위원장
1987.10 ~ . 평민당 총재안보국방특보
1987.10 ~ . 중앙성결교회 장로
1988.04 ~ 1992.05 제13대 국회의원(평민,광주북구)
1988.05 ~ . 민주당 당무지도위원회 부의장
1991. ~ 1992.05 민주당 국회의원(국방,건설,예결의원)
1999.04 ~ . 알엔에이 회장
상훈
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훈장 3.1장
먼저 정웅 이란 인물의 경력내용을 살펴보자면 1980년1월부로 전남광주 향토사단인 31사단장 역임.
1980년 5.18 당시 광주의 군 최고 사령관 31사단 광주 향토사단장인 정웅 .
1979년12.12 사태이후 신군부출신과 비신군부 출신으로 나눠지는데 ,
그렇다면 비신군부와 신군부의 기준은??
정웅이 소장으로 진급하게 된 시기는 1979.12.12 사태이후인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게 된후 1980.1월 에 정웅의 소장 인사를 단행. 결국 정웅 에게 소장 인사를 내린건 신군부 세력임. (그렇다면 정웅은 신군부?? )
5.18당시 경찰력으로 초동진압에 실패한 경찰은 당시 31사단장 정웅에게 군의 투입 요청 .
31사단 역시 시위 진압 실패 . 이후 공수부대 투입.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공수부대 투입을 요청한 인물은 누구?? 정웅이냐 아니냐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어찌되었던 5.18 당시 진압군측의 군 최고 실세임.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북구 출마) 당시 역대 최다 득표율로 당선.
(광주 시민들이 당선시켜준 저의가 무엇인지??)
두번째는
"5.18은 전두환정권의 영웅적 결단.."이란 말씀하신 박지원 씨 같은 경우
4선까지 국선에 시켜준 목포 시민들의 저의는 무엇입니까?
정웅이 국회위원 나올당시에 광주 사람들 그 사람에대해 어느정도 다 인지하고 있었을겁니다..
왜냐하면 김대중이 1986년 부터 광주에 내려갈때 마다 1980년5.18 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정치적 목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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