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빨갱이들의 학살은 신의주 학생의거와 대구 10월 사건으로 증명했다.
니가 나를 괴롭히고 싶다면 이 사건들 이전에 일어난 학살을 보이면 돼.
할 수 없지? 무식한 리찌기는십하구야...
닉 말할 때마다 더럽네.
일찍은 닉을 만들어도 더럽고 혐오스럽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빨갱이들의 학살은 신의주 학생의거와 대구 10월 사건으로 증명했다.
니가 나를 괴롭히고 싶다면 이 사건들 이전에 일어난 학살을 보이면 돼.
할 수 없지? 무식한 리찌기는십하구야...
닉 말할 때마다 더럽네.
일찍은 닉을 만들어도 더럽고 혐오스럽게...
내가 먼저 물어본 내용에 대해 답변을 해준다면 나의 대화창구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대인관계가 수직적이고
본인을 드러내기 꺼려하며
주변에 지인이나 친구는 없고
대화를 하면 언제나 무언가를 감춰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너랑 공통점이 많이 보인다
두부먹다 이빨 빠지는 소리 그만하고
밥 무거
이거 말하는 거야? ㅎㅎㅎㅎ
* 대구10월사건 *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대구 10·1사건’, ‘대구 10월 항쟁’, ‘10월 항쟁’ 등으로도 불린다.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고,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대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령과 선동으로 일어났다고 그 의미를 왜곡하여 ‘대구폭동’이라고 불렀으나 2000년대 이후 희생자들의 유족과 지역 언론, 학계의 문제제기가 잇따르면서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0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대구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대구10월사건’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스티코프 자금·지령 따른 1946년 10월 대구폭동, 시체투쟁 원조
https://www.jayupress.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14128
모두 소련지시-소련자금이었다, 총파업-대구폭동진실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1/06/02/2011060200110.html
이거 말하는 거야? ㅎㅎㅎㅎ
* 2·28학생시위에서 3·15마산시민항쟁으로 *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경 대구 경북고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가 운동장 조회단에서 결의문을 읽은 뒤 8백여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북고 학생들의 2·28시위는 새로운 학생운동의 첫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래 학도호국단으로 묶여 권력이 요구하는 관제 시위를 벌였다. 1950년대 내내 북진멸공·반공방일 시위에 동원되었고, 고위 관료가 행차를 해도 연도에 늘어서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런 학생들이 현실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이다.
교과서에서 왜 대구폭동을 빼버렸나?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4/03/10/2014031000026.html
좌편향 교과서들이 남로당 주도의 4.3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그에 못지 않는 역사성을 가진 남로당 주도의 대구폭동을 뺀 것은 여기에는 좌익에 불리한 사실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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