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라는 음성이 들려오자 사람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환호했다.
하지만 준호에게는 형용할수 없는 엄청난 공포이며 전율이었다.
그 말은 곧 상훈이 마스터 H 라는 말이 아닌가.
말문이 막힌채 얼어 붙어있는 준호에게 다가간 상훈이 잘했다고 칭찬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자
순간적으로 어때가 움찔하며 그를 피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훈은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준호에게는 그 웃음조차 가식으로 느껴졌다.
-어쩌지?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준수 형에게는 말을 해줘야 하나?
준호가 상훈을 경계하자 준수는 가만히 준호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사람들이 어서 돌아가자고 재촉하자 뭔가 귓속말을 하려고 했던 준수는 귓속말 대신 볼을 쓰다듬어
주며 어깨동무를 하고 준호를 데리고 나갔다.
긴 복도를 빠져나가 문을 열자 그 방은 여전히 두개의 문이 있는 텅 빈 공간이었다.
모두들 다른 함정이 있는것은 아닌가 신경을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걸어나갔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믿거나 말거나를 연상시키던 문제가 적혀있던 종이도 이미 떼어져 있었다.
준호는 아무래도 왼쪽문이 마음에 걸려 살짝 열어보고자 했지만 역시 기회는 한번뿐인지 굳게
잠겨있었다. 그가 문앞에서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때 료가 다음 방으로 연결된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방문이 잠겨있어요. 올때 처럼 열리지 않아요."
"앗! 어쩌지? 정답방에 성경책 두고 왔는데.. 누가 저와 같이 가주세요. 무서워서 혼자 못가겠어요."
"순화씨. 어짜피 그 방으로는 못돌아가요. 이미 폐쇠 되었잖아요."
"아..맞다.. 그럼 어째요! 성경책 없는데.."
"울것같은 표정 하지 말아요. 이제 성경책은 필요 없는것 같아요. 성경 구절도 적혀있지 않구요.
화면을 보세요. 문제가 바뀌었죠? 액정도 더 커졌어요. 글을 화면에 직접 입력할수 있는 전자 펜도
달려있어요. 방은 같지만 함정의 내용은 바뀐거에요."
료의 말대로 순화는 문 옆에 달려 있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전과는 다른 기계인듯 액정이 훨씬 컸고 옆에는 초인종 같은 녹색 버튼이 하나 달려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위험할까봐 일부러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있었지만 순화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는지 검지를 들어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귀를 귀울였다.
분명 음악이었지만 소음이라고 표현해야 어울릴만큼 정신 없고 요란스러웠다.
상훈은 귀를 양손으로 막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노래가 여러곡 섞여 있어요. 제대로 소음이군요?"
"정말 그러네요? 자세히 들어보니까 아는 곡도 들려요."
순화는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했다. 그러자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음표들이 하나로 집중되는가
싶더니 그 음악중 자신이 아는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타이타닉 주제가가 들려요! 셀린 디온이 부른 노래있잖아요. 배 위에서 양팔을 벌릴때 나오는 음악!"
순화는 신기한듯 허밍으로 음을 따라부르더니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1부터 7까지 정답을 써 넣을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 노래가 7 가지 인가봐요. 그 노래를 찾아 제목을 써넣으면 문이 열리는거구요."
"아..."
"근데 타이타닉 주제가 제목이 뭐죠? 전 가수밖에 모르겠어요."
"가수는 셀린 디온. 제목은 'My Heart Will Go On' 이에요."
준호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이며 전자 펜을 들었다.
하지만 혹시나 노래에도 순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답을 적지 않고 망설였다.
그러자 상훈이 엄지와 중지를 마주쳐 딱- 소리를 내며 급히 팬을 빼앗아 들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도 있어요. 집중하니까 정말 하나씩 들리는군요?"
펜을 빼앗긴 준호는 기분 나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상훈은 준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듯 서둘러 정답 화면 1번에 월광이라고 써 넣었다.
타악-
"윽...!!"
"준수씨!!"
"형!!"
그가 화면에 월광이라고 써 넣자 마자 벽 어딘가에서 휙-하고 뭔가 날아들더니 준수의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문에 박혀버렸다.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준수에게 다가가니 다행히 관통 당하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찢어져
금새 흰 옷이 끈적한 피로 붉게 물들었다.
료는 의사 지망생이라 그런지 서둘러 지혈을 하며 자신의 상의를 벗어 이빨로 찢은 다음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감싸기 시작했다.
준수는 고통이 심한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지만 결코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준호는 그의 상태를 보고는 상훈을 향해 무섭게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막 답을 적으면 어떻게 해요! 전 답을 몰라서 안적은줄 아세요? 혹시 노래에 순서라도 있을까
망설였던 거라구요!"
"미안해.. 미안합니다 준수씨.. 저는 그저 아는 노래가 나와서 기쁜 마음에.."
"준호아. 상훈씨 너무 몰아세우지마. 월광 소나타는 내 귀에도 들렸어. 네 말대로 노래에 순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상훈씨는 잘 해보려고 한 일이잖아. 진정해."
료는 어깨에 두른 옷의 매듭을 단단히 조여 매며 준호를 진정시켰다.
준수는 문옆에 벽에 기댄채 숨을 고르고 있었고 준호는 그와 마주보고 앉아 이마에 땀을 닦아주었다.
문에 박힌 물체를 뽑아 확인해보니 바람개비처럼 4면이 칼날로 되어있는 작은 표창이었다.
그들이 소란을 피우는 사이 음악은 끝났는지 멈춰있었고 순화는 다시 한번 녹색 버튼을 꾹- 눌렀다.
"우선 노래가 들리는 대로 기억해뒀다가 끝나면 상의해보죠."
동팔은 왠일로 얌전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며 음악에 집중했다.
음악의 후반부가 되면 될수록 각각의 노래가 클라이막스를 맞으며 더욱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여러가지의 노래를 구분 해낼수 있었다.
음악이 다시 멈추자 순화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아까 말했다시피 타이타닉 OST가 있구요.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도 들렸어요..그 영화가.."
"순화씨! 저도 그 노래 들었어요. 영화 보디가드 OST 말씀하시는거죠? 왠 다이아~ 라고 하는"
"쿡쿡.. 맞아요. 어렸을때 많이 따라 했었잖아요. 왠 다이아~ 하구요. 알고보니 And I 였지만요."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동팔과 순화는 서로 일치하는 의견에 배를 잡고 킥킥거렸다.
그러자 상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저는 아무리 들어도 '월광 소나타' 만 들리네요. 청음이 약해서 그런지 다른 노래는 통 모르겠어요."
-당신.. 정말 가식적으로 보여.. 그런 표정 짓지마.
준호는 속으로 상훈을 비웃으며 말을 꺼냈다. 시간이 갈수록 상훈의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전 다른 노래를 하나 듣기는 했는데요.. 오페라 곡 있잖아요. '날 울게하소서' 였던가?"
"그냥 '울게 하소서' 야. 헨델의 곡이지."
"형! 말하지 말아요. 피가 자꾸 새어 나오잖아요."
"괜찮아. 그리고 한곡 더 있어. 탱고 음악으로 유명한거 있지? '여인의 향기' 였던가?"
"아! 그 노래 알아요."
대충 다섯곡 정도가 밝혀진듯 했다.
하지만 정확한 노래 제목을 몰라 다들 난감해하고 있자 준수가 직접 몸을 일으켜 펜을 집어들었다.
"어짜피 답을 써넣어서 찾아내야해요. 시간도 없는데 표창 때문에 망설이고 있을순 없어요."
"하지만 준수씨.."
"분명 표창은 문을 향해서 날아들게끔 설치되어 있을거에요. 사람이 직접 날리지 않는 이상 그 방법
밖에는 없어요. 만약 모두가 그것을 알고 피한다 하더라도 답을 입력하는 사람은 표창에 맞을테니까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잠시 옆으로 피해 계세요."
"준수씨는 어쩌구요? 상처가 심해서 또 맞았다가는 큰일 난다구요!"
"답을 쓰자마자 피할거에요. 등 뒤에서 맞는 표창에 목숨을 잃지는 않을거구요."
준호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준수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준수에게는 절대 꺾지 못할 고집 같은게 있었다.
사람들은 한참동안 준수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두손두발 다 들고 벽으로 물러나 있었다.
"'월광' 은 우선 오답으로 나왔으니까 제외하구요 '보디가드' 주제가는 아무도 제목을 알지 못해요.
그러니 '타이타닉' 주제가와 '울게하소서' 그리고 '여인의 향기' 를 차례대로 써 넣어 볼게요."
"형.. 조심해요.. 제발.."
"그래. 준호아."
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펜을 들어 타이타닉 주제가인 'My Heart Will Go On' 을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타악-
그가 마지막 스펠링을 쓰고 바로 몸을 숙이자 번개같이 날아든 표창은 문 한가운데로 정확히 박혔다.
그대로 맞았으면 척추를 파고 들었으리라.
준수는 몸을 일으켜 다시 '울게 하소서' 라는 답을 써넣고 옆으로 몸을 피하자 또 다시 날아든 표창은
그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벽으로 곤두박질 쳤다.
준수의 말대로 표창은 문을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며 랜덤하게 쏘아지고 있는듯 했다.
"형! 위험해요. 그만 하면 안되요?"
"이상해.. 아무것도 답이 들어맞지 않아..한글자도 틀리지 않았는데 답이 없어."
"그만해요.. 못보겠단말에요!"
"알겠어. 준호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고.."
그의 고집을 누가 막을쏜가.
준수는 여전한 통증히 느껴지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힘겹게 답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민첩한 그라도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계속 몸을 굴리기는 힘들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정답란에 '여인의 향기' 라고 써넣었다.
삐..삐삐삐-
준수는 답을 써 넣자마자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계속해서 날아들던 은빛 물체 대신 기계가 작은 소리를
내며 깜박이고 있었다. 처음 듣는 소리가 나자 모두들 화면 근처로 모여들었다.
"정답인가봐요! 오답일때는 입력한 답이 자동으로 사라졌는데 지금은 그대로 있죠? 표창도
날아들지 않았어요! 다행이다!"
동팔이 뛸듯이 기뻐하자 디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준호는 같이 기뻐하지 않았다. 말없이 또 무엇인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순화가 다시 음악을 듣기 위해 버튼으로 손을 가져가자 그제서야 준호는 순화의 손을 잡고
강한 힘으로 잡아당기며 말을 시작했다.
"준호아? 왜그래?"
"이제야 알았어요. 멍청하게.."
"뭘 알았다는 거야?"
"잘 들으세요. 누나가 들은 타이타닉 주제가는 저도 좋아하던 노래라 정확한 제목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정확히 스펠링을 입력 했음에도 오답으로 나왔죠. 울게 하소서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원곡의
제목은 한글이 아니겠지만 번역하면 울게 하소서니 그것 역시 정답으로 인정되어야 해요."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제가 마음에 걸려 하던 여인의 향기 라는 답이 정답으로 확인되니 이제서야 확실히 알것같아요.
이 문제는 노래의 제목이 아니라 이 노래들이 OST로 삽입된 영화의 제목이에요."
"뭐?"
"생각해보세요. 탱고의 음악은 제목이 여인의 향기가 아니에요. 저도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제목은 분명히 다를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여인의 향기라는 답이 맞아들었다는건 노래의 제목이
아니라 영화의 제목이라는 결론이 나오죠."
"와- 여인의 향기 생각난다. 알파치노가 여 주인공과 탱고를 추는 장면.. 정말 멋있었는데.."
"헤헷.. 저도 그 영화 봤어요. 정말 최고의 명장면 이죠."
"물론이지! 얼마나 멋졌다구~ 그럼 다른 답도?"
"네. 'My Heart Will Go On' 이 답이 아니라 '타이타닉' 이 답이 되는거에요. 아까 동팔형이랑
순화누나가 웃던 노래도 답이 '보디가드' 가 되는거죠."
준호는 정답을 확신한듯 재빨리 펜을 움켜쥐고 타이타닉과 보디가드를 써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계가 작게 소리를 내며 2번과 3번에 답이 새겨졌다.
준수는 준호에게 대견하다는듯한 미소를 보이더니 말을 꺼냈다.
"그럼 내가 말한 '울게 하소서' 가 삽입된 영화는 '파리넬리' 니까 한번 써넣어봐."
"H 가 영화 보는 안목은 있나봐요? 주옥같은 영화들만 쏙쏙 골라놓은것좀 보세요."
"파리넬리인지 모기넬리인지는 뭡니까? 준수씨?"
"카스트라토에 대한 일생을 담은 영화에요. 주인공이 부른 '울게 하소서' 는 정말 최고죠."
"카스트라토가 뭐지?"
동팔이 처음 듣는 낯선 단어에 의문을 갖자 준호는 왠일로 그에게 친절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카스트라토(castrato)' 란 거세된 남성 가수를 뜻해요."
"헉.. 뭐라구?"
"16 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던 건데요. 그 당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는것을 천하게 여겼던 교회에서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남성들에게 행했던 방법이에요. 여성의 소프라노와 같은 음역을
갖기 위해서 변성기 이전에 거세를 하면 성대의 순(脣)이 자라지 않아서 소년 목소리는 그대로 유지하는
반면 가슴과 허파는 계속 성장하여 어른의 힘을 지니기 때문에 맑고 힘있는 목소리를 낼수 있어요.
18 세기에 가장 흥했했고 대표적인 카스트라토가 '파리넬리' 나 '카파렐리' 같은 인물이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거세를.."
"'울게 하소서' 라는 곡을 지은 것은 헨델이에요. 그는 카스트라토를 위해서 여러 곡을 만들었어요.
남성의 신체적 장점에 소년의 맑은 목소리의 결합은 많은 성악적 표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의 아이돌 만큼이나 사랑을 받았었죠. 결국 20세기 교황청에 의해 공식 폐지 되었지만요.
지금은 카스트라토 대신 특별 발성 훈련을 받은 카운터 테너들만 존재해요. 실제로도 파리넬리 라는
영화를 만들때 그의 목소리를 도저히 재연해 낼수가 없어서 여성 소프라노와 남성 테너의 목소리를
합성해서 만들었다고 해요. 지금도 생각나지만 영화속 파리넬리의 울게 하소서는 정말 환상적이죠."
준호는 영화의 장면을 상상하며 씨익 웃더니 화면에 '파리넬리' 라고 써넣었다.
그의 예상대로 역시 답이 맞았다.
동팔은 상훈이 했던 월광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상훈씨가 월광 소나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나요? 그 노래의 영화는 뭐죠?"
"영화 폰(Phone) 이요. 하지원이 나왔던 국내 영화 있잖아요. 그곳에 등장하는 핸드폰의 벨소리가
월광 소나타 였어요."
"아.. 그렇군요?"
동팔은 상훈의 말에 펜을 집어들고 자신있게 화면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준호는 상훈의 말에 반박한다는듯 큰 소리를 질러 동팔의 행동을 저지했다.
"상훈형은 왜 폰이라는 답을 알려주세요?"
"응?"
"일부러 그러는거 아닌가요?"
"일부러..라니?"
"지금 나온 영화들을 보세요. 전부 작품성을 인정받은 최고의 영화라구요. 그 사이에 우리나라 공포
영화가 끼어있을리 없잖아요! H 의 문제에는 언제나 연관성이 있었던거 모르시나요?"
"왜 그래? 오늘따라 너 이상하다? 나는 월광이 삽입된 영화가 폰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동팔형. 답을 적지 마세요. 폰은 답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답은 '불멸의 연인' 이에요. 그 유명한 영화를 두고 폰을 말해주다니.. 이상한건 형 아닌가요?"
"이준호!"
상훈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준호의 태도에 더 이상 참을수 없었던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중간에 끼어 난감했던 동팔은 그들을 다독거리며 순화에게 영화에 대해 물었다.
왠일로 계속 얌전한 태도를 보이는 동팔은 진정제를 복용한 한마리의 곰 같았다.
아마도 준수에게 칼을 들이댔던 일이 원인인듯.
순화는 불멸의 연인 이라는 말을 듣자 반가운듯 자신있게 설명해주었다.
"영화 '불멸의 연인' 은 베토벤에 대한 영화에요. 월광 소나타를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하죠.
베토벤이 임종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을 자신의 불멸의 연인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했어요. 그의 일생에는
세명의 여인이 있었거든요. 아직까지 그 불멸의 연인에 대해서 말들이 많은데 영화에서는 베토벤의
동생의 아내이자 베토벤의 연인인 요한나를 불멸의 연인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아이고.. 무슨 이야기인지 통 모르겠군요.."
"어머! 제 설명이 너무 정신 없었나요? 후후.. 하지만 영화속에서 베토벤이 월광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장면은 정말 멋졌어요. 청력이 약해지기 시작해서 잘 들리지 않을 때였거든요. 피아노에 귀를 대고
희미한 음과 진동을 느끼며 연주하던 베토벤.. 너무 멋져.. 영화 다시 보고싶다."
순화가 황홀한 표정을 짓고 혼자만의 세계로 빠지자 동팔은 썩은 미소를 한번 지어보이고는 화면에
불멸의 연인이라는 답을 써넣었다. 역시 그것이 정답이었다.
그들은 다시 버튼을 눌러서 음악을 들었고 어렵사리 'Shape Of My Heart' 라는 노래를 발견했다.
또 다시 순화는 그 노래에 감탄했다.
"와- 영화 레옹의 주제가! 마틸다 너무 예뻤어."
노래의 제목을 하나하나 알아갈때마다 감탄을 반복하던 순화는 버려둔채 동팔은 레옹이라는 답을
써넣었다. 이제 남은 답은 단 하나..
벌써 3번이나 반복해서 들은것 같은데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숨겨진 마지막 노래는 다른곡에 비해 굉장히 소리가 작았다.
벌써 시간은 오후 7시였다.
"마지막 노래가 사람 열받게 하네!"
동팔은 급기야 자신의 귀를 때려가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섞인 노래들이 일제히 간주부분으로 들어갔을때 희미하게 들려오는 7번째 노래를 집어내자
그는 거구를 흔들어 대며 팔짝팔짝 뛰었다.
"아하하- 알아냈다. 로미오와 줄리엣!"
-168 시간의 공포- *라시안*
마지막 답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Kissing You' 였다.
워낙에 잔잔한 노래라 들리지 않았던게 당연한듯.
7개의 정답이 모두 일치하자 문은 철컥-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곳은 처음 오던 길에 사진과 씨름했던 붉은 조명의 암실. 지금도 여전히 내부의 구조는 같았다.
그들은 깨끗하게 치워진 사진과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입구가 철컥- 하고 잠기더니 천장에서 앞 뒤로 동시에 유리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뭐여? 이번엔 앞 뒤에서 누르겠다는거야? 우리가 폐차장에 자동차야 뭐야!"
동팔이 신경질을 내며 줄에 걸려있는 사진을 집어들었다.
여전히 6장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내용은 달랐다.
방식은 같은지 3번방 입구쪽 유리에 붙어있는 유리 액자도 그대로였다.
사진에는 개구리 - 카멜레온 - 병아리 - 뱀 - 무당벌레 - 제비꽃 이 찍혀져 있었다.
"이젠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일세? 자연의 신비인가?"
동팔이 사진을 바닥으로 던져버리자 료는 동팔의 팔뚝을 꼬집으며 사진을 다시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말했다.
"이런 사진이 있을때는 한가지 밖에 더있어요? 먹이 사슬이죠."
"아!"
"더 이상 뭘 생각할수 있겠어요. 초등학교 실험관찰도 아니구."
"이번건 쉽네? 순서가 제비꽃 - 무당벌레 - 개구리 - 병아리 - 카멜레온 - 뱀 이죠?"
"이 뱀은 뭐지?"
료는 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황색 바탕에 드문드문 가로로 검은색과 흰색의 얇은줄이
있는 가느다란 몸을 가진 뱀이었다.
그러자 준호가 사진을 받아들어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했다.
"이건 '넬슨 밀크 뱀' 이에요. 색소 부족으로 온 몸이 주황색을 띄고 있죠. 행동이 민첩하지만 활동성이
떨어져 작은 들쥐나 벌레들을 먹고 살아요."
"준호가 너는 어째 그렇게 모르는게 없지?"
"뭐.. 여러가지 방면으로 관심이 많아서 그렇죠. 공부도 꾸준히 하는 편이구요."
"흠.."
료가 준호를 바라보며 눈을 치켜뜨자 동팔은 그의 눈을 손으로 가린채 꽃뱀이라고 명칭을 바꿨다.
뭐.. 정확한 학명을 모르는 이상 화려한 뱀은 모두 꽃뱀이라 칭하니까.
그 사이 아무에게도 의견을 확인하지 않은채 동팔은 자신이 말한대로 사진을 들어 액자에 넣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유리벽이 움직이며 큰 폭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유리벽은 양쪽에서 그들을 압박해왔다. 한면에서 다가오는것보다 훨씬 큰 데미지.
상훈은 안경을 벗어 옷에 쓱쓱 문지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동팔씨. 아무리 먹이 사슬이라고 해도 너무 이상한 순서 아닙니까?"
"이게 어때서요?"
"제비꽃은 식물이니까 제일 처음 온다고 쳐도 병아리가 개구리 뒤에 오는 이유는 뭡니까?"
"병아리는 나중에 커서 닭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닭이 몸이 부실할때 개구리를
잡아서 뒷다리를 말려 줬단 말입니다. 그러니 뒤에 오는게 당연한거 아닙니까?"
"하지만 자랐을때를 가정한다면 너무 억지 아닐까요?"
"그럼 상훈씨 의견은 뭔데요?"
"료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먹이 사슬이 아니에요. 개구리가 황소 개구리라고 가정할 경우에는
뱀까지 잡아먹는데 그렇게 되면 사슬이 엄청 꼬일것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무당벌레가 꽃을 먹고
산다고 생각할수도 없구요."
-또 딴지를 거는군? 그럼 어디 당신의 생각을 말해봐..
준호는 여전히 상훈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선이 꽤나 따가웠는지 상훈은 준호를 한번 쳐다본뒤 무표정으로 말했다.
"무지개 인것 같습니다. 사진을 가만히 보면 몸 색깔이 빨- 주- 노 - 초 -파(남) -보 의 6가지
색을 띄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의 말은 그럴듯 했다.
제비꽃은 보라색. 무당 벌레는 빨간색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개구리는 초록색. 병아리는 노란색.
꽃뱀이라 칭했던 뱀의 몸 색은 분명 주황색이었다.
료는 그의 제안을 인정한다는듯 자신의 생각을 접어버리고는 사진을 바꿔넣기 시작했다.
무당벌레 - 뱀 - 병아리 - 개구리 - 제비꽃 - 카멜레온 순이었다.
그가 마지막 사진을 넣자마자 사방에서 우르릉- 소리가 진동하더니 유리벽은 멈추지 않고 다가와
그들의 몸을 양쪽에서 짖누르기 시작했다.
조여드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몸이 금방이라도 풍선처럼 터져 버릴것만 같았다.
"순서가 틀렸잖아요! 카멜레온하고 제비꽃의 순서가 바뀌어야해요. 카멜레온은 장소에 따라
몸 색깔을 변화하는 파충류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랑 또는 남색으로 생각해야 한다구요."
"이런.. 미안해요.."
서있는 자세가 제 각각이라 압박 받는 위치도 달랐지만 제일 괴로운건 동팔이었다.
그의 큰 덩치가 양쪽 유리벽에 꽉 짖눌린채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자 괴로운듯 비명을 질러댔다.
모두 틈이 얼마 없어서 손도 올리지 못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다행이도 체구가 작은 순화와 준호가 동팔의 양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동팔의 몸이 끼어있는
틈 사이로 작은 공간을 확보할수 있었다.
순화는 팔을 뻗어 카멜레온의 사진을 꺼내들었고 준호는 제비꽃의 사진을 뺀후 서로 사진을 바꿔
액자에 끼워넣었다. 그러자 유리벽이 처음의 상태로 스스르- 뒤로 밀려나더니 천장위로 밀려 올라갔다.
동팔은 뼈가 부러진것 같다며 말도 안되는 호들갑을 떨었다.
준호는 상훈이 정답을 맞추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자 더욱 깊은 의심을 품었다.
차라리 답을 몰랐던게 위험하더라도 더 인간적으로 보였을것이다.
그는 결심을 한듯 준수의 옷자락을 잡아 당겨 귀에 입술을 바짝 붙힌후 은밀하게 속삭였다.
"형.. 제 말 잘 들으세요.. 상훈형을 조심하세요.."
"무슨 소리니?"
"자세한 이야기는 산장으로 돌아가서 할게요. 하지만 상훈형은 분명 마스터 H 와 민첩한 관련이 있어요.
그러니 저 형이 하는 말에 특별히 귀 기울이세요."
"네 말.. 이해가 안간다.."
"지금은 길게 말할수 없어요.. 아무튼 조심하세요."
준호가 그에게 의미있는 눈짓을 하며 물러나자 준수는 상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번도 그에게 의심을 가져본적이 없었는데 준호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자 오히려 그의 눈에는
준호가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선 이 지옥 같은곳을 빠져나가 산장으로 돌아가는게 우선이었기에 생각은 잠시 접어두었다.
다음방은 끔찍한 전파가 흘러나오던 3방의 문이었다.
준수가 문을 열고 료와 함께 진입하자 긴장한 나머지 사람들은 검지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꽉 틀어막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별 다른 점은 없었지만 오늘길에 벽에 붙어있던 10 자루의 칼 대신 10 자루의 총이 걸려있었다.
2번방으로 돌아가는 문은 여전히 잠겨있었고 사슬이 달린 자물쇠까지 달려있었다.
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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