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흔히 소빙기라 불리는 기후변화로 가뭄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는 건축물에도 영향을 끼쳤다
소빙기 전 조선이나 중국 은 입식문화 였다가 소빙기가 시작되고 가옥 형태가
추워 최적화된 우리가보는 한옥이 탄생했을것 같다
그러나 중국은 입식을 그대로 사용해서
씻지않는 문화가 그때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에 따른 흉년으로 조선 숙종 대에는
‘을병대기근’이라 하여 전 인구의 20%인 150만명이 굶어 죽는 일도 있었다.
가뭄이 발생했고 기우제도 많아지게 되었다
가뭄과 기우제 횟수를 등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시기에 기근이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기우제는 자연과 하늘을 감동시켜 가뭄을 타개하고자 한 일종의 제의(祭儀)이지만,우리 선조들은 한편으로 균역(均役)이나 준천(濬川) 등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뛰어난 과학적 성과들이 가뭄이 극심했던 세종과 숙종, 영조 대에 이뤄졌다.
세종대에 측우기가 발명되어 벼농사를 위한 과학적이고도 효과적인 강수량이 측정되기 시작한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조선은 15세기 중반에 세계 최초로 궁궐뿐만 아니라 전국 8도의 감영과 군현에 이르기까지 350소에 이르는 우량관측망을 구축한 나라였다.
기상관측기기로서 세계기상기구(WM O)가 허용한 오차는 1% 이내 인데 측우기는 0.51%를 충족한다고 하니, 그 정확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단위로 확대 실시했고, 시헌역법 등 서양천문학에 맞춰 세종 못지않은 천문학 발전을 이뤘다.
영조는 임란 이후 붕괴된 측우기 제도를 복원해 경기감영을 비롯한 팔도감영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비가 올 때마다 8도의 관찰사가 강수량을 중앙정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조선초기 고려식 다층 건물들이
단층으로 바뀐것도 소빙기의 원인 이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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