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80학번으로 새내기 1학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방송반 중책이 임무였고
방송 장비와 멘트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서울시내 모든 대학이 전투경찰 포위망을
탈출하여 합류했고 인천의 인하대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이 오십만명이었습니다.
주변은 탱크가 포위하고 탱크 앞에 서본적 있나요?
그 위압감과 공포는 천안문 사진 한장으로도 설명되지만
정말 깔려 죽어 오징어포처럼 될거 같다는 두려움은 이기기 힘듭니다.
전두환 측도 쉽사리 공격을 못합니다.
외신기자들도 많았고 방송도 나갔으니까요....
협박만 하고 해산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선배 학생들 지휘부가 회의를 합니다.
당시 모든 대학 학생회장들의 위임을 받은 총대장은 서울대 심재철이었고
심재철은 유시민 대의원 의장과 신계륜 고려대 학생회장 만류에도 해산을 지시합니다.
그 심재철이 최근 국회의장까지 지낸 변절자 그사람입니다.
해산과 함께 통금이 넘은 시간 학생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서울역에서 가까운 동국대와 연세대에서 노숙을 했습니다.
그리고 5월17일 아침이 밝고 전국 계엄령 확대와 휴교령이
떨어지며 군인들에게 학교에서 쫒겨나고 다음날
5월 18일 광주가 터집니다.
아무도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처참하게 광주 시민들이 죽어 나가는질.....
모든 언론도 통제되었고 광주는 들어갈수도 나갈수도 없는
무인도로 만들었으니 정말 아무도 몰랐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5월16일 서울역에서 몇일만 버티며
농성했다면 광주 학살은 없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많은 학생들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방송반으로 서울의봄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습니다.
휴교령 이후 학교는 못가고 장비 새로 준비해서
군인과 경찰 피해 사직공원에서 교육받고 방송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동시대인으로 참 안타까운 결정이였습니다.
다만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꺽이지 않는 정체성과 민주의식을 되새겨봅니다.
역사의 변절자는 각인되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서 옳음을 주장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불사하며 독재와 불의에 항거한
수많은 백성들의 역사로 발전해왔습니다.
뒤에 숨어 손가락질하며 입으로만 나불대는 위선자들이 함부로 폄훼해서는 안될 고귀한 가치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한거니 수정은 안하곗습니다.
부족하고 가녀린 제 지식을 인정합니다.
배려는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동시대인으로 참 안타까운 결정이였습니다.
다만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꺽이지 않는 정체성과 민주의식을 되새겨봅니다.
역사의 변절자는 각인되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서 옳음을 주장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독재와 불의에 항거한
수많은 백성들의 역사로 발전해왔습니다.
뒤에 숨어 손가락질하며 입으로만 나불대는 위선자들이 함부로 폄훼해서는 안될 고귀한 가치임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됐죠 ㅋㅋㅋ
전역을 하고 친구들에게 전해들은 이약기와 거의 비슷하네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서울역 회군에 대해 아쉬움이 많습니다.
힘든 시절을 같이 걸어온 것 같아 친근감이 드네요. 늘 건강하세요.
박종철 고문 아유가 부천에서 국짐당 국회 출마하던 박종철 선배놈 숨어있는 장소 발설하라는 것임...
지 때문에 박종철이 고문당해 죽었는데 고문한 국짐당 입당...
요즘 한번 보세요, 돈이 최고의 가치 아닌가요?
(중국에서 금전적으로 손해 끼친 사람은 부모를 죽인 원수하고 동급이라는 중국관련 교육이 자꾸 생각나요)
현6070 중에 30~40%정도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 나섰을겁니다.
나머지는 관망 혹은 여전히 빨갱이들이 날뛴다고 침튀겼던 사람들입니다.
1987년 당시 한국은행 앞에서 최루탄에 갈팡질팡할 때 학생들을 사무실로 피신시켰던 주변 빌딩 직장인들 , 을지로 골목에선 여기 빨갱이들 있다고 소리치던 상인들...당시에도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최고의원 입니다
있어서 거의 매일 최루가스 마셨던
기억이 새롭네요
전남 화순엔 우리나라 1호 탄광이 있습니다.그곳에 군인트럭에 나눠탄 시민군들이 와서 동네분들이 주먹밥 나눠줬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때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가슴 한켠에 남아있다가 ㅇ이런 글을 볼때마다 눈물이되어 나오곤 합니다
잔학무도한 전두환과 그 일당들 ..지옥에서도 않 잃을 겁니다
광주 집과 연락이 안된다고 전화통을 붙들고 우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왜 우셨는지는 머리가 크고 난 후 알게 되었지만... ㅠ ㅠ
별이 두개지만 네개보다 훨신 훌륭하신 전두환장군님이 최고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그때는 정말 뛰어나면 별 두개가 네개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구나 생각했지
그리고 그해 수많은 찝차와 육공트럭, 장갑차 행렬을 보았는데 그게 광주민주화운동 진압하러 가는 길인걸
나중에야 알았씀
동네에 공수부대가 있어서 공산당 때려 잡았다고 일부 자랑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피해자인 걸 안다. 현역이었던 옆집에 살던 그 좋던 분이 술만 먹으면 애들이며 와이프를 때려서 우리집에 도망와 있었다.
아무튼 전두환이며 그 추종자 새끼들 처벌 제대로 안한 건 친일파 새끼들 처벌 안한 거와 함께 대한민국의 최대 실수다.
수요일 일찍 끝나고 시내 나가면 대학생 전경 대치 상황에 최루탄 날라다니고 그랬었죠.쪼끔 무서움 ㅠ
민주 정권 들어서고 평온을 되찾은 광주..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할 뿐이죠.
어떤 일에서 승리를 거둔지는 모를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에 고취해있던 상태에서 다시 출동을 했기에...
아마도 더욱 쉽게 시민들을 죽일 수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선배님!
제일 가슴아픈일은 군인들이 잡은 학생을 지프차에 두손을 매달아 죽어서 뼈만 남을 때까지
질질 끌고 다닌 것인데, 저는 직접 봤지만 현재까지 밝혀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도르를 보면 핏자국이 선명한 것을 본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래서 위로탑이 화순입구 너릿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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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광주폭동 이라 했다지
오해한 거임.
ㅋㅋㅋ 재명이니까 용서가 되는구나 우습다..
이런다고 달라지지 않아
포커스를 다시 맞춰바
이순자 나불대고 있고 자식들은 도둑질한 돈으로 호강하고 삽니다.,.
이게 정의인지..
아직도 역사는 바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미화하는걸 보면 기도 안찹니다..
군복만 안입었지.. 권위주의 검찰이 그 자리를 대신할뿐... 그나마 천만 다행인게..5년 밖에 못하게 만들어나서..
일부에서 얘기하는 ..대통령 중임제 개헌안..절대 반대입니다.
윤석열 같은 인간 두번 연속하면.. 대한민국 정말 80년대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해찬은 복학생 회장 ... 고대학생회장 신계륜까지
거의다 반대했으나 심재철이 전국대학생 연합회장 자격으로 결정한겁니다.
지금하신말이 답입니다.
정말 이재명이 완벽한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지고있는 그거? 하나만은 해주길
사람에 충성하지않고, 검찰조직 폭력배의 수십수백번의 압수수색에도 제대로된 비리가 없는 민주당대표입니다.
황색 조중동에 세뇌되어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뽑은 현정부를 반드시 내년 총선에서 심판해야합니다.
미워도 다시한번!! 이재명대표와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세요
박정희가 죽었을 때 울었고.
전두환 때는 기념우표까지 수집했던 저의 지난날을 반성했습니다만.
다시 한번 반성합니다.
미안합니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전두환이 물러가기로 했다는 구전으로 학생들은 해산합니다.
지하철1호선을 타고 귀가하는데 승객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립니다.
최루탄 냄새가 심해서..
그리고 일주일도 안되어 광주에서 상황이 발생하고 계엄령 휴교령..
저의 모교는 휴교를 두번이나 했었기에 알바를 오래 했네요.
지금 상황은 언론을 통제하던 그때와 적쟎이 흡사하지만
엄청난 대명천지가 된 지금 검새독재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네요.
오늘 시장에서 토마토 파는 불친절한 할머니에게 말했네요.
돈 잘 버시려면 친절하셔야 한다고.
지금 윤땡땡이 친절한 거 같냐고.. 했더니.
그 썅놈의 시키.. 하네요
74년도에는 남산에서 쏜 기관포가 명동에 떨어져 몇명이 사상하던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네요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장갑차도 아니고 탱크였습니다.
선배님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상해 임정에서 공금횡령으로 쫓겨났는데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 받고 독립운동한다고 코스프레 떨고 미국을 등에 업고 광복과 동시에 국내에 들어 옵니다. 그런데 상해 임정의 대표인 김구 선생은 임시 정부 대표로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들어 옵니다.
이 때부터 일이 꼬였다고 보여집니다. 미국은 한국의 상해 임정을 인정했어야 옳았다고 봅니다. 김구 선생은 처음에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다가 그들의 일방적 주도에 실망하여 공산주의를 반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지상 명제로 삼고 어떤 이념도 가리지 않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49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김구 선생의 제안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에 갔다가 소득없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김구 선생을 북한 서북지역 사람 중의 하나인 안두희가 저격하여 절명합니다.
그 뒤로 일사천리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하던 제주도민을 북한의 서북지역 사람들이 무참히 학살한 4.3이 발생합니다. 그 뒤를 이어 6.25 전쟁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도 장기 집권을 위해 이승만은 발췌개헌을 하고 그 뒤에 또 사사 오입 개헌을 하고 그 뒤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권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장면 내각의 민주 정부가 들어 섰으나 시위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군부가 들고 일어나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것이 1961년 5.16 군사 반란인 것입니다. 그 군사 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두번만 집권한다고하다가 1969년 삼선 개헌을 단행하고 장기 집권을 이어갑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1972년 10월 유신헌법을 만들어 장기 집권을 꾀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군사독재가 강화되고 전태일 열사 사건과 YH여공 사건이 터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합니다. 그래서 부마 항쟁이 벌어집니다. 그것을 차지철이 쓸어 버려야 한다고 하니 김재규 중정부장이 10.26을
그러니 그것은 감정적 요인이 많은 자신의 개인적 결단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란죄로 몰아서 전두환이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12.12 군사 반란인 것입니다.
그렇게 전두환이 권력에 미쳐서 광주 유혈 참사를 벌이고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7년 단임제를 들고 나와서 당선됩니다. 그러나 그가 7년 임기가 끝날 무렵. 장기집권 의도가 보였고 국민들은 체육관 선거인단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987년 6.10 민주 항쟁입니다. 그 때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직선제 민주화 개헌을 외쳤기 때문에 오늘날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된 것입니다.
초심 잃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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