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思無不通님이 오래전에 올려주신 글입니다
그듭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원” 복사본은 곧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잊고 있었습니다)
아래내용은 중국사이트 내용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단순정보제공으로 보아야지
황당하니 등으로 치부코자 하는 분들은 보실필요가 없겠습니다
한단고기 위서론자도 보실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바친 항복문서)
- 글쓴이 : 思無不通
안녕하십니까?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과의 전설은 대륙의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제가 관련된 전설을 소개한 것만도 여러 건이 됩니다.
이 것은 고구려의 영토가 대륙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오늘은
과연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했느냐 하는 것을
“전설과 소설 그리고 경극”
을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료동성 해성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 나오는 내용)
일단
료동성 해성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 나오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부터 소개합니다.
"......却说唐王征东来到了城西南的一个小山头了望,
高丽大兵十万人马一齐向这边掩杀过来.
唐王心里发慌,拨马就跑.
高丽大将盖苏文举起长矛在后面紧追.
唐王李世民所骑战马飞奔着,
'呱达达......'一下,这马就停住了.
你猜怎么着?原来前面是一条长长的、宽宽的、深深的、
泥泞巴唧的淤泥河.
唐王这一看可傻了眼喽.
难道大唐江山气数已尽?难道我大唐帝国就这么断送给你们?
难道我大唐的国君要向你们俯首称臣?想到这,
面对高丽大将步步逼近的枪尖,他一抖马缰绳,喊了声'驾',
那匹战马四蹄扬空猛然一跃,怎么了?没过去.
这河啊,太宽了.战马的四条腿全插进三尺
-> 위의 원문 출전 : www.ylch.net ?http:>http://www.ylch.net/lianzai/z003.htm
(번 역)
대략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당 태종의 동정(東征)시
이 곳(해성, 海城)의 서남쪽에 다다렀을 때
고려대장 연개소문은 10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당태종을 잡으러 오고 있었다.
이세민이 당황하여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는데
연개소문이 긴창을 곧추 세우고 뒤에서 추격을 해왔다.
어느 순간 말이 멈춰서서 보니
앞에는 길고 넓고 깊은 진흙뻘강인 어니하(淤泥河)가 있었는데
당태종은 우습게 생각하고
“설마 당나라가 운세가 다해 고구려에 물려주고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고구려 장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말고삐를 당겨 달아나려는데
"이세민이다"라는 함성과 함께 들리면서 쫒아 오니
말의 네 다리가 세자도 넘는 진흙뻘강으로 빠져들어
빠져 나올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게 진흙수렁속으로 빠지게 되어
연개소문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연개소문) 당나라 왕아 ! 네가 항복을 하면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노라.
당태종은 이 말을 듣고
"당나라의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고 진귀한 보물은 황실에 가득가득한데
상은 무슨 상을 준단 말이냐?
내 비록 오늘 지형을 잘 살피고 준비를 못하고 추격을 당해 이 곳까지 와
진흙구덩이에 빠졌지만 백만당병을 거느리고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연개소문은
활과 화살을 잡고
당태종을 조준하고
수하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명한 뒤
당왕에게 항복문서를 쓰라고 명령했다.
“만약 항복문서를 쓰지 않는다면 화살 한 방에 죽을 것이다.”
당왕은 항복문서를 앞에 놓고 통곡을 하였다.
이 때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벽력과 같은 함성이 들리는데
"왕께서는 마음 놓으시오, 신(臣) 설인귀가 구하러 왔습니다. 연개소문 너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여, 보니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긴 창을 꼬나들고 젊은 장수가 산 위에서 말을 달려 나는 듯이 달려와서
연개소문의 10만대군을 물리쳤다.
연개소문은 옷을 붙잡고 혼비백산하여 멀리 도망을 쳤다.
설인귀는 왕을 구하려고
장창으로 말의 배 밑을 푹 찔러
양 어깨로 힘을 써서 사람과 말을 강 위로 끌어 올렸다.
당왕은 기뻐하며
젊은 장수에게 유격장군으로 삼고 훗날 안동도호부에 봉하고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어니하(淤泥河)에서 왕을 구한 설인귀"라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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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위 원문을 번역해 본 것이며
이 이야기는 근대에 일본이 요동을 침략했을 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경극에 나오는 이야기를 각색해서 고붕(高鵬)이라는 자가 병사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위의 의용군연의 또한 연극(경극)용 소설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한족 입장에서 쓴 이야기이며
실제 경극에 나오는 이야기도 위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한족들이 아마도 이 것을 쓴 목적은
당태종은 위기의 순간에도 하늘이 돕는 황제이며
고구려를 물리친 설인귀의 무용담을 기리기 위해서 각색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위의 지명 어니하(淤泥河)는 실지로 있으며
어디인가에 대해서 찾아 보았는데,
대륙 각성 마다 어니하(淤泥河)라는 곳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바로 섬서성 서안 즉 장안 가까운 곳에 어니하가 있었고
산서성 대동(大同)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도 서안을 둘러 본 소감에서도 나오듯이
그 쪽 지역은
평시에는 흙먼지 날리는 메마른 땅이다가도
비가 오면 완전 갯벌처럼 푹푹 빠지는 진흙뻘밭이 된다는 이야기로 보면
우리의 전설속에
연개소문이 섬서성 장안(서안)을 점령하고
당태종에게 항복문서를 받고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고조 유방과 더불어 차이나 역대 최고의 황제라고 일컫는
당태종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극에서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장면이 나올 수 있을까요?
또한,
차이나의 각 성의 당 태종의 전설에서 보면
연개소문에게 쫒기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또 쫒기고 살아나는 어떻게 보면
아주 도망만 다닌 군주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또한
강소성 염성의 몽롱탑 전설에서도
당 태종이 어니하에 빠져 우물 속에 숨고
산동성 즉묵시에서도 쫒기고
산동성 봉래에서는 도망치다 개울에 숨는 등
온통 어딘가에 숨고 진흙땅에 빠지고 도망다니는 그런 존재입니다.
덧붙여서
위의 이야기에서 설인귀가 흰 옷과 흰 갑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설인귀는 백호장군(白虎將軍)이며
연개소문은 청룡장군(靑龍將軍)으로 나옵니다.
청룡과 백호는 고구려의 사신도에서 보듯이
청룡은 동방의 상징이요,
백호는 서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을 동쪽은 연개소문 즉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고,
서쪽은 설인귀 즉 당나라가 차지해 전체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여
그야말로
용호상박의 형국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성립이 될 것입니다.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그 넓은 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어쩌면 고구려의 영토가 더 클 수도 있음) 사실을 고증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며
고구려가 일개 변강의 소수정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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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주)
사무불통님이 지적하신 대로
“어니하(淤泥河)”는
산서성 대동시와 장안인근에도 있습니다
아래
우리역사 -> 한단고기 해제 편에 운영자가 올린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연개소문전”
을 보면
장안인근 “어니하”로 보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왜냐면
연개소문이 장안에 입성하여 항복을 받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단고기를 위서라 부정하는 분들은 보실필요가 없겠습니다(^.^)
정보의 선택권은 오로지 네티즌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하지 않는 소모전은 무의미 합니다
아래 내용을 다시 참고 바랍니다
-> 어니하 위치 지도는 저녁에 올립니다
(해설)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연개소문 (6)
(계 속)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주1) 요택, 택성 : 이미 언급한 지도를 참고바랍니다
연재가 끝난후 추가로 보완 설명 예정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
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
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주1) 포오거 : 찾는 중
(주2) 발착수 : 찾는 중
추정국은
적봉
에서부터
하간현
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
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
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
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
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
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
이다.
(주3) 적봉 : 요령성 적봉(다른 곳이 있는지는 찾아보고 있는중)
(주4) 하간 : 하북성 “하간”, 하간현 인근에는 “고려성”이 있었다
(주5) 신성 : 하북성 북경 아래 “신성” 이미 소개한바 있다
(주6) 역수 : 신성 아래 지명 “역”이 있고
그 아래를 흐르는 강이 “역수”이고 동쪽은 “대청하” 이다
(주7) 용도성 : 북경 안정문 밖 60리에 “고려진”있다. 용도성은 현 북경유역
하간위에 "구성", "구황화" 북단의 좌측에 "구성(택성?)" ,
이는 오래된 성이라는 뜻인데
한단고기에는 여기가 바로 고구려의 성이라는 뜻 아닌가 ?
이땅은 이미 설명한 백제 강성시 동성대왕 시절 백제 땅이었으며
다시 고구려가 본래 강역을 회복한 것이다 (운영자 주)
(주8) 요동성 : “창려”에 요동성이 있었다
일군을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
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
이다.
(주9) 상곡 : 산서성 대동부 (사기에는 탁록재 상곡이라 하였다)
하여간 산서성 대동시 유역을 말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
왜 중국지도는 한단고기에 기록된대로 지명과 강역을 표시하고 있는가 ?
틀리는 기록이 아니다
너무 정확하지 않은가 ?
필요한 부분만 보완적으로 인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해설)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연개소문 (7)
(계 속)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
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주1) 장안은 섬서성 “장안”을 말한다
(운영자 혼잣말)
KBS사극에서 이부분이 방영되었을때 입에 거품을 물면서
위서인 한단고기 내용을 무슨근거로 인용하였느냐며 OO가 똘똘뭉쳐
비방을 하는 등 난리를 쳤다
OO에서 역사를 교육하는 자들의 시각이다
묻고 싶다.
우리역사는 자랑스러우면 왜 안되는가 ?
하북성, 산동성은 고조선의 강역이요 치우천자의 강역이었으며
고구려, 백제의 강역이었음이 정사에 기록된 것을 너희들도 알지 않느냐 ?
하여간 한단고기 내용을 보면 당나라 수도 장안까지 고구려가 쳐들어가 항복을 받았다
온달장군이 산서성 서쪽끝 “유림관”까지 쳐들어간 사실도 기억나시는지요
(지도인용) 율곤학회 박민우님이 올려놓으신 지도를 무단인용하였습니다(^.^)
“지도가 깨끗해 보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
이라 했다.
(주2) 진평 : 산서성 “요” 아래 “고평, 진성‘을 말함
제일아래 지도를 참고바랍니다
강남에는
월주
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
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
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
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주3) 천주, 회계, 월주 : 양자강 이남에 있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
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주4) 고려진, 안시성, 고려성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취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
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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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개보가 말한다
“연개소문은 비상한 사람이다.
과연 막리지가 있으니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존재하더니,
막리지가 없으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망했다.
막리지는 역시 인걸이로다”
막리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너희들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처럼 하렷다.
화살은 합치면 강하고 이를 나누면 곧 부러진다.
반드시 이제 이 죽으려는 사람의 말을 잊지말고
천하 이웃나라 사림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할지니라”고 하였다
때는 개화 16년 10월 7일 이다
묘는
운산
구봉산
에 있다
(주5) 운산, 구봉산 : 찾는중
휴 ~ 정말 찾기 힘듭니다
이곳은 꼭 찾아내겠습니다
(연개소문전 완)
(중국 "요나라" 이전 요동요서의 기점인 지명 "요(현재 좌권)" 및 진평2군의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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