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영웅 연개소문-2) 산동성 즉묵시 마산대전에서 당태종을 박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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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용요약
산동성 청도 인근 ‘즉묵시’ 서쪽에는 233미터의 마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643년에 고구려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향토지에 기록되어 전해온다.
* 주요내용
- 장소 : 산동성 즉묵시 마산 (233미터)
- 이름 : 마산대전
- 시기 : 643년
* 등장인물
- 고구려 연개소문
- 당 태종
- 용양장군 김걸 : 신라장군이라는 설이 있다.
* 마산대전 상황
당태종이 643년 산동성 마산전투에서 연개소문에 포위되어 사로잡힐 처지에 놓이자
용양장군 김걸(신라장군 ?)이 당태종을 구출하나
마산대전에서 김걸장군은 연개소문에 대항하다 전사한다.
2. 당시 상황 추론
643년 당시 고구려 보장왕 본기를 보면
고구려·백제가 연합을 하여 신라를 치자 신라가 당에 원군을 요청하는 상황이 나오는데
이시기에 산동성 남부 일부를 신라에 내준 것 아닌가 추론해 본다.
고구려·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치는 과정에 당태종이 원군을 왔다가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신라장군 김걸이 구출하고
결국 마산대전에서 전사한 상황 설명이 아닌지 모르겠다.
☞ 김걸은 신라장군이라는 설이 있는데 근거를 찾고 있다.
3. 산동성 즉묵시에서 벌어진 연개소문의 마산대전(馬山大戰)
* 제목 : 马山传奇(마산전기), 마산의 기인한 전설
* 신문 : 青岛新闻网(청도신문망) 2003-03-16
* 주소 : www.qingdaonews.com ?http:>http://www.qingdaonews.com/content/2003-03/16/content_1110455.htm
☞ 해설 : 우리역사교육원 신완순, 기사는 없어졌다.
* 오재성 선생님이 그리신 당시 형세도
즉묵(卽墨)마산(馬山)은 해발 233미터로 즉묵의 서부 평원에 유일하게 우뚝 선 고산으로서
신기(神奇)한 지방으로 충만된 곳이다.
현재 이미 알듯이, 마산은 당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흡사 소(牛)와 유사한 관계가 있어 우비산(牛脾山)이라 불려왔다.
이렇게 된 연유는
산의 형세가 마치 소의 지라와 같아서이며,
나중에는 마산은 또한 "우왕묘(牛王墓)"라 불려졌고 "우왕제신(牛王諸神"으로 받들여져 왔다.
현재 이 곳은 유적지로서 보존되고 있다.
명청시대에는 이 산이 쌍봉이 융기되어 있는 모습으로 인하여
멀리서 보면 말안장같이 보여 "마안산(馬鞍山)" , 또는 "고안산(高鞍山)이라고도 했다.
오늘날에는
마산(馬山)으로 불리며 마안산을 간략히 부르는 말이다.
마산산맥의 주 요체는 사봉(四峰), 일령(一嶺), 일간(一澗)으로 되어 있다.
동쪽의 주봉은 마산이며, 서쪽은 대산, 동남쪽은 보안산이다.
서남은 단산(團山)이며
서쪽의 한 봉우리는 동북방 방향으로 길게 고개를 형성하여 산령을 이루었다.
네 봉우리 간에는 하나의 동서로 된 넓고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 불리고 있다.
청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는 기사에 따르면
당조 정관17년(643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그 군주를 살해하고
스스로 나라의 군후(君後)가 되어서 대군을 이끌고 해(海)를 건너(渡海) 즉묵지방을 침범했다.
당태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거쳐 래주(萊州)를 향해 오는 적을 격퇴하기 위해 나섰다.
당태종은 마산의 서남쪽의 고개(坡, 파)에 주둔했다.
10여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달빛 아래 산에 올라 적 진영을 정탐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에게 발각이 되어 연개소문이 병사를 이끌고 단산(團山)에서 당태종을 추격했다.
당태종이 능히 추격에서 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알게된
용양장군(龍骧將軍) 김걸(金杰)은 칼과 말을 준비하여 단산에 올랐다.
김걸이 쾌마를 타고 마산의 앞 고개의 산골짜기에 다달았을 즈음 정면에서 연개소문과 마주치게 되었다.
김걸이 노하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를 향해 부르짖는 모습을 보니
마치 큰 우레와 같이 정상에서 터지는 듯 하여 산골짜기로 도는 듯 했다.
연개소문이 구원병이 있음을 본 것의 진상은 분명하지 않으나
말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가게 되어 당태종은 풀려나게 되었으며 근심어린 모습으로 도망가 숨었다.
2일째 되던 날,
마산대전(馬山大戰) 중 김걸장군의 작전이 매우 뛰어나 손수 여러 차례 적진을 베어 나갔으며
40여리 이상을 적을 추격했다.
몸의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마산 아래에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숨졌다.
후에 사람들은 김걸장군의 영웅적인 사적을 보고 감회에 젖었으며 단산(團山)을 장군봉으로 불렀다.
원대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충용왕(忠勇王)으로 책봉이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그를 기리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의 연개소문이 머물렀던 산골짜기를 대왕구(大王溝)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연유로 명청시대에 산 위에 한 기의 사당을 만들어 "대왕묘(大王廟)"라 했다.
묘비에는
"김걸이 연개소문이 있는 곳에서 질타했다(金杰叱盖苏文处, 금걸질개소문처)"고 되어 있다.
당태종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구당서’에 또한 나와 있다.
[하략]
* 산동성에서 고구려 연개소문이 당태종과 전쟁을 하여 승리하였다는 전쟁기록이다.
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전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중략)
가을 9월에
“신라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가 우리 나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15일에 밤에 밝았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내렸다.
“신라는 우리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여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명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상리]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깨뜨렸는데,
왕은 사람을 시켜 불러들여서 [연개소문이]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개소문은 [상리]현장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신라와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라가]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상리]현장이 말하였다.
“기왕의 일을 어찌 추구하여 논의하겠느냐?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것을]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만 어찌 옛 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느냐?”
막리지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중략)
* 고구려 연개소문의 기상이 엿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그 전쟁지역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중국의 지방 향토지인 마산지와 즉묵 향토지에 이 기록이 전해 내려오는 연유는 과연 무엇일까 ?
외세와 결합한 신라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의 산동성에서의 전쟁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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