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보고 질의 하신 분이 있어 답변겸 아래 자료를 다시 올립니다
요점은 온달장군의 활동영역이 유주자사 진의 활동영역과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북성은 고구려 주 활동영역일 가능성에 대해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동아일보 기사는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보실수 있습니다
www.donga.com ?http:>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j__&n=200405030351&main=1
(온달장군의 활동영역)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제6 (2) - "온달장군이 산서성 유림까지 평정하다"
(주의사항)
본 내용은 네티즌 분들의 요청에 따라 올리는 것으로 정사의 내용이 아니므로 단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정사와 한번쯤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본문)
(운영자 주)
적어도 "군사학적"으로 따지면 너무도 정확한 기록이라는 사실에
운영자인 저도 자주 놀라곤 합니다
(해설)
평강상호태열제(1)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덕(2)으로 개원 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3)을 보내 갈석산(4), 배찰산(5)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6)에 이르러 북주(7)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세부해설)
(1) 평강상호태열제 : 임승국(주)
- 연호가 대덕인 점으로 보아 평원왕(559-590)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함
(2) 대덕 : 평원왕(평강상호태열제)의 연호
(3) 대장 온달 : 평원왕때 장수 (? ~ 590년)
(5) 갈석산 : 이일봉 (주)
- 태행산맥 북쪽 항산(상산 구문현) 남쪽 "백석산"으로 추정
(자세한 것은 우리역사 -> 고구려 -> 공지사항 "갈석산"편을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6) 배찰산 : "갈석산과 유림"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
(7) 유림관 : 산서성 서쪽 경계 -> 태원 서쪽
-> 목은 이색의 정관음은 탕태종이 양만춘 장군의 백우전(화살)에 눈알이 빠진 것을 읊었는데
읊은 곳이 유림관 작으로 더욱 유명하다 (고 임승국 교수 주)
"고구려쯤 주머니에 든 물건일뿐
아무것 아니라고 큰소리 치더니
어찌 알았으리오
검은 꽃(눈알)이 흰깃 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
유림관이야 말로 중국 장안을 지키는 북방의 중요한 관문이다"
(8) 북주 : 우문호(宇文護)가 세운 중국 북조(北朝)의 왕조(557∼581)
(갈석산, 유림관의 위치)
(왜 유림관까지 갔을까 ?)
- 지형도를 보면 알수가 있다
(1번) 진시황의 장성 종료 부분
진시황의 쌓은 장성 종료부분이고 그 오른쪽이 고대의 요동이었다
물론 윗부분의 장성은 명나라까지 후대에 구축한 부분이다
(2) 고 "습수" = 현재 상간하(상건하)
고조선의 "습수"가 시작되는 강 어귀이다
진장성이 종료되는 시점에서부터 발원하여 북경인근 영정하를 거쳐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고대의 조선의 "열수"이다
(3) 항산, 오대산
"항산"과 "태행산"의 이름을 따 태항산맥이 되었고
후에 "태행산맥"이 된다
이 항산이 바로 고대의 상산이다
상산 구문현의 갈석산이 백석산 인지 태백산 인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여기는 성을 쌓을수 없을 정도로 고산지대이다
오대산이 해발 3,058미터이고 항산은 2,015미터이다
이 오대산에서 나오는 물이 "보수"이다
보살 살 "살수", 살수는 이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4) 고 "북평(北平)" = 현재 부평(阜平)
고구려 모본왕이 평정한 북평, 태원, 어양, 상곡에 나오는 그 북평이다
"삼국사기 - 모본왕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
산맥을 따라 있는 국경지역을 한나라가 침범하니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응징 태원까지 쳐들어 간 것이다
이를 두고 매국식민학자들은 고구려가 그기까지 갔을 리가 없다고 한다
고대 북평은 현재 북경이 아니다. 현재 북평은 나중에(명나라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5) 백석산 = 고 "갈석산"으로 추정된다
(6) "수성현"의 그 "수성"으로 보인다
(7) 고 "석문" = 현재 "석가장"
"석문" 접 "대방"으로 석문과 대방과 낙랑은 인근에 접하여 있었다
(8) 현재의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을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으로 가져다 놓고 황해도에 낙랑이 있었다고 교육하니
그 대를 이은 매국조폭식민후학들이 황해도가 수안이라 "박박(?) 우기고 있다"
참으로 개가 웃을 일이다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든O들일까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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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자료 삼국사기와의 비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삼국사기 평원왕 본기에는 온달의 기록이 없고 열전에 나온다
(평원왕)
평원왕(平原王) <혹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양성(陽成)<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서는 탕(湯)이라고 하였다.>이고
양원왕의 맏아들이다.
→ 한단고기에는 "평강상호태열제"라 표현하고 있다
담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양원왕이 재위 13년에 태자로 세웠고, 15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온달")
(요점)
한단고기 내용과 삼국사기 온달열전의 내용을 비교하자면
후주와 고구려의 전쟁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전쟁지명 등 자세한 기록이 없이 "요동"의 기록만 있고
한단고기는 "갈석산, 배찰산, 유림" 등의 전쟁지명을 남겨 그 전쟁터의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가공의 기록이 아님을 알수 있다
이전 사서에 있는 전쟁 지명 등을 한반도 고려땅 김부식이 모르니 빼버린 것은
아닐까 ?
한단고기 내용을 검토하면 할수록 의문만 더해 갑니다
과연 믿을 수 없는 위서인가 ?
오히려 군사적으로 보면 더 합리적인 사서 아닌가 ?
(열전 상의 후주와의 전쟁기록 발췌)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온달" 원문전체)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의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을 신고 저자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로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왕은 매양 그렇게 말하였는데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가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할멈이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에서]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상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되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말하였다.
“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말고 꼭 국가의 말을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의 언덕에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은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보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영양왕(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흐르는 화살[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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