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드디어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왕을 일컫고,
경신년 효공왕 4년 진훤(甄萱) 9년(당 소종 광화 5, 900)
백제의 개국지는 위례성으로 지금의 천진의 남쪽어딘가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294 한수의 위치
http://blog.daum.net/manjumongol/266위례성의 위치 그런데 견휜이 무슨 근거로 금마산에 백제가 개국했다고 했는지 후대의 그 어떤 학자도 해결을 제시하지 못했다. 금마산은 전주에 속하는데 견휜이 왜 전주에 개국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이다. 내가 보기에
지명이 바뀌었을뿐 위례라는 곳과 금마산은 거의 동일하거나 근처일 것이다.견휜이 그래서 백제의 옛수도 위례근처에 자신의 후백제 수도 전주이자 완산을 정한 것이다. 즉 위례근처가 금마산이고 그근처가 신라말의 완산이란 지명이다. 우리 가문의 족보에는 이의방의 고모되는 분이 전주에 살때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하여 송나라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여 고려에서 군대를 뽑았는데 어린 남동생 대신 누나되는 이의방의 고모가 남장을 하고 입대하였고 낙랑군근처에서 송나라장군 악비를 만나 여자인데도 남장을 하고 늠름한 기상과 시까지 지어 악비를 감동시켜 악비가 고려대장군에게 부탁하여 이의방의 고모를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알수 있다.
1.고려시대에도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니라는 것(악비가 한반도에 온적이 없다)
2.전주는 낙랑군의 남쪽에 있다(백제는 낙랑군의 동쪽, 최리의 낙랑국의 서쪽에 있었다)
완산이씨 족보에는 그들의 시조 견휜은 원래 백제 왕족이라고 한다. 완산이씨와 전주이씨는 편의대로 쓰이는 것일뿐 결국 같은 의미이다. 즉 견휜이 백제 의자황제의 후손이기때문에 후백제를 건국한 것이고 그가 나라를 세운곳이 바로 백제의 옛수도 위례근처라는 것이다.
지금의 베이징남쪽일대가 낙랑군이고 백제는 천진일대 낙랑국은 난하서부일대이다.
백제의 옛성 북쪽 웅진 어구를 웅주라 하고, 그 다음 서남쪽을 전주, 그 다음 남쪽을 무주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가 백제땅을 나눌때 위례혹은 사비의 서남쪽을 전주라고 한것이다. 사비성역시 천진에서 멀지 않다. 무주는 강소성일대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373무주는 강소성
견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 봉이 이를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견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삼국사기
거란지리도상의 순주위치를 보라 거기 백성을 전주로 이동시켰으니 순주에서 전주는 멀지 않다. 결국 전주는 순주의 동남쪽일것이다.현재의 천진남쪽어디일 가능성이 높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동녕부조(東寧府條)를 보면, 가주(嘉州)는 요나라 때의 가평군(嘉平軍)이고, 순주(順州)는 본디 요대현(遼隊縣) 지역이고, 철주(鐵州)는 본디 안시현(安市縣)이고, 태주(泰州)는 본디 거란목(契丹牧)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여기나오는 지명모두 고려의 땅이다. 그러니 순주가 고려땅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원래 요대현은 산서성의 좌권현남부이다. 그런데 신라말과 고려초에는 요수가 현재의 영정하였기 때문에 순주역시 영정하근처로 옮겨진 것이다.
성종(成宗) 14년에 전주(全州)R28;영주(瀛州)R28;순주(淳州)R28;마주(馬州) 등의 주현(州縣)으로 강남도(江南道)를 삼고 나주(羅州)R28;광주(光州)R28;정주(靜州)R28;승주(昇州)R28;패주(貝州)R28;담주(潭州)R28;낭주(朗州) 등의 주현(州縣)으로 해양도(海陽道)를 삼았다가 현종(顯宗) 9년에 합하여 전라도(全羅道)라 하니
고려사
河間郡舊置瀛州
수서
하간군구치소는 영주에 있다.
고려의 강남도가 대충그려질것이다. 거란지리도상의 순주의 남쪽이고 하간부영주의 동쪽일대를 고려는 강남도라고 불렀다. 고려의 양광도도 찾았는데 강남도의 동북지방이 양광도였다.http://blog.daum.net/manjumongol/324려의 양광도는 평주
백제의 완산(完山)【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하였음.】 으로 위덕왕(威德王) 원년(元年)에 완산주(完山州)로 삼았다가 11년에 주(州)를 폐지하였다
. 신문왕(神文王) 4년에 다시 완산주(完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5년에 또 전주(全州)라 칭하였다. 뒤에 견훤이 도읍(都邑)을 세웠으나 태조(太祖)가 이를 멸하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23년에 도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칭하였고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매 이름을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소속시켰다가 현종(顯宗) 9년에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올렸고 13년에 또 전주(全州)라 이름하였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使臣) 야사불화(思不花)를 잡아 가둠으로써 내려 부곡(部曲)으로 삼았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로 하였다. 별호(別號)를 완산(莞山)【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고 또 호(號)를 견성(甄城)이라 하였다. 신창진(新倉津)이 있다.
고려사
안남도호부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려의 안북은 거란과 접경지대이니 당연히 안남은 그 남쪽으로 고지도상의 강남도 일대이다. 고려의 안동은 경북안동이 아니라 한반도일대를 뜻하는 것이다. 공민황제는 홍건적 20만이 쳐들어오자 안동으로 갔는데 이는 한반도로 이동한후 지금의 개성시에 황궁을 새로 건축한 것을 말한다. 북한에서 공개한 고려황릉중에 공민황제의 릉만 크고 화려할뿐 나머지 황제들의 무덤은 일반 서민의 무덤과 비슷한 규모이다. 그것을 황릉으로 볼수 있겠는가 그것은 가묘로 봐야한다. 병력70만의 대제국 고려가 황제의 릉을 겨우 서민의 무덤크기로 지었다면 누가 믿을까 적어도 장군총이나 신라왕릉보다 커야하지 않을까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ㆍ전주(全州)ㆍ나주(羅州) 등 3주로 통하고
고려도경
나주는 연번로속집에 강소성으로 나오니 양주 전주 나주는 같은 방향으로 강소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양주가 텐진근처로 보이니 전주역시 텐진의 남쪽어디이다.
전주(全州)에서 광주(廣州)에 이르는 3주(전주ㆍ청주 및 광주)의 수령들이 성체의 안부를 왕이 한 의례같이 하여 묻고, 영접 전송하는 관반관(館伴官)들이 만날 때에도 그렇게 한다.
고려도경
역시 같은 내용 텐진근처의 양광도와 전주는 바로 이웃한다.
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 지전주(知全州) 오준화(吳俊和)가 사자를 보내와 원영장(遠迎狀)을 내놓자 정사와 부사가 예를 차려 그것을 받았다.
고려도경
자운섬(紫雲苫)
아침에 전주 수신(全州守臣 전주 목사를 말함)이 서신을 보내와 술과 예를 갖춰 간곡하게 사자를 만류하였으나, 사자가 서신으로 고사(固辭)하여 중지되었다.
고려도경
곧 마도에 정박하였다. 마도는 청주(淸州) 땅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는 일이 없으면 여기에 몰아다 먹인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지청주(知淸州) 홍약이(洪若伊)가 개소(介紹)를 역어관(譯語官) 진의(陳懿)와 함께 보내와 전주(全州)에서와 같이 예우하였다. 해안에서의 환영과 군졸의 기치는 군산도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다.
고려도경
전주(全州)의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이 난을 일으켰다. 이전에, 사록(司錄) 진대유(陳大有)가 자못 청렴개결(淸廉介潔)한 것을 자부하고 형벌을 쓰는 것이 지극히 혹독하니, 백성 중에 괴롭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국가에서 정용보승군(精勇保勝軍)을 보내어 관용(官用)의 배[船]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임인 12년(1182), 송 순희 9년ㆍ금 대정 22년 고려사절요
청주(淸州)ㆍ전주(全州) 두 주(州)에 장마로 곡식이 상하자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병인 3년(1086), 송 철종(哲宗) 원우(元祐) 원년ㆍ요 대안 2년
위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고 대청광여도의 지명과 비교해보라 말을 댄다는 마도는 주마와 같은 뜻으로 보이니 저곳이 고려도경의 마도이며 군산도는 개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섬들로 보이니 천진동쪽어딘가이다. 전주에서 일어난 반란은 배만드는것이 싫어서이다.당연히 전주는 바다로 통하는 큰 강혹은 바닷가이다. 마도옆에 청주라는 지명이 보이는가 ! 청주와 전주에 똑같이 장마가 있으니 이는 청주옆이 전주라는 것이다.
즉 정리하면
1.청주, 주마라는 지명의 남쪽이 전주이다.
2.전주는 바닷가혹은 바다로 통하는 큰 강이다.
3.군산도의 서쪽이 전주이다.
몽고 군사 3천 명이 고주ㆍ화주 두 고을 지경에 와서 둔을 치고 척후병 3백여 기가 광주(廣州)에 이르러 가옥들을 불살랐다.
○ 몽고 군사가 동주산성(東州山城)을 함락시켰다
몽고 군사의 척후병 3백여 기가 전주성(全州城) 남쪽 반석역(班石驛)에 이르자, 별초지유 이주(李柱)가 반 넘게 쳐 죽이고 말 20필을 노획하였다
계축 40년(1253), 송 보우(寶祐) 원년ㆍ몽고 헌종 3년
몽골군이 광주를 점령하고 남하하여 전주성근처로 왔다. 한반도에서 경기도 광주를 점령한후 전주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을까 ? 광주남쪽에 전주가 있다면 가능하다.
정리해 보자
1.전주는 백제의 옛수도근처이다(한반도로 짜맞추면 전주와 경기도 하남은 너무 멀다)
2.큰 배를 만드는 곳이 전주에 있다(한반도 전주는 내륙도시이다)
3. 전주 주변에 마도와 청주라는 지명이 북쪽에 있다(한반도 청주는 전주와 멀고 내륙이라 고려도경의 바다길과 다르다)
4.영주가 근처에 있다(한반도 전주는 하북성 하간과 너무 멀다)
5.순주가 북쪽에 있다(한반도전주와 하북성순주는 너무멀어 백성을 이동시키려다가는 다 죽는다)
6전주를 거쳐 광주에 간다(고려도경을 학자들은 한반도 개성앞 예성강에 배를 타고온 송나라 사신 서긍이 거기서 내려 개성으로 왔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원문에는 전주에서 광주를 거쳐 왔다. 즉 한반도로 짜맞추면 서긍은 군산에서 내려 전라도에 배를 대고 거기서 내륙으로 전주 광주를 거쳐 온뒤 갑자기 예성강에서 다시 배를 타고 내린 것이된다. 결국 쉽게 얘기하면 고대에는 한반도에 운하가 있었는데 전주광주를 연결한다는 것이다)
7.견휜이 해군을 동원해 왕건을 공격한 적이 많은데 그 이유가 바로 전주가 바다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해군을 동원하기 쉬웠던 것이다.
8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연산에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후백제가 백제의 옛땅을 거의 수복하여 텐진북쪽에도 땅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1.백제의 수도는 하남위례-웅진-사비 입니다. 시기가 웅진시대 이후라면(즉 개로왕이 죽은 후 5세기 중후반 이후라면) 웅진, 사비는 전주에서 멀지 않습니다.
2. 전주가 내륙도시이다라는 가정은 1500년 전의 해수면이 지금과 동일할 때만 해당하는 이야기 입니다. 특히 호남평야는 간척을 하고, 둑을 쌓기 전까지는 지금과 같이 잘 정돈된 평야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조선시대까지도 전라도의 쌀생산량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타도에 비해 엄청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겠지요.
과거 토지를 셈하던 수치인 "결"은 넓이가 아닌 수매량에 따른 도량형입니다.
즉, 타도에 비해 평지 비율이 넓은 전라도는 평지 뿐 아니라 팔도에서도 땅이 기름진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타도에 비해 우월한 쌀 생산량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3. 지명의 속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반면 비슷한 지명 혹은 잘못된 지명이 기록되는 경우도 그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즉, 기록의 오류도 충분히 고려되어야합니다.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구전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정 사서에만 나오는(예, 요서백제에 나오는 진평군, 진평현은 특정 남조사서 말고는 발견되지 않지요)
7. 견훤보다 고려(태봉,마진)의 궁예가 더 강력한 수군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주를 점령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말인 것 같습니다.
언급하지 않은 번호는 사실 너무 억지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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