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주군 시골 출신이다.
국민학교 때 여름이면 대학생들이 농활을 오곤 했다.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저녁에는 마을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정이었다. 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일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이벤트였는지.
그건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었다. 바깥세상이 잠깐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일이었다.
어느 해 마지막 날이었다.
종료식을 하려는데 아이들이 너무 떠들고 분위기도 어수선해서, 대장형은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행사는 흐지부지 끝났다.
다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친형이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이 형을 찾아보라고 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갔다.
거기에는 대장형이 있었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내 친형과 동네 형, 둘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아래에서 못 한 종료식을, 거기서 자기들끼리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열 살이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걸음이 멈췄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바로 느껴졌다.
‘여기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
대장형은 나를 보고 “같이 있어도 돼” 하고 불렀다.
나는 “사람들이 형 찾아요”라고 말하고 그냥 내려왔다.
그 뒤에 형들과 누나들은 아이들을 구역별로 나누어 집까지 데려다줬다. 우리 집 앞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는데, 나는 갑자기 울었다.
왜 그렇게 슬펐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형들과 누나들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고, 내년에 또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게 슬픔은 대개 눈물보다 침묵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형들과 누나들은 내 키에 맞춰 쪼그려 앉아 말을 걸어주었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때의 장면들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딱히 누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아니다.
대장형이 나를 밀어낸 것도 아니고, 형들이 나를 따돌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 장면이 지워지지 않는지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마흔이 되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은, 아마도 대장형에게 발견된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발견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열 살 때는 몰랐다.
지금은 조금 안다.
누군가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
따로 불러주고 싶어지는 것.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지는 것.
그런 감각은 어릴 때도 사람들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발견되는 쪽이 아니었다.
열 살짜리 나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살면서도 비슷한 감각은 반복되었다.
나는 등록금도, 생활비도, 용돈도 거의 스스로 해결했다. 집에 손 벌리지 않으려고 살았다. 형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집안의 걱정과 지원이 더 자주 향하는 쪽에 있었다.
이것을 단순히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이야기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적어도 덜 중요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왜 늘 알아서 괜찮아야 하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는지는 아직도 가끔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 가끔 그 옥상이 생각난다.
왜 그런가 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어릴 때 한 번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야”라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낀 사람은, 그 감각을 어디 버려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몸 안에 지닌 채 살아가는 것 같다.
그 사건 당시의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아주대 신방과 형, 누나들이었다고 기억한다. 다음 해에는 다른 학교였는지, 다른 과였는지, 다른 사람들이 왔고, 나와 형은 그 농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가끔은 궁금하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내게는 가족도 있고, 나름의 자리도 있다.
그래도 가끔, 나는 아직 그 옥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아이 같다.




































님 직업이 작가 이신가요?
저도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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