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서울의봄 당시 이해찬(1952년생)은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이었고
유시민(1959년생)은 총학생회 대의원 회장이었다.
대학생 병영집체훈련(문무대 및 전방실습) 문제로 복학생들과 총학생회가
이견이 생기고 회의중 이해찬이 유시민 멱살을 잡고 다투기 시작했다.
그랬던 그들이 화해하고 그후를 보면 절친도 이런 절친이 없다.
이해찬에게 민주화운동을 배우고 1988년 초선 국회의원 이해찬의
초대 보좌관은 유시민이고 5공 청문회에도 TV에 나온다.
유시민의 노무현 내각 입각과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이해찬의 추천이 있었다.





































우리 민주시민들이 다 같이 꼭 보는 걸로 보답 해 드리고 싶네요
왜 여기서 조롱받으며 입으로 배설을 할까???
우리 민주시민들이 다 같이 꼭 보는 걸로 보답 해 드리고 싶네요
순국선열을 기려야 할 3.1절 국가 기간산업인 철도가 멈춰 선 대혼 속에서도 그에게는 서민의 발 보다
골프공의 궤적이 더 중요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국민을 발아래 두고 군림하려 했던 특권 의식의 극치였다
200만원 내기 서민의 두달치 생활치 삶을 유흥으로
서민들이 기름값 몆십원에 벌벌 떨며 생계를 걱정할 때
그는 한 판에 200백만원이 오가는 내기골프 를 즐겼다
그 돈은 누군가에게는 목숨 같은 생활비였으나 그에게는 한낱 사교의 유흥비에 불과했다 국민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공감 능력 제로의 리더십이 보여준 가장 추악한 단면이다
국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여겼던 오만함
입으로는 민주와 평등을 외첬으나 몸은 서민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황제의 삶을 지향했던 그 위선은
역사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국민은 개 돼지니 적당이 짖다 말 것 이라 믿었던 그 삐뚤어진 엘리트주의는 결국 민심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이명박 과 박근혜 정부가 탄생하게 만든 1등 공신 이해찬
지옥에서 황제 골프 많이 처라 이해찬 니새끼 뒤지면 깔라고 20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말고 더 많아... 더 까줘?
고이해창씨가 다퉜을수도 있겠네요.
인상이 선해보인다고 순한 사람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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