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극복기장’ 휘장. 전두환 정권은 비상계엄
(1979년 10월26일~1981년 1월24일)을
해제한 뒤 군인과 공무원 등 79만명에게
국난극복기장을 수여했다.
1979년 12월31일 광주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전교사) 육군보병학교 교도대
(교육·훈련이 주목적인 부대)
5월19일 점심을 먹고 있던 교도대
병사들에게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병사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소총(M16)과
개인용 실탄 120발, 분대용 실탄 1060발,
비상식량, 판초우의, 모포, 야전삽 등을
챙겼다.
교도대는 광주와 화순, 나주 사이 경계지역에
투입됐다
5월24일은 송암동 인근 야산에 매복했다.
시민군이 장갑차를 탈취했다는 소식에 화기중대는
90㎜ 무반동총을 챙겨 광주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1~3중대는 나주 쪽에서 오는 차량을 차단했다
오후 2시께 화기중대장이 교도대장에게
“첨병(감시병)들이 마을을 향해 총을 쏘며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무장세력을 봤다”고
보고했다.
교도대장(중령)은 “폭도인지 단단히 살펴보라”고
수차례 지시했다.
화기중대장이 “폭도 같다. 우리 앞까지 왔다”고
보고하자 교도대장은 “그러면 잡아라”라고 명령했다.
화기중대는 곧장 무반동총 등으로 장갑차와
뒤따르던 군트럭을 공격했고
크레모어가 격발됐다.
그러나 공격받은 대상은 시민군이 아닌
11공수여단이었다.
후일 밝혀진 사실은 보병학교 교도대가
11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오해할만 했다.
당시 31사단 병력과 교대후 이동 중이던
11공수여단은 1000여명의 병력이 50여대의
트럭에 탑승해 이동중이었고 대열의
앞과 뒤에는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더구나 11공수는 이동 중 발견한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초등학생이 총격에 사망하기
까지 했다.
매복하고 있던 교도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격을 가하며 진군하고 있는 무리를
수상하게 여기고 적군으로 오해해
90mm 무반동총을 발사하고 크레모어를
격발시킨 후 사격을 가한 것이다.
이 사고로 장갑차를 몰던 전교사 병력과
길 안내를 하던 7공수 병력 그리고
11공수 병력 6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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