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삼도수군 통제사 하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당연히 나라를 구하신 그 분, 이순신 장군님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겁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란 관직은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종 2품 무관직을 말하며,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으로, 조선에는 1593년 선조 26년 부터 1895년 고종 32년 까지, 300년간 총 208명의 수군통제사가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왕, 군인, 정치인, 종교인 들 중에는 이순신 장군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역사에 길이남을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균이라는 자와같이 자기의 시대 백성들은 도탄에 빠트리고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죄를 짓는 인간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역사에 조그만 발자취로 남은 208명의 삼도수군 통제사들도 결국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 하였을 것이고, 그 작은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을 것 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순신 장군님 처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한 분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 언덕에 가면 조그만 공원에 최근에 세워진 '김영통제사각암비문'을 볼 수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純祖二十九年己丑公爲統制使 / 松亭洞民失火延燒海送亭抗北 / 瓦洞人家數百戶盡成焦土公許 / 給南北山之松新造家屋矣以松 / 木濫伐事直指使啓請罷職四洞 / 之民刻公之功德於巖石在曙町 / 貞梁里之界海濱也此巖卽公之 / 杖劍立於其上指揮軍民而屢日 / 鎭火之巖也翌年庚寅刻.
비문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순조29년 (1829년) 지금의 동피랑 일대 4개 마을에서 큰 불이났을 당시, 그 지역을 관할하던 삼도 수군통제사 김영 장군(1772~1850)은 덤바우라는 큰 바위에 올라 군인들을 진두지휘 하면서 마을사람들과 합심하여 몇 날 몇 일이나 계속된 큰 화재를 겨우 진화 하였다.
모두의 노력으로 화재는 진화되었지만 화마가 휩쓸고 간 폐허에 남겨진 백성들은 곧 들이닥칠 겨울에 갈 곳없는 신세가 되었고, 김 영 장군은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백성들을 외면 할 수 없어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한(금송령) 남망산 일대의 소나무 벌체를 허락하여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백성들이 다시 집을 지을 수 있게 도와 주었다. 하지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국법을 위반한 죄(?)를 묻고 결국 장군은 곤장 100대를 맞고 파직을 당하게 된다.
통제사가 떠난 후 마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장군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지휘하였던 큰 바위 (덤바우)에 비문을 새겼는데 그 것이 바로 '김영통제사각암비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김 영 장군은 소나무 벌체로 자신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당시에 허가되지 않은 왕실 소유 소나무 벌체는 큰 죄로 취급됨)을 알고서도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어 (벌체를) 허락하였을 것이라 봅니다. 백성을 위한 죄로 나라의 벌을 받기 위해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되는 날, 마을어귀에 사람들이 모두 나와 배웅하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왜 힘없는 이들편에 선 자들에게만 잔인한 걸까요? 어떤 강요도 없이 자발적으로 십시일반 모은 백성의 정성으로 세겨진 각암비문은 어이없게도 통영시에서 1970년대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서 그가 올랐던 덤바위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김 영 장군의 전설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통영군지에 남아 있던 비문의 내용이 최근 발견되어 원래 각암비가 있던 자리에 여러사람들이 뜻을 모아 성금을 내고 다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6760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110710204119554
이순신 장군님 처럼 통쾌하게 왜군들을 때려잡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진정한 군인 정신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는 글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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